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 풍경] ‘아름다움’을 향한 ‘새’의 시선 ... 연극 ‘추남, 미녀‘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 풍경] ‘아름다움’을 향한 ‘새’의 시선 ... 연극 ‘추남, 미녀‘
  • 주하영
  • 승인 20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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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Amélie Nothomb)의 소설 ‘도가머리 리케 Riquet à la houppe‘ 원작
샤를 페로의 1697년 동화를 새롭게 재창작한 아멜리 노통브의 2016년 소설 ‘도가머리 리케(Riquet à la houppe)‘의 연극 개작 작품 ‘추남, 미녀‘ 공연 장면./사진=예술의전당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사랑’만큼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설명하려 애쓴 것이 또 있을까?

중국의 철학자 노자는 “누군가에게 깊이 사랑받는 일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일은 ‘용기’를 준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사랑받는다는 확신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로마의 수도사이자 문필가인 토마스 머튼은 “사랑은 사실상 삶의 완성이다”라고 말했고, 미국의 저술가 샘 킨은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 완벽한 사람을 찾음으로써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을 완벽하게 보게 됨으로써 사랑하게 된다”고 말했다.

어쩌면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의 말처럼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은 언제나 가장 큰 사건, 유일한 사건”인지도 모른다.

최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는 샤를 페로의 1697년 동화를 새롭게 재창작한 아멜리 노통브의 2016년 소설 ‘도가머리 리케(Riquet à la houppe)‘의 연극 개작 작품 ‘추남, 미녀‘의 막이 내렸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서로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는 추남 '데오다'(백석광)와 미녀 '트레미에르'(정인지)./사진=예술의전당

1992년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한 편씩 소설을 출간해 온 것으로 알려진 노통브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방글라데시, 버마, 라오스, 미국 등 세계 여러 곳을 돌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벨기에 출신의 소설가이다.

20세가 되어 브뤼셀 대학(ULB)에 다니기 시작할 때까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에 깊이 각인된 단어가 있다면 ‘고독’과 ‘정체성’일 것이다.

노통브는 2014년 벨기에 신문 ‘르수아(Le Soir)‘와의 인터뷰에서 고독의 ‘종착점’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대학이 오히려 ‘거부’로 인한 총체적인 고통의 공간이 되어 ‘완벽한 고독’을 선물했다고 회상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노통브의 혼란스러운 시간들은 다른 나라로 옮겨갈 때마다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음에도 답장을 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기억과 함께 관계와 사랑, 거부와 수용, 고독과 관조와 같은 철학적 사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소설들은 자서전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주로 사랑과 거부, 존재와 불안, 타인의 시선과 자아의 이미지, 자유와 정체성에 관한 주제들을 탐구한다.

2012년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을 재창작한 이후 2016년 또 한 번 동화 재창작에 나선 노통브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페로의 이야기인 ‘도가머리 리케‘를 선택한다.

추한 왕자와 아름다운 공주의 결합에 관한 이야기인 ‘도가머리 리케‘는 노통브의 새로운 통찰 속에서 아름다움과 비범함, 추함과 괴이함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읽혀지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어떤 장애와 고난을 불러오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탐색한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10대가 된 '트레미에르'의 첫사랑 '트리스탕'(백석광)에 관한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할머니 '파스로즈'(정인지). 요정 같기도 하고 마녀 같기도 한 할머니로 묘사되어 있는 원작 속 '파스로즈'는 긴 가운을 입은 배우의 '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구체화된다./사진=예술의전당  

그녀는 ‘르수아‘와의 또 다른 인터뷰에서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인식에 이르게 되면, 곧 끔찍한 두려움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과 타인에게 비친 나, 그리고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내의 개인의 이미지에 관한 탐구는 스스로도 자신의 추함에 고개를 돌리게 되는 괴물 같은 남자 ‘데오다’와 지나치게 예쁜 나머지 오히려 증오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운 여자 ‘트레미에르’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심리와 사회의 편견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노통브는 아름다움이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은 극도의 아름다움에 무심하지 않다. 그들은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미워한다. 극히 못생긴 사람은 가끔 약간의 동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극히 아름다운 사람은 연민은커녕 화만 치밀어 오르게 한다. 성공의 열쇠는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예쁘장하게 생기는 데 있다.”

