[365인터뷰] 김두호가 만난 오병권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365인터뷰] 김두호가 만난 오병권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 김두호
  • 승인 2019.03.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패티김 세종문화회관 불러낸 오병권 공연전문가
-서울시향 유럽 13개 도시 최초 순회공연 주관
-김생려 지휘자와 함께 한 해방 50주년 기념연주
평생을 무대 공연분야에서 기획 및 운영 전문가로 활동해 온 공연전문가 오병권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198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기획관으로 일을 시작했던 그는 이듬해 클래식 음악 공연중심이었던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대중가수 패티김 공연을 올렸다. 당시 기존의 공연 상식으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1985년 당시 국내 공연장을 대표하는 세종문화회관이 클래식 음악 공연중심의 고고한 전통을 깨고 대중가수 패티김을 무대로 불러내 시끄러운 가요팬들에게 객석을 내놓았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이 무대와 객석의 차별화된 벽을 무너뜨리고 음악의 큰 울타리 안에서 교류와 어울림의 패러다임을 맞이한 국내 음악 공연사상 빼놓을 수 없는 신선하고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실행한 인물이 지금 대전예술의 전당의 오병권(1955∼ ) 관장이다. 평생을 무대 공연분야에서 기획 및 운영 전문가로 활동해 온 분이다.

젊은 시절 세종문화회관과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활동하면서 교향악단과 대중음악이 협연하는 팝스콘서트를 국내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그의 공연 아이템은 성악가와 트로트 가수가 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KBS ‘열린 음악회’ 인기 프로그램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30여년 공연전문가로 열정을 다하고 2015년 4월부터 대전 예술의전당 운영을 맡은 그는 2018년의 경우 공연장 활용률 98%에 관객 동원 20만 명을 넘긴 기록, 전국 대형 문화예술 공연장 가운데 대표적인 최고의 성공 사례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연간 자체 기획 공연 76건, 132회에 유료 객석 점유율이 평균 76%의 실적을 올렸고 민간단체와 공동 제작한 뮤지컬 ‘파가니니’는 대전 예술의전당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무대로 진출시킨 작품이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4월을 앞두고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연임 임기까지 마무리 하고 곧 서울로 귀환하는 오병권 관장을 만났다.


공연전문가 오병권 대전예술의전당 관장./사진=인터뷰365

◆음악교사가 교직을 떠난 까닭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평생을 공연 기획전문가로 활동하게 된 특별한 사연이나 동기가 있는가?

나는 한양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했지만 중앙대예술대학원에서는 문화정책을 전공했다. 모두 공연 기획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사회생활의 시작은 음악교사였다. 서울 한성중학교에서 딱 1년 만에 사표내고 뒤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떠났다.

-음악선생님, 선망의 직함 아닌가?

다들 그만두려할 때 음악선생이 얼마나 좋은 직업이냐고들 했지만 나는 음악교사로서의 우리나라 음악 교육을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음악교사가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장래가 보이지 않았다.

노래 잘 부르고, 악기 잘 다루고, 음악 감상을 잘하게 하여 음악 향유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음악 교육인데 교과서의 틀은 이러한 실용 지식보다 이론 중심의 음악 공부에 매달리게 한다. 음악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음악을 좋아하게 만들지 않고 귀찮고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해 짜증이 났다.

부르고 연주하며 음악을 즐기는 활용 방법론을 가르치면 일찍 노래 좋아하고 연주 그리고 나아가서는 편곡 작곡도 할 줄 알 텐데 가르치는 사람도 재미없고 힘든 교육에 인생을 걸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르치고 싶은 교육세계와는 음악교실이 거리가 멀었다.

-음악과 관련된 안정된 교직생활을 하루아침에 청산한다는 것은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결국 음악 선생으로 살지 않고 성공한 공연 기획전문가로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장래를 향한 스스로의 선택이 현명했던 것 같다.

198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기획관으로 일을 시작해 이듬해 기존의 공연 상식으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패티김 공연을 세종문회회관 무대에 올렸다.

그 때만 해도 대중가요 반주음악은 전자오르간, 기타, 드럼, 색소폰 등 몇 개의 악기 연주에 의존하던 때인데 대중가수가 부르는 무대에 클래식 교향악단이 협연을 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 것도 논란의 쟁점이 되었다.

대중가요 쪽은 의아해 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변화로 환영하는 목소리가 따랐지만 클래식 음악인들은 음악 공연의 전통적인 품격에 혼란을 불러들인 사태로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공연 결과에 대한 평가와 반응은 어떠했나?

