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신성일, '살아있는 무비스타의 전설'로 불리던 그를 떠올리며(하)
[그때 그 인터뷰] 신성일, '살아있는 무비스타의 전설'로 불리던 그를 떠올리며(하)
  • 김두호
  • 승인 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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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살아있는 한국영화 톱스타의 전설 신성일’이 그 빛나는 젊은 생애를 은막에 바치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치의 병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81세의 나이에 하늘로 떠났다.

1937년에 태어나 1960년 <로맨스빠빠>로 연기활동을 시작해 <맨발의 청춘> <만추> <별들의 고향> 등 주연 작품만 507편에 출연,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인기 스타였다.

인터뷰365는 정정했던 고 신성일 배우를 기억하며 그와의 생전 인터뷰를 소개한다. 


[인터뷰365 김두호] 영화는 지난 20세기에 인류를 매료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었고 대중문화의 중심 분화구였으며 배우는 그 위대한 은막의 역사를 찬란하게 수놓은 별들이었다.

우리의 영화사도 1919년 10월 단성사에서 선보인 김도산의 <의리적구투>를 탄생 기점으로 보면 올해 90주년이다. 그동안 우리 영화는 6천여 편에 가까운 제작편수를 기록하였고 영화팬들의 사랑과 갈채를 받은 은막의 별자리에는 수많은 배우들의 얼굴과 이름들이 시대와 세대를 달리하며 명멸하는 가운데 1백년 역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는 칠순의 원로가 된 영화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영/ 현재의 이름 강신성일)은 한 세기에 가까운 우리 영화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톱스타의 인기를 누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인기 배우를 스타로 호칭한다면 정상급 인기배우를 지칭하는 ‘톱스타’의 영예를 신성일은 한해 200여 편이 쏟아져 나오던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로부터 평생을 두고 이름 앞에 달고 살았다. 신성일은 톱스타란 호칭의 어원(語源)이었고 ‘살아있는 무비스타의 전설’로 예찬을 해도 과장이 아니다.

영화배우 신성일은 그렇게 불사조의 연기에너지를 가진 청춘스타로서의 오랜 수명을 유지하며 눈부신 젊은 생애를 보냈다. 한해 60여 편의 겹치기 출연시절도 있었다. 철야촬영이 반복되는 중노동의 연기활동에도 그의 스케줄은 지치거나 멈추지 않았다. 작품의 제작경향이 바뀌고 시대적 사회적 변화의 물결에도 스스로의 개성과 연기자의 매력을 이어가며 최선을 보여준 지혜로운 배우였다. 만년에 이르러 정치로 외도를 해 행운보다 고통을 겪는 불운도 따랐지만 그는 언제나 영화인이었고 ‘톱스타 신성일’의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스스로 깨닫고 산다.

우리 영화의 1960년대 전성기가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전설의 시대로 스러진 것처럼 ‘톱스타 신성일’ 이야기도 우리 영화사에서 앞으로도 더 이상 나타날 것 같지가 않다. 불세출의 톱스타였던 신성일의 지난 삶과 연기활동의 발자취를 회고해 보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의미가 있고 매번 느낌을 새롭게 한다. 기자가 세월을 두고 인터뷰한 신성일의 일대기에 관한 고백을 간추려 정리했다.

[그때 그 인터뷰] 신성일, '살아있는 무비스타의 전설'로 불리던 그를 떠올리며(상)에 이어서

■ 영화의 황금기- 인기의 정점에 서다

배우는 출연영화가 관객동원에 성공하거나 영화제나 영화평론가를 통해 좋은 연기자로 평가를 받으면 스타소리를 듣는다. 나는 <아낌없이 주련다>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을 잇는 애정 멜로영화의 새로운 유망주로 평가를 받아내며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앞머리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주연배우가 된 나의 활동 초기에 인기와 성장의 불을 지펴준 연기 파트너가 엄앵란이다. 신출내기 연하의 배우를 이를테면 인기 정점의 청춘스타로 밀어 올리고 나의 여자가 되면서 은막을 떠났지만 세 자녀를 둔 아내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엄앵란의 인생에 대부분이 나의 이야기가 채워져 있듯이 나의 배우인생도 엄앵란과 연계된 이야기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한다.