노통브가 추남 왕자와 미녀 공주의 결핍과 사랑에 관한 동화를 재창작함으로써 새롭게 꼬집고 싶었던 것은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적당한 정도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보여주는 ‘편협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트레미에르의 빤히 바라보는 커다란 두 눈과 흐트러짐 없는 관조의 표정은 적당한 기준을 넘어선 비범함에 대한 질투와 낯섦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멍청함’의 대명사가 된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무엇이든 빤히 쳐다보는 '관조'의 눈,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어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단어 속에 가둬버린 '트레미에르'(정인지)의 아름다움은 보석 모델이 된 트레미에르를 카메라로 비추어 인터뷰하는 장면을 통해 표현된다./사진=예술의전당

그녀의 주의 깊음은 얼빠짐으로, 침묵은 의견 없음으로, 일관적인 태도는 어리석음으로 읽힌다.

결코 징징대지 않는 아이는 학교 등교 첫날부터 왕따를 당하고, 놀이를 가장한 몰매를 맞으며, 모두의 증오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관조’의 눈을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공격에 통증을 느끼거나 상처를 입지 않는 그녀를 싫어한다.

증오를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증오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사실만큼 무력한 것이 없기에 그들은 그녀를 ‘멍청하다’는 단어 속에 가둬버린다.

하지만 트레미에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름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무엇에든 집중하고 그렇게 찾아진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운다.

‘적당한 기준’을 벗어난 아름다움에 대한 질시와 증오가 존재한다면, 적당한 기준을 벗어난 ‘추함’에 대한 무시와 혐오 또한 존재한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2인극으로 진행되는 극은 두 주인공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펼쳐보일 때 다른 배우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연기하며 이해를 돕는다. 척추 후만증으로 '코르셋'을 착용한 10대의 '데오다'(백석광)이지만 여학생들은 그의 '남다름'에 매력을 느낀다./사진=예술의전당

노통브는 “아이의 추함은 노인의 추함보다 훨씬 우리를 당황시킨다”고 말한다.

삶의 충격과 고통이 사람의 겉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노인의 추함은 받아들이면서도 “아직 삶의 충격이 다가오지 않았는데도 흉측하게 생긴 사람”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해의 모든 시도를 꺾어 놓은” 데오다의 흉측함을 비웃고 경멸하며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의 야만스러움과 천박함을 묘사한다.

하지만 가장 우월한 형태의 지성인 “타인에 대한 감각”을 소유한 데오다는 “자신이 추하다는 사실이 마르지 않는 고통의 샘을 파놓았음을 인식하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대범함과 탁월함을 발휘한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척추 후만증으로 '코르셋'을 착용한 10대의 '데오다'(백석광)이지만 그의 '남다름'은 여학생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언제나 '새'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는 데오다는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사진=예술의전당

그는 관찰하고 파악하며 적절한 순간에 반응함으로써 나름의 방식으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터득한다.

적어도 “단체정신과 위계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정’이라는 숭고한 단어가 절대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100명이나 모여 있던 운동장에서 자신의 머리에만 새똥이 떨어진 사건은 데오다를 새로운 ‘인식’으로 이끈다.

그는 자연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느낀다. 인간에 대한 ‘환멸’은 하늘을 비행하고 거리를 두고 지켜보며 다른 관점을 확보하는 ‘새’라는 종을 향한 ‘열망’으로 바뀐다.

‘새’는 노통브가 현대인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조류학 박사가 된 데오다는 척추 후만증을 앓고 있는 자신의 등 운동을 도와주는 물리치료사 사스키아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새를 연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을 가지는 거예요. ... 오랜 세월 동안 새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요. 우리의 실수는 그것들을 번역하고자 하는 데 있을 겁니다. 그 불투명성을 존중하는 것도 멋진 일인데 말이죠.”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척추 후만증으로 인한 등 근육 운동을 위해 만나게 된 물리 치료사 '사스키아'(정인지)에게 빠져버린 '데오다'(백석광). 사스키아는 프랑스 인 남편과 결혼해 8년째 파리에 살고 있는 네덜란드 여인이지만 데오다는 2년 동안 그녀에게로 향하는 사랑을 거두지 못한다./사진=예술의전당

인간과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인간이 가장 관심을 두지 않는 종, 인간보다 뛰어난 ‘비행’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간에게 하찮은 것으로 취급받는 새가 데오다의 관심을 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보다 더 장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새의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말없이 저 높은 곳에서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인간을 지켜봐 온 새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사실 역사 속에서 새는 하늘과 땅의 중재자였으며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해왔다.