사실 그것은 결코 기상천외의 공연이 아니다. 일찍이 런던 심포니와 보스턴 팝스오케스트라는 ET나 스타워즈 같은 어마어마한 영화음악을 발표하고 아바그룹은 음반과 저작권 수입으로 당시 현대자동차의 전체 수익을 능가하는 실적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 공연의 정서로는 아주 위험한 실험성으로 인식되어 나는 사실 그 공연을 기획하면서 말썽이 되면 사표를 던질 각오를 하고 준비했다. 그런데 공연은 대형 홀을 매진으로 채우고 세종문화회관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열광하는 객석의 반응과 함께 음악인과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들이 쏟아져 나와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까지 성공적인 성과를 축하해주고 찬사를 전해주기도 했다.

공연전문가 오병권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198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기획관으로 일을 시작했던 그는 이듬해 클래식 음악 공연중심이었던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대중가수 패티김 공연을 올렸다. 당시 기존의 공연 상식으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진=인터뷰365

◆ 서울시향 국내초유 유럽 순회공연

-그로부터 세종문회회관에 조영남, 장사익 등 대중음악인 무대가 빈번하게 개최 되었다. 음악공연의 다양한 변화도 따랐다. 성악가 테너 이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발표한 노래 ‘향수’가 사랑을 받기도 했고, KBS의 음악프로 ‘열린 음악회’가 등장해 장수 프로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국악 연주자나 판소리 음악인이 교향악단과 협연하는 모습도 흔히 마주치게 되었다. 패티김 공연이 음악 장르의 고정관념과 공연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내고 소통하고 협연하는 공연(共演) 음악의 새장을 보여준 원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연예술 기획자로 산 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시절이다. 여직원 한 명의 지원을 받아가며 1988년 한 달간 우리 서울시향 103명의 단원이 유럽 6개국 13개 도시 순회공연을 다녀온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성사시킨 때이다.

-유럽은 음악의 본고장이다. 서울시향이 그들의 음악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이면 스토리가 많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꿈의 판타지를 현실로 바꾸는 데는 당돌하고 치밀한 용기와 추진력이 필요했다. 불가능한 도전을 실현한 그 때를 생각하면 사실 기적과도 같았다. 공연 개런티는 많지 않았지만 정재동 지휘자를 비롯한 103명의 단원이 프랑스 파리 ‘살 프리엘’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등 대도시를 비롯해 스위스 벨기에 등지의 최고 음악 홀 무대에서 우리 음악인의 기량이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된 것이다.

-연주 장정에 해프닝이나 사고가 없었는가?

여행 여건이 여유롭지 못했지만 100명이 넘는 단원들의 대이동에 큰 사고 없이 무사히 공연을 마친 것도 기적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여성단원이 소매치기를 만나 봉변을 당할 뻔 했으나 남성단원들의 끈질긴 추격에 가방을 놓고 도망쳐 다행히 피해는 없기도 하였고 공항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1,000㎞가 넘는 거리를 긴급히 버스를 빌려 극적으로 국경을 넘기도 하였다.

-대형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하다 보면 대형 사고를 겪을 확률도 그만큼 더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비화를 지금 고백한다면?

1995년 해방 50주년 서울시향 기념공연을 세종문회회관 무대에 올리면서 미국에 이주해 살고 있는 김생려(1912∼1995) 초대지휘자를 초청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창단 지휘자였던 그의 귀국 활동이 대대적으로 화제에 오르면서 기념 공연이 크게 기대를 모았다.

그런데 귀국하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공항에 나간 나는 반가움보다 앞이 캄캄해 오는 걱정이 생겼다. 휠체어에 의지해 귀국하면서 바로 병원에서 신장 투석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환을 겪고 있었다.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음악회 참석차 귀국한 분인데 참석 못할 수 있다고 발표하기에는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어 혼자서 끙끙 앓다가 대책을 마련했다. 악보담당자에게 애국가를 반드시 미리 깔아두도록 요청했다.

공연전문가 오병권 대전예술의전당 관장./사진=인터뷰365

-애국가는 연주 곡명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음악회에서 애국가를 특별히 연주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막이 오른 뒤 진행자가 해방 50주년과 서울시향의 50주년을 새기기 위해 서울시향의 창설자인 김생려 선생을 모시고 애국가연주와 함께 막을 열게 되었다는 소개와 함께 휠체어 지휘자가 애잔한 모습을 드러냈고 마침내 장중하고 엄숙한 애국가 연주가 성공적으로 홀을 감동으로 채워주었다. 잠깐이었지만 그 한 순간에 김생려 선생은 임무를 다해주었다.

