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신성일, '살아있는 무비스타의 전설'로 불리던 그를 떠올리며(상)
[그때 그 인터뷰] 신성일, '살아있는 무비스타의 전설'로 불리던 그를 떠올리며(상)
  • 김두호
  • 승인 20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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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살아있는 한국영화 톱스타의 전설 신성일’이 그 빛나는 젊은 생애를 은막에 바치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치의 병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81세의 나이에 하늘로 떠났다.

1937년에 태어나 1960년 <로맨스빠빠>로 연기활동을 시작해 <맨발의 청춘> <만추> <별들의 고향> 등 주연 작품만 507편에 출연,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인기 스타의 수많은 이야기들만 전설로 남겼다.

인터뷰365는 정정했던 고 신성일 배우를 기억하며 그와의 생전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인터뷰365 김두호] 영화는 지난 20세기에 인류를 매료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었고 대중문화의 중심 분화구였으며 배우는 그 위대한 은막의 역사를 찬란하게 수놓은 별들이었다.

우리의 영화사도 1919년 10월 단성사에서 선보인 김도산의 <의리적구투>를 탄생 기점으로 보면 올해 90주년이다. 그동안 우리 영화는 6천여 편에 가까운 제작편수를 기록하였고 영화팬들의 사랑과 갈채를 받은 은막의 별자리에는 수많은 배우들의 얼굴과 이름들이 시대와 세대를 달리하며 명멸하는 가운데 1백년 역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는 칠순의 원로가 된 영화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영/ 현재의 이름 강신성일)은 한 세기에 가까운 우리 영화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톱스타의 인기를 누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인기 배우를 스타로 호칭한다면 정상급 인기배우를 지칭하는 ‘톱스타’의 영예를 신성일은 한해 200여 편이 쏟아져 나오던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로부터 평생을 두고 이름 앞에 달고 살았다. 신성일은 톱스타란 호칭의 어원(語源)이었고 ‘살아있는 무비스타의 전설’로 예찬을 해도 과장이 아니다.

영화배우 신성일은 그렇게 불사조의 연기에너지를 가진 청춘스타로서의 오랜 수명을 유지하며 눈부신 젊은 생애를 보냈다. 한해 60여 편의 겹치기 출연시절도 있었다. 철야촬영이 반복되는 중노동의 연기활동에도 그의 스케줄은 지치거나 멈추지 않았다. 작품의 제작경향이 바뀌고 시대적 사회적 변화의 물결에도 스스로의 개성과 연기자의 매력을 이어가며 최선을 보여준 지혜로운 배우였다. 만년에 이르러 정치로 외도를 해 행운보다 고통을 겪는 불운도 따랐지만 그는 언제나 영화인이었고 ‘톱스타 신성일’의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스스로 깨닫고 산다.

우리 영화의 1960년대 전성기가 다시 맞이할 수 없는 전설의 시대로 스러진 것처럼 ‘톱스타 신성일’ 이야기도 우리 영화사에서 앞으로도 더 이상 나타날 것 같지가 않다. 불세출의 톱스타였던 신성일의 지난 삶과 연기활동의 발자취를 회고해 보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의미가 있고 매번 느낌을 새롭게 한다. 기자가 세월을 두고 인터뷰한 신성일의 일대기에 관한 고백을 간추려 정리했다.

영화배우는 단지 한 작품에 주연을 맡아도 주목을 받는다. 당신은 반세기에 이르는 연기활동 기간 중 총 541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 중 506편에서 주연배우로 활동했다. 모두 전무후무한 기록들이다. 출연 작품 목록을 보면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 이른바 1960년대 트로이카시대부터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으로 이어진 1970년대 트로이카시대를 포함해 1995년 현역 활동기까지 작품 공연 파트너가 된 여배우만 118명에 이른다. 화려한 진기록의 주인공으로 당신이 걸어온 길에 무수히 피고 진 연기 활동에 따른 일화와 삶의 얘기를 듣고 싶다.

신성일(申星一)이라는 이름은 강신영이라는 무명의 배우 지망생을 발굴한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영어의 뜻을 담아 한자 표기로 작명한 예명이다.

배우로 진로를 선택한 나에게 우연한 기회에 행운이 따랐다. 내 나이 스무살 때였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홍성기 감독의 선민영화사와 함께 흥행영화 제작을 주도할 무렵인 1957년 신필름이 신인배우 공개모집을 시행했다. 면접시험이 있던 날 광화문 네거리 국제극장 뒤편에 있던 신필름 건물 입구에는 전국에서 지망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당시 시위진압에나 출동하던 기마경찰대가 동원되어 거리를 통제할 정도였다.

