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가요계의 전설' 최희준의 생전 인터뷰 [김두호의 그때 그 인터뷰]
1960년대 '가요계의 전설' 최희준의 생전 인터뷰 [김두호의 그때 그 인터뷰]
  • 김두호
  • 승인 201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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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요계 큰 별지다...가요계에 굵직한 발자취 남긴 최희준 별세
-최희준, 변함없이 한결같은 우리 가요사의 무게 있는 증인
최희준/사진=인터뷰365 DB

[인터뷰365 김리선 기자] 한국 가요계에 큰 별이 졌다. 1960년대 국민가요로 애창된 <하숙생> <맨발의 청춘> <팔도강산> <진고개신사> 등을 발표해 절정의 인기를 누리며 대중문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최희준(1936∼2018) 가수가 24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장례식장은 강남 성모병원이다.

고인은 서울법대 재학 중인 1960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데뷔한 뒤 독창적인 보이스 컬러의 저음가수로 가요무대의 중심에서 많은 히트곡을 낸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고 한 때 서울에서 안양으로 이주해 그곳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만년을 안양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나직한 노래의 정감에서 느끼듯이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했고 인간관계를 통한 인품도 조용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모범인생을 살아 ‘가요계 신사’로 불리기도 했던 최희준 가수에 대한 추모의 정을 함께 하기 위해 생전에 인터뷰365와 만나 나눈 삶의 고백을 다시 소개한다.

 


다시 노래하며 조용히 늙어갑니다, 가수 최희준

-최희준, 변함없이 한결같은 우리 가요사의 무게 있는 증인

ⓒ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기자] 우리 대중 가요사에 얹혀있는 <최희준>이란 이름의 무게는 이 시대의 저울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가늠할 수 없다.

서울법대 출신의 가수 1호로도 그는 일생동안 화려한 시선을 받았다. 1960년대 대중문화 중흥기의 앞바퀴로 가요무대를 대표했던 최희준을 72세에 이른 2008년 봄날에 만났다.

유리창 밖에 노란 개나리꽃 너울의 봄 처녀가 어른거리는 따뜻한 찻집 창가에 기자와 아주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한 때 정치를 한다며 노래를 접었을 때 헤어졌는데, 다시 노래를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를테면 국민가요였던 <하숙생> <맨발의 청춘> <빛과 그림자> <종점> <팔도강산> <진고개 신사>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부른 저음가수 최희준은 보통 생활 대화도 저음으로 이어진다.

160㎝의 작은 거인. 특유의 나직나직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는 여전히 정감을 느끼게 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여전히 건강해 보입니다.

조용히 늙어갑니다. 노래 부르며 아주 평온하고 평화롭게 삽니다. 우리가 무주구천동 무슨 행사 때 마지막으로 만나고 10여년이 넘었지요? 사는 동안 건강해야 나와 내 가족이 모두 큰 걱정 없이 지금처럼 평온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오후 서너 시간은 헬스클럽에서 보냅니다.

-지금은 어디 사세요? 참, 공연을 준비하신다죠?

안양 동안구 현대아파트에서 아내와 둘이서 12년째 살고 있어요. 공연은 오는 5월 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젊은 후배들이 주관하는 <서울 재즈 빅밴드 페스티벌>인데 특별출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요를 재즈로 편곡해서 부른 적이 있는데 의미도 있고 지금 음악팬들에게 호응이 좋아요. 오늘 저녁에는 윤수일 후배가수의 신곡 앨범 발표회에 참석키로 했어요. 아직도 여기 저기서 불러주니 바쁜 척하고 사는거죠.

-살고 계시는 곳에서 지역구 국회위원도 하셨지요? 지금은 총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입니다. 한차례 하시고 청산하셨는데 국회의원은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쉽지 않다고들 하는데 미련 없으세요?

없습니다. 그냥 내 인생에서 어느 시간 예기치 않게 운명적으로 통과한, 잊을 수 없는 추억정도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회갑 줄에 부딪힌 새로운 경험이었고 엉뚱한 일거리였지만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통합방송법을 두고 난리를 칠 때였지요. 한번으로 털고 나왔고 그 후 정치 쪽 언저리에는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유혹이 들어왔지만 정말 딴 세상 이야기로 담을 쌓고 삽니다. 내 직업은 가수라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본래 자리로 돌아 온 후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다니고 있는 성당의 자선 음악회 같은 곳에 출연해 노랠 다시 시작한 때입니다.

ⓒ인터뷰365

-가수란 직업이 천직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는 건가요?

그럼요. 1961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란 노래가 뜨기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내 운명이 노래에 걸려 있다는 걸 실감 못했어요. 가수가 될 줄은 몰랐어요. 잇달아 부른 <맨발의 청춘> <하숙생> 등이 히트하면서 가수가 팔자로 정해진 거였지요. 나는 후회가 없지만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버님 생전에 그 분의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죄입니다.

-서울 법대생인 아들이 판 검사되어 떵떵거리며 살아야 하는데 노래나 부른다고 실망시켜드린 일이군요. 까마득한 옛날 일을 아직도 마음 아프게 간직하고 계시네요.

잊지 못하죠. 사실 경복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Y대 상대를 지망했어요. 그런데 아들의 성적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가 담임과 상의해 서울대 법대로 돌리셨죠. 아들이 빨리 출세하길 바라셨는데 대학 들어가 노래나 부른다며 아들을 한동안 상대도 안해 주셨어요. 해병대 들어가서도 노래를 불렀던 1960년에 돌아가셨어요. 가수로 제대로 빛을 보기 전에 돌아 가셨지요. 아마 가수로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아버지의 맺힌 가슴을 풀어주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 점은 송구스럽고 허망하게 느껴집니다.