-극적인 반전이다. 김생려 선생은 그 해 말 타계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0주년 공연행사가 잘 마무리 되고 리셉션 자리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오병권씨 당신이 서울시향을 발전시켜 주시게! 내가보니 당신은 할 수 있어!”라는 말씀을 하셨다. 결국 그해 12월 그 분은 떠나셨다. 건강이 여의치 않으셨지만 무리하게 참석을 결정한 것은 간절한 모국 음악무대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때문으로 보였다.

-2001년 서울시향에서 ‘오병권의 재미있는 클래식’의 강좌를 운영하며 클래식의 대중화에 열정을 쏟은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시향에서 기획실장으로 재직하면서 내 나름으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 운동을 전개 했다. 서울시향은 2005년 정명훈 상임지휘자가 영입되고 40% 이상의 단원들이 교체되는 등 변화를 시도하면서 국제적인 교향악단의 면모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변화가 따랐다. 사실 법인화 이전의 서울시향은 외국의 기획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일본 NHK교향악단에 비하여 20년 뒤처진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법인화 이후 불과 5년 만인 2010년 유럽 투어를 통해 서울시향이 아시아 최고의 교향악단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 때 나는 속으로 “김생려 선생님! 제가 약속을 지켰습니다.”라고 하며 김생려 선생님과의 약속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1월 정년으로 시향을 떠나 이듬해 대전 예술의전당 공모를 통해 관장에 선임되었다.

공연전문가 오병권 대전예술의전당 관장은 클래식 대중화에 열정을 쏟았다./사진=오병권씨 제공
2015년 대전예술의전당 관장 취임식 소감을 전하고 있는 오병권 관장/사진=대전예술의전당

-대전 예술의전당은 어느 정도의 시설 규모인가?

1546석 규모의 아트홀과 643석의 앙상블 홀, 100석 규모의 콘퍼런스 홀을 비롯해 아카데미 홀과 연습실 등이 있다.

-대전 예술의전당은 공연장의 가동 활용도와 관객 유치 실적인 객석 점유율에서 전국 최고 등급으로 분류되고 있다. 주로 어떤 공연을 하고 있는가?

교향악, 오페라, 뮤지컬, 코미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관객들이 선호하는, 참신하고 재미있고 감동이 따르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편성 운영되고 있다. 공연장의 성공은 프로그램의 선택과 공연장의 음향, 조명, 무대장치 등 시설과 관리직원의 서비스 정신 등 3박자가 3위1체로 움직일 때 성과가 따른다. 지난해 대전 예술의전당은 객석 점유율 75%, 공연장 가동률 98%를 달성했다.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제작해 공연에 성공한 작품인 ‘백치’나 ‘파가니니’가 국립극장과 세종문화회관 무대로 옮겨가는 등 지방의 창작 예술이 서울로 진출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좀 더 활기 있게 발전하면 수많은 서울의 관객이 대전 예술의전당의 객석을 차지할 날도 있을 것이다.

물론이다. 전국이 하루 생활권으로 다가서고 있어서 좋은 프로그램은 동시 공유가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다. 지방에 있는 예술의전당이 활기 있게 문화예술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면 대학 졸업 후 취업률이 가장 저조한 음악 전공분야 종사자들의 활동 요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지난해 60명 정도의 청년음악가로 구성된 대전예술의전당 청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우리나라의 음악가들이 혼자서 연주하는 독주는 잘하지만 여럿이 함께하는 합주는 잘 훈련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키는 국내 최초의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인데 이미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청년 단원들에게 연주 활동비를 지급하며 음악 아카데미 활동과 공연활동을 함께 마련해 주고 있다. 국내최초의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이다.

-공연기획자로 평생을 무대 공연에 바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나의 선친은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다.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중 한 분인 오화영 어른이 저희 집안의 먼 친척 할아버지가 되는 분이다. 아버님께서 그분을 따라 다니셨던 탓에 아버님으로부터 그 어른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덕분에 나도 나의 하는 일이 사회와 나라를 위하는 애국정신과 이어지기를 염원하면서 성장했다. 공연무대의 작품을 기획하면서도 그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여하고 문화 예술 발전에 일익을 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살아왔다.

공연기획자의 삶은 국민들에게 좋은 예술을 전하기 위해 독립운동가처럼, 선교사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구 선생께서 바라신 것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는 문화 국가가 되는 것 아니었는가? 이 일을 우리 공연기획자들이 앞장서서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관련기사

관심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