꼬리가 보이지 않게 줄을 서 있는 응시자를 보고 줄서기를 포기하고 때마침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해 영화사 부근의 빌딩 추녀 밑에 쪼그리고 앉아 낙담하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 구두닦이 소년이 나타나 부근 다방에서 누군가가 나를 찾는다는 전갈을 하고 따라오게 했다.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구두닦이를 시켜 불러들인 키가 크고 바싹 마른 체격의 남자는 “넌 뭐하러 왔어?”하고 묻고는 메모쪽지를 건네주며 줄을 서지 말고 바로 신상옥 감독에게 가보라고 말했다.

줄을 서지 않았지만 그 많은 젊은이 속에서 나를 발굴해 다방으로 불러들인 사람 덕분에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고 최종 결정자인 신상옥 감독도 나를 만나는 순간 함께 일할 수 있느냐고 첫눈에 합격카드를 던졌다. 우연히 자나가다가 나를 발견한 사람이 조감독이었던 이형표 감독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신필름이 2천6백40명의 응시자 중에서 신인 신성일을 선발했다고 보도했다.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없던 시절, 김인걸 씨가 운영하던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다닐 때였다.
 

■ 데뷔 전후

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대구의 명문인 경북고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나의 꿈은 배우가 아니라 서울대 진학이었다. 그러나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경북도청의 부녀계장까지 지낸 어머니가 산통계라는 사금융에 휘말려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도피하다시피 서울로 이주해 살던 암울한 방황기가 있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던 시기의 나는 충무로에서 우연히 <검은장갑>을 부른 인기가수 손시향을 만나면서 배우를 지망하는 극적인 인생의 전기를 맞이했다.

화이트컬러의 정장에 백구두를 신은 ‘마카오신사’로 눈앞에 나타난 손시향은 친하게 지내던 고교 동창이었다. 오랜만에 서울의 거리에서 마주쳐 반갑게 달려가 손을 잡았지만 그는 갈 길이 바쁜지 “오랜만이야”하고 가볍게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 버렸다. 싸늘한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는 노랠 잘 불러 가수로 성공했지만 나는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오기가 일어났고 곧장 배우학원으로 발길을 옮기게 한 동기가 됐다.

신필름의 신인배우가 되었지만 금방 행운이 열린 것은 아니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빠빠>에서 막내아들 역으로 스크린에 제대로 얼굴을 드러내기까지 3년 가까이 나에게 주어진 일은 주로 영화사 사무실 잡부 역할이었다. 전화를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촬영장에서 배터리를 운반하는 일거리였지만 얼굴만으로 뛰어난 배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한 곳이 신필름이다.

신상옥 감독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성춘향>을 준비하면서 이몽룡 역을 염두에 두고 신인을 발굴한 것으로 보였다. 신 감독은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중국 고전을 소재로 한 <백사부인>에서 최은희 여사(이하 모든 이름에서 경칭 생략)와 공연을 시킨 일도 있다. 그러나 연기력이 부족하고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신성일보다 나이가 많지만 연기력이 확실한 김진규를 최은희의 상대역인 이몽룡으로 선택했고 그 영화는 감독이 의도한 대로 공전의 히트작이 됐다.

신필름에서 나는 <상록수><연산군>에도 얼굴을 비쳤지만 시선을 받을 만한 배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신필름은 배우가 되기 위한 소양을 스스로 키우고 연기에 눈을 뜨게 한 출생지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영화를 움직이는 인기 작가나 평론가들과 교분을 나누어 가며 좋은 연기자가 되기 위한 기량을 키우고 장래를 준비하는 노력을 치밀하고 성실하게 진행했다. 신필름에서 주는 월급으로 승마 검도 권투 등 연기자가 필요한 각종 운동을 익히면서 평생을 체력관리에 소홀하지 않은 습관도 가지게 됐다.

나의 진로에 가능성과 희망의 예고탄이 된 작품은 1962년 한운사의 방송 인기 드라마를 시나리오로 옮겨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아낌없이 주련다>였다. 그 영화는 차태진의 극동흥업이 제작한 그해 대표적인 흥행 화제작이다. 나는 시나리오를 받고 신필름과 결별했다. 처음으로 주연급 배역을 놓칠 수가 없었다. 신필름에서 배신감으로 받아들였지만 3년간의 전속계약 기간이 지났다는 점에서 나의 결심을 막지 못했다.

피난시절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독신녀와 연하의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나눈 러브스토리인 이 작품에서 나는 연상의 인기배우 이민자의 상대역이었다. 뒤에 나의 아내가 엄앵란도 이민자의 동생역으로 출연했다. 신인배우인 내가 <로맨스빠빠>에 이어 다시 마주친 엄앵란은 1955년 <단종애사>로 데뷔한 선배였고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인기스타였지만 그로부터 우리의 인연은 일과 사랑에서 숙명적인 동반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때 그 인터뷰] 신성일, '살아있는 무비스타의 전설'로 불리던 그를 떠올리며(하)>로 이어집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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