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언어, 소리 없는 ‘침묵’의 배출구...연극 ‘그을린 사랑’
영혼의 언어, 소리 없는 ‘침묵’의 배출구...연극 ‘그을린 사랑’
  • 주하영
  • 승인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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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 레바논 출신 캐나다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Wajdi Mouawad)의 'Incendies(Scorched)'(2003)
연극 '그을린 사랑' 공연장면. 나왈과 크파르 라야트 감옥의 고문 기술자 '아부 타렉'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남매 '잔느'(이세인)와 '시몽'(이원석). 남매는 자신들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강간한 '고문 기술자'일 뿐 아니라 어머니가 '사랑'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사진=마크923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일반적으로 ‘침묵’은 소리나 소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침묵’은 어떤 감정을 담고 있을까? 고요한 평정심일까, 아니면 분노의 억누름일까? 침전하는 절망 혹은 우울일까, 아니면 소리 없는 고통의 아우성일까? 말할 수 없는 슬픔일까, 아니면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굴욕일까?

프랑스 역사학자 알랭 코르뱅은 ‘침묵의 예술’에서 침묵은 “말이 소리로 나오기 전 명료하게 모습을 갖추는 내면의 장소”이며, “감정이 지속되는 징조”라고 말한다.

그는 토마스 모어의 “가장 깊은 감정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과거의 침묵을 환기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되는 방법을 다시 배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혼의 소리 없는 언어”, “아무것도 새어나오지 않는 비밀의 누설”, “단절과 초연함, 자아의 망각 조건”이라 부르는 침묵에 대해 코르뱅은 ‘오베르망‘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존재를 관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열정의 침묵 속에서 뿐이다.”

올릭픽공원 K-아트홀에서는 레바논 출신 캐나다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연극 ‘그을린 사랑’이 공연 중이다.

무아와드의 4부작(Tetralogy)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연극 ‘그을린 사랑’의 원제는 프랑스어로 ‘Incendies(2003)’, 영어로는 ‘Scorched(2005)’이다.

극작가 무아와드는 1968년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태어나 7살 때 내전을 피해 파리로 이주했고, 1983년 프랑스 비자를 더 이상 연장할 수 없게 되자 또 다시 캐나다 퀘벡으로 이주했다.

1999년부터 ‘퀘벡의 떠오르는 스타’로 불리던 무아와드는 200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훈장을 수여받았고, 2007년 캐나다 국립예술센터(NAC)의 예술 감독으로 부임했다.

예술 감독 수락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이력을 “한 번의 전쟁과 두 번의 추방, 그리고 죽음”이라 묘사했다.

1943년 프랑스 통치체제에서 독립한 이후 “정세가 평온했던 것은 오직 5년뿐”이라고 평가되는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과 주변국들의 분쟁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내전이 끊이질 않는 나라이다.

그을린 사랑 (7)
연극 '그을린 사랑' 포스터 컷. 뒷 배경에 정원이 내다보이는 유리창을 가진 올림픽공원 K-아트홀의 무대는 사실상 연극 '그을린 사랑'을 위해 완벽해 보인다.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가 7살의 어린 나이에 떠나온 고국 레바논을 "산 속에 위치한 집 뒤 작은 정원과 태양이 내리쬐는 이상하리만치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객석에서 넓은 창 너머로 보이는 '장미 정원'의 모습과 배치되며 여러가지 생각을 낳는다. 

연극 ‘그을린 사랑’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지속된 레바논 내전(the Lebanese Civil War)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67년 30만 명의 팔레스타인을 단 6일 만에 쫓아낸 이스라엘의 ‘6일 전쟁(Six-Day War)’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때부터 20년 동안 레바논 남부에 자리 잡아 온 난민 캠프로 팔레스타인들이 몰려들도록 만들었다.

1970년 요르단 국왕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추방을 결정하고 베이루트에 PLO의 본부가 설립되자 더 많은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유입되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전체 인구의 15%를 차지하게 되자 레바논의 기독교 종파인 마론파와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1975년 4월 레바논의 극우 지도자 피에르 제마엘이 축성식에 참석한 교회 앞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총을 난사해 4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 극우파 민병들이 팔레스타인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공격해 27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0년 내전이 종식될 때까지 레바논 내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고,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국을 떠났다.