새는 죽은 자들의 영혼의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으며, 천사들은 다른 어떤 존재보다 날개를 단 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사진=예술의전당

새의 상징성을 연구해 온 학자들에 따르면, 새는 “자유와 힘, 다른 창조물들과의 조화”를 상징한다.

새는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장애를 견디는 능력, 목표를 향해 사납게 달려가거나 펄떡대지 않으면서 완벽한 타이밍이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능력”을 대변한다.

새의 관조의 눈은 “복잡한 사고와 세속적인 관심에서 벗어난 존재의 가벼움”을 설명하고, 새의 노래 소리는 “새로운 희망,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무엇보다 서로가 날개를 펼치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의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말없이 관찰하고 바라보는 능력은 편견으로 인해 지독한 근시안에 빠져버린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오다가 새의 ‘관조’를 닮은 트레미에르를 한 눈에 알아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조류박사가 된 '데오다'가 새에 관해 쓴 책을 읽고 있는 '트레미에르'(정인지)./사진=예술의전당 

또한 아름다운 동시에 추하고 젊은 동시에 늙었으며, 온화한 동시에 무시무시한 얼굴을 가진 할머니 파스로즈의 품에서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존한 폐허의 비범함을 관조하며 “평범한 세상의 하찮음”에 입을 다물어 온 트레미에르가 자신의 추함을 위풍당당하게 과시하는 ‘공작새’와 같은 데오다를 알아보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밀착되어서는 안 되는 ‘보석’처럼 “접촉을 참아낼 수 없는 섬세함”에 대해 알고 있고, 빛에 의해 비춰지지 않고서도 암흑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가능한 자주 ‘착용’해 주면서 다른 사람들이 세운 기준에 따른 ‘감정’이나 ‘평가’를 받지 않아야 할 보석의 필요성에 관한 할머니의 말은 사실상 ‘사랑’에 관한 비유이다.

트레미에르는 암흑 속에서 보석들을 사람처럼 착용하고 있는 할머니 파스로즈를 바라보며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

“보석들이 영원히 그것을 착용할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착용됨으로써 생명력을 가지듯” 사람 또한 자신을 품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만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요정 같기도 하고 마녀 같기도 한 할머니 '파스로즈'를 연기 중인 배우 정인지./사진=예술의전당<br>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요정 같기도 하고 마녀 같기도 한 할머니 '파스로즈'를 연기 중인 배우 정인지./사진=예술의전당

숨겨져 있는 ‘비범함’, 그 비범함의 특별함을 적당함의 기준에 빗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 보석은 빛을 발한다.

노통브의 ‘도가머리 리케‘가 페로의 동명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창작함에 있어 추함과 아름다움, 재치와 지성의 문제가 아닌 평범함과 비범함, 그리고 편견의 문제를 꼬집었다면, 연극 ‘추남, 미녀‘는 또 다른 ‘해석’을 펼쳐 보인다.

연극 ‘추남, 미녀‘의 연출을 맡은 이대웅은 프로그램북을 통해 “추남, 미녀는 못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하지 않은 두 남녀가 ‘있는 그대로’ 평범하게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할머니 '파스로즈'가 마치 사람처럼 온 몸에 '보석'을 착용하고 암흑 속에서 '빛'을 발할 때의 환상스러움과 찬란함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트레미에르'(정인지). 보석들의 찬란함은 관객들의 눈 앞에 크리스털로 된 샹들리에가 비추는 아름다운 '빛'들로 가시화된다./사진=예술의전당 

드라마투르그를 맡은 허영균은 노통브의 원작이 데오다와 트레미에르의 이야기를 차례로 교차하며 삶의 여러 단계를 구성해 나가는 방식을 무대 위에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거울이 사물을 역전시키듯 그들의 삶이 양극단에 놓여 있으면서도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했음을 설명한다.

그는 “(데오다의) 지성은 몰두에 목마르고, (트레미에르의) 멍청함은 관조하는 지혜를 낳게 되므로 추함과 아름다움은 주인공 둘을 세상에서 조금 떨어 뜨려 놓는, 온전히 자기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석한다.