나는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한 1962년 <특등신부와 삼등신랑>에서 엄앵란과 공연했고 이듬해 <청춘교실> <가정교사> <말띠여대생> 등 7편, 1964년에는 연간 출연편수 33편 가운데 23편이 엄앵란과 공연한 작품이다. 그 가운데 최희준이 부른 영화주제곡까지 유행가요로 바람을 타게 한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은 엄앵란과 함께 내가 1964년 최고의 갈채를 받아낸 히트영화였다. 원작을 일본에서 가져온 그 영화는 건달세계를 배경으로 신분이 다른 남녀의 사랑을 테마로 한 작품인데 왕초인 나의 똘마니역을 한 트위스트 김까지 그 한 작품으로 평생 스타배우 대접을 받을 만큼 화제를 남겼다.

비로소 여자배우로 톱스타 소리를 듣던 엄앵란과 대등한 인기배우로 떠오른 나의 눈에 엄앵란은 차츰 한사람의 이성으로 다가왔다. 1964년 작품인 정진우 감독의 <배신>을 찍던 청평호수의 촬영장에서 보트를 저어 멀리 사라지는 장면 도중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지점에 이르자 나는 연기 아닌 실제의 키스로 마음을 전달했다. 이어서 <대륙의 밀사> 촬영중 발생한 폭파사고 때 나의 상처는 의식하지 않고 부상당한 엄앵란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나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우리들의 로맨스는 감미로운 러브스토리의 영화처럼, 바쁜 스케쥴의 틈새를 이용해 촬영지의 이면에서 소리 없이 깊어갔고 1964년 11월 14일 워커힐에서 연예인 결혼사상 가장 떠들썩한 혼례를 올렸다. 도처에서 도시락까지 싸들고 몰려든 구경꾼 하객이 3천4백여명으로 집계됐던 우리의 결혼식장은 미리 대기한 팬들로 인해 정작 초청받은 하객은 자리가 없었고 밀려나던 접수부도 입구 연못에 빠져 축의금을 받지 못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5년 나의 주연 작품 40여편 가운데 엄앵란이 상대역인 영화는 <푸른별아래 잠들게 하라> <밀회>를 비롯해 12편이지만 결혼 전에 찍은 필름까지 감안하면 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나의 새로운 상대역으로 김지미 최지희 태현실 고은아 김혜정 문희 등이 분주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김지미 태현실은 한 해 전부터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 이만희 감독이 발굴한 문희의 데뷔영화 <흑맥>도 1965년 나와 공연 작품으로 빼놓을 수 없는 화제를 남겼다.

우리 영화인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연간 200여편이 넘어서는 제작 열정을 토해냈고 1967년에는 240여편이 돌아가기도 했다. 영화검열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옥죄고 제작장비나 영화관시설 등이 열악한 시대였지만 TV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는 영상문화의 전부였고 대중문화의 모체였다. 나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한국영화 황금기의 한복판에서 톱스타의 인기를 누리며 연간 50여편의 출연 작품을 유지했다.

1966년 출연 영화 가운데 <만추> <말띠신부> <하숙생> <소령 강재구> <초우> 등은 모두 관객동원에 성공했거나 작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낸 그해 화제작들이다. 특히 이만희 감독이 남긴 <만추>는 지금도 많은 평론가들이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과 함께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꾸준히 첫머리에 올린다. 시간에 쫓기고 사랑에 목마른 두 범법남녀가 고장으로 멈춘 열차 밖의 산속에서 욕정을 사르는 장면에서 나의 상대역으로 몸을 사리지 않고 좋은 연기를 보여준 여배우가 문정숙이었다. 영화는 절제된 다이얼로그의 시나리오에서 연기와 영상미등 연출 전반에서 애정멜로 영화의 새장을 열었고 뒤에 김수용 감독의 리메이크 작품이 나오기까지 했다.

1966년에 47편에 출연한 나는 1967년은 51편을 남겼다. 그 해 1950년대의 히트작을 리메이크한 <청춘극장>을 통해 나의 상대역으로 윤정희가 신인배우로 첫 선을 보였다. 그로부터 윤정희와 <안개> <까치소리> <강명화> <장군의 수염>으로 이어진 공연 작품은 놀랍게도 나의 영화사에서 상대역으로 가장 많은 99편을 기록했다. 윤정희와 삼각 경쟁구도를 형성한 문희 남정임의 영화 속 남자도 주로 나였지만 그에 미치지 못했다.
우수영화를 선정해 정부가 외화수입 혜택을 주는 보상정책을 시행하면서 주로 문학작품을 소재로 한 문예영화가 한동안 영화제작계의 주류가 되었고 더불어 나는 사랑을 소재로 다룬 작품의 가장 이상적인 주연배우로 1970년까지 연간 50여편의 출연 기록을 유지했다.