생각해보니 거역한 일이 또 있어요. 어릴 때 아버지는 다른 것은 다해도 국회의원은 하지마라고 하셨지요. 아무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머리를 조아려가며 한 표씩 구걸해 놓고 당선되면 큰 벼슬이라도 한양 처신하는 모습들을 못마땅하게 보신 것 같아요. 그것까지 했으니 나는 불효자입니다.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증조부 어른부터 잠드신 경기도 의정부 녹양리 선산에 모셨어요. 어머님도 그 곳에 모셨습니다. 만일 다시 아버님을 모시고 젊은 시절을 맞는다면 부모의 꿈에 벗어난 터무니없는 길은 안갈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직도 우리 세대는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에서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는 생각은 두려움이 앞섭니다. 평탄했던 지금의 내 인생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지 불안감 때문이지요.

-얼마 전 미국에 이주해 살았던 <그건 너>의 가수 이장희씨가 돌아와 1년에 절반 이상을 울릉도에서 살기로 했다는 소식을 <인터뷰365>에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양반도 1970년대 말 요란하게 인기를 모았던 분입니다. 신성일씨도 영천에 집을 마련하고 있고 이제 그렇게 조용한 곳에서 만년을 보내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즐거운 생각들입니다. 이장희 후배가수는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방송사를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타계한 구상(具常) 시인이 그러셨다지요? 세상살이가 다 별 것 아닌데 갈 때는 다 털고 가야 아름다운 거라고. 명예도 재물도 사람이 늙어가고 지나고 나면 별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합니다.

-<하숙생> 노랫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이랑 두지 말자 미련이랑 두지 말자..’ 그 노래의 진수는 인생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데 뭘 그렇게 욕심을 부리고 사느냐는 대목 같습니다. 어른들이 곧잘 그 노래를 버릇처럼 흥얼거릴 때가 많습니다만 도인이 아니고는 사실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건 힘듭니다. 나이가 들면서 어렵게 느껴지는 일들이라면 어떤 것들인가요?

나이답게 품위를 지키고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고 산다는 것은 정말 수도자의 자세지요. 그래도 남들에게 흠이 안 될 정도의 도덕성은 지켜가야 한다고 늘 다짐합니다. 매사에 나이답게 언행에 신경을 쓰고 인간관계도 허물이 안보이게 주의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례도 너무 쉽게 생각해 수없이 응했지만 일흔이 되면서부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오만하지 않고 처신에 조심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터뷰365

-가깝게 만나는 친구는 누구누구입니까?

요즘은 인생 2모작이라고 해서 나이가 들어도 다들 일이 있어서 바쁘게 삽니다. 특별히 자주 만나는 친구는 많지 않지만 늘 곁에 있는 친구는 있습니다. 이보영이라고 삼성 창업주 이병철회장의 비서실장을 했던 학교 친구입니다. 이한동 전 총리,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이 대학 (서울법대 12회) 친구들이지만 자주 만날 기회가 없어요. 오히려 가요계 선후배들은 이러저런 일로 만나는 일이 많아요.

-가요계에 선배도 있나요?

아흔 줄인 손석우 선생은 아직도 건강하게 사십니다. 요즘 노인들 모인자리에서 우리 어릴 때 상 어른 노릇한 60대는 아이들 취급 받지 않습니까? 하하하.

손석우 선생은 법관 쪽으로 가는 최희준의 운명을 속칭 ‘딴따라’로 돌려놓은 음악인이다. 미8군에서 패티김 위키리 한명숙 등과 노래를 부르며 취미생활 정도에 만족해 하던 무명가수에게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라는 곡을 주면서 최희준이란 이름을 하루아침에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노래는 1960년에 발표해 이듬해 크게 히트했다. 발표하던 시기를 기준으로 삼자면 최희준의 노래 인생은 올해 48년째가 된다.

그로부터 가수 최희준의 노래는 신곡이 발표될 때마다 소주잔을 주고받는 서민들의 입술과 가슴을 타고 움직이며 순식간에 국민가요로 전국에 번져나갔다. 그의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의 힘은 조용히 그러면서 자욱하게 세상 바닥을 흝고 흘러다니는 안개와도 같았다. 그의 히트곡은 영화의 소재가 되어 관객들을 불러 모았다. 1960년대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긴장된 시기이기는 했지만 한 해 200여 편의 영화가 만들어 졌고 가요계도 대형 공연 문화가 청소년들을 구름처럼 업고 다녔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도 최희준은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부르고 <하숙생>을 부른다. 변한 것은 나이지만 건강관리에 대한 그의 노력을 감안하면 백수까지 가수로 건재할지도 모른다.

-가족 분들도 모두 건강하시지요? 여전히 부부 금슬이 남다르실 테고.

김 형(필자를 지칭) 덕분에 좋은 사람 만나 걱정 없이 삽니다. 아내는 가정이 평화롭고 따뜻할 수 있도록 남편에 대한 배려와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음식 솜씨도 마음에 들고요. 아들 둘은 국내에서 모두 안정된 활동을 하고 있고, 딸은 미국에 살고 있어요. 나는 불효자이지만 우리 자녀들은 가끔 이 놈들 봐라 하고 아버지에게 감동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답니다.

필자가 스포츠서울 기자로 활동할 때 부인과 사별하고 독신이었던 최희준에게 결혼 소식이 있다는 기사를 처음으로 공개한 적이 있었다. 그 기사는 맞선을 본 여자 쪽에서 미처 결정을 하지 않고 있던 참이었지만 결혼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부인은 아름다운 스튜어디스 출신의 미녀였었다. 그들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의 ‘기억의 창’ 한 켠에 기자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봄볕처럼 따뜻하고 흐뭇하게 스며든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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