그는 제목 ‘추남, 미녀‘ 사이에 놓인 ‘쉼표’는 “두 사람이 각각 존재하기에 결국 만날 수 있습니다”라는 것을 설명한다고 덧붙인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각자 방송국 대기실에 홀로 갇혀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추남 '데오다'(백석광)와 미녀 '트레미에르'(정인지)./사진=예술의전당

연극 ‘추남, 미녀‘는 두 주인공의 각기 다른 삶을 무대 위 한 공간에 마치 “일상의 파편”처럼 펼쳐놓으며 오브제와 조명, 스크린, 그리고 그래픽을 통해 효과적으로 관객들을 ‘거울’의 양면 같은 세상으로 끌어들인다.

‘사물을 역전시키는 거울’에 초점을 맞춘 극은 트레미에르의 이야기를 현재에서, 데오다의 이야기를 과거에서 시작한다.

두 주인공이 보석상 모델과 조류학자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기다리던 대기실에서 운명적인 만남에 이르는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설정한 극은 두 사람의 탄생과 유년시절, 학교생활, 청소년기, 성인기에 부여된 많은 사건들을 10개의 소제목이 달린 장면들로 축약한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방송 프로그램 출연을 위해 기다리던 대기실에서 서로를 만나게 된 미녀 '트레미에르'(정인지)와 추남 '데오다'(백석광)./사진=예술의전당

아기에서 출발한 데오다와 성인에서 출발한 트레미에르는 서로가 만나게 되는 한 지점을 향해 각기 반대 방향에서 달려간다. 다소 복잡하고 산만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두 배우의 놀라운 연기력에 의지해 재미와 흥미로움이란 옷을 입는다.

두 배우는 관객들을 향해 각자 데오다와 트레미에르의 이야기를 들려줌과 동시에 상대 배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역할을 소화해낸다.

또한, 아름다움과 추함은 외모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변화와 태도, 움직임 등으로 상징적으로 의미화한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외모’라는 시각적 요인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추함과 아름다움이 각자 두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발휘했는지를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연극 ‘추남, 미녀‘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의 ‘거울 단계(mirror stage)’의 이미지이다.

어린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최초의 자아가 형성되는 거울 단계는 사실상 평면에 투영된 타자적 이미지일 뿐 실제 주체와 같다고 할 수 없다.

실제 주체와 이미지 사이의 ‘분열’은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자아는 점점 더 착각과 환영 속에 살며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기초하고 타인의 평가에 집착하게 된다.

연극은 거울 단계를 아주 어린 시기에 빠르게 겪은 데오다와 아주 늦은 나이에 맞닥뜨리게 된 트레미에르를 양 극단에 있는 삶으로 설정하고 진정한 ‘사랑’의 발견을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가치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 보인다.

“보석을 착용하면서 그 영혼의 떨림을 느끼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 말하는 트레미에르는 데오다에게서 추함이 아닌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데오다는 ‘영혼의 떨림’을 느낀다.

연극 '추남, 미녀' 공연 장면. '거울'을 강조하는 극은 마침내 '사랑'으로 연결된 두 사람이 거울 앞에 서서 빛을 발하고 관객들을 돌아본 후 거울문을 열고 무대 뒤로 나가며 닫히는 구조로 막을 내린다./사진=예술의전당

주창윤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땅과 우주 사이에 있는 두 개의 별”에 비유한다.

모든 별이 중력과 궤도를 갖고 있듯 두 영혼은 서로의 영혼을 끌어당기지만 일정한 사이를 유지한 채 충돌하지 않는다.

구심력과 원심력이 조화를 이루며 일정한 궤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의 중력은 자기인식과 자기애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인 ‘자기인식’과 자신의 본질을 소중히 여기는 ‘자기애’가 없이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

‘자기애’라는 구심력이 없이 ‘타인을 향한 사랑’인 원심력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춰주는 거울이 없이도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기애’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타인의 기준에 근거하지 않고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의 눈’이 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각자 나름의 보석이라면, 한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영혼의 떨림을 가져다 줄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읽어내기 위해 모든 감각을 활짝 열고 관찰하는 태도와 아직 그 누구도 찾지 못한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해 보다 높은 곳에서 넓은 시선을 던지는 ‘새’의 자세가 아닐까?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고, 인간에겐 ‘새’의 시선이 필요하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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