 

■  성공을 위한 자기관리와 실행철학

나의 연기 활동은 1970년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세대가 바뀐 새로운 여자 주연배우들의 중심으로 이동한 것뿐이었다. 1970년 49편의 출연을 끝으로 한국영화 전체 제작물량의 위축과 함께 한해 20여 편으로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단일 극장의 개봉시절에 관객동원 최고 기록의 영화는 나의 출연 작품이었다.

1974년 안인숙과 주연을 맡은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1977년 장미희와 출연한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는 모두 영화흥행사에서 관객동원기록을 갱신한 작품들이다. 400여개의 극장이 동시 개봉하는 지금과 달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마다 단일 극장에서 신작 영화를 개봉하던 시절에 <겨울여자> 49만 명의 관객기록은 극장가의 전례 없는 대사건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나의 연기 파트너가 된 여배우는 <레테의 연가>의 윤석화도 있고 <도시의 사냥꾼>의 정윤희를 포함해 이영옥 김창숙 유지인 김자옥 임예진 김영란 이미숙 김진아 등 그 시대의 주연급 여배우들이 대다수 망라된다.

경직된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경제성장의 시대적 변화는 영화 작품 경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는 한 때 젊은 관객들이 선호하는 액션물이 주류를 이루기도 했고 중반기는 호스티스물이 흥행영화의 대세를 이끌었다. 나의 연기 수명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가라앉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면 러브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애정영화의 얼굴배우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나는 시작부터 직업 연기자로서의 철저한 프로정신을 체질처럼 받아들였다. <아낌없이 주련다>를 준비하며 배역의 이미지를 찾아내기 위해 같은 소재를 다룬 앤서니 퍼킨스의 <굿바이 어게인>을 보기 위해 일주일간 극장에서 살았고 시나리오의 120신을 몽땅 암기하는 집념을 가졌다.

영화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나는 수많은 촬영장에서 얼굴이 깨어지고 벼랑에 추락하거나 부상으로 위기를 맞은 흔적들이 몸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가정교사>를 찍기 위해 주인공의 이미지에 맞는 헤어스타일인 스포츠형으로 긴 머리를 미련없이 밀어버려 제작자를 경악시키기도 했다. 작품마다 달리하는 새로운 배역 인물의 이미지를 살려내는 것에 나는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던졌다. 그것이 나의 연기 인생에서 언제나 가장 소중하고 심각한 과제가 됐다. 나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항상 경계하며 활동했다. 그로인해 나의 활동영역은 러브스토리의 애정멜로물에 머물지 않고 사극에서 액션영화 등 장르의 경계가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돌아가는 다작의 겹치기 스케줄에도 촬영 시간을 빈틈없이 지키며 탈없이 체력을 가동했던 것도 내 나름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나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지 않아 인간관계가 원만했다. 한 해 60여 편을 찍을 때는 하루 6편의 촬영장을 옮겨 다녔고 이동하는 차안에서 잠을 때우는 생활이 반복됐다. 그래서 나를 버티게 한, 눈에 뜨이지 않았던 또다른 저력이 스스로의 몸 관리였다.

나의 운동 습관은 신필름의 신인배우시절부터 고희를 넘긴 지금까지 5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시간 날 때마다 헬스클럽에서 각종 기구를 이용한 근력운동을 하고 달리기를 한다. 한창 젊을 때는 권투를 배우기 위해 챔피언을 집으로 초청해 숙식을 함께 한 일도 있다. 나의 운동 습관은 중독에 가깝다. 덕분에 촬영장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위기가 있었지만 강인한 체력으로 극복했다.

결국 평생 배우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연기자로서의 철저한 직업정신과 자기관리, 운동을 통한 체력관리에 성공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신성일의 삶은 배우에만 머물지 않았다. 직접 영화 연출도 하고 제작을 하기도 했다. 1971년에 <연애교실> <어느 사랑의 이야기>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1974년에 <그건 너>를 감독했고, 1990년에는 영화제작사 성일씨네마트를 설립해 <물위를 걷는 여자>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 등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리고 정치활동을 했던 이력도 빼놓을 수 없다. 두차례 낙선을 하고 모든 재산을 잃었던 그는 2000년 대구지역구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정치는 그에게 행운보다 고통의 시간을 더 많이 안겨준 시기였다. 지금 그는 다시 영화인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산다. 경북 영천근교의 산골에 한옥을 지어놓고 그 부근에 영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기념관을 염두에 두고 터를 잡았으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박물관 건립으로 계획을 확대한 것이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나 스무 살 때 영화배우가 되어 5백편이 넘는 주연 작품을 남긴 톱스타 신성일의 생애는 우리 영화사의 신화이며 전설이다. 주인공이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영화팬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김두호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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