증오와 분노, 보복과 앙갚음으로 거듭되는 폭력, 죽음과 비극이 넘쳐나는 자기 파괴적 몰락, 고통으로 찢겨진 슬픔과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 갈등으로 얼룩진 레바논의 역사는 무아와드의 ‘그을린 사랑’을 통해 “보편성을 지닌 현대적 신화”로 확대된다.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무아와드는 고국 레바논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지만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겨냥한 “무한한 보편성”을 획득한다.

무아와드의 프랑스어 원작을 영어로 번역한 린다 가보리오(Linda Gaboriau)에 따르면, 무아와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리스 비극’이라 할 수 있으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영원성을 지닌 작품의 보편성”을 인식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는 극이 단순히 레바논에 대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배경을 넘어서는 전쟁의 피폐함에 대한 것”이기를 원했다.

그녀는 무아와드의 4부작 전체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전쟁, 이민, 추방으로 인해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완전히 뿌리가 뽑혀 근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연극 ‘그을린 사랑’은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유언장이 공증인 에르밀 르벨에 의해 쌍둥이 남매에게 전달되고,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오빠)에게 편지를 전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얼굴을 땅으로 향한 채 비석도 없이 묻어달라는 괴이한 장례절차와 편지 전달이라는 미션으로 인해 평생 제대로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과거를 탐색해야 할 필요가 생긴 쌍둥이 남매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연극 그을린 사랑_공연사진 (1)
연극 '그을린 사랑' 공연장면.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공증인 '에르밀 르벨'(남명렬)은 쌍둥이 남매 '잔느'(이세인)와 '시몽'(이원석)에게 유언장을 읽어주고 있다. 연극 '그을린 사랑'은 관객들이 쌍둥이 남매와 똑같이 유언장으로 인해 당혹감을 느낄 수 있도록 관객들을 쌍둥이와 같은 쪽에 위치하도록 배치함으로써 공증인 '르벨'이 관객들을 향해 유언장을 설명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다./사진=마크923 

어머니 나왈은 딸 잔느에게 72라는 숫자가 등에 새겨진 녹색 셔츠와 아버지에게 전달할 편지를, 그리고 아들 시몽에게는 붉은색 노트와 형에게 전달할 편지를 각각 남긴다.

관도 없이, 기도도 없이, “세상을 등진 모습 그대로” 물 한 양동이씩 무덤에 뿌린 후 흙으로 덮어줄 것을 요청하는 나왈의 유언장은 잔느를 침묵으로, 시몽을 엄청난 분노로 이끈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을 미치게 만든다며, 죽은 어머니를 향해 엄청난 욕을 쏟아내고 어머니 무덤에 “가래침이나 뱉겠다”고 소리 지르는 아들의 모습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내 “그 여자가 언제 날 위해 울어 준 적이 있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여자 가슴 속에 있는 건 심장이 아니라 벽돌이었어!”라고 외치는 시몽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어머니 나왈이 쌍둥이 남매에게 상당히 차가운 어머니였으며, 그로 인해 아이들이 많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제 관객들은 유언장에 언급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 침묵을 지키는 이에게 묘비명은 필요치 않다”거나 “유년 시절은 목에 꽂힌 칼과 같아 쉽게 빼낼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증에 빠져든다.

공증인 르벨이 죽은 자의 유언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며, 죽기 전까지 5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킨 사람의 유언이라면 더더욱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부탁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자 시몽은 그냥 화가 난 채 나가버린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잔느도 조용히 자리를 뜬다.

연극 ‘그을린 사랑’은 현재의 시점에서 유언을 따르기 위해 어머니의 과거를 파헤쳐야 하는 쌍둥이 남매와 과거의 시점에서 난민 캠프의 와합이라는 소년과 사랑에 빠져 임신한 14살 소녀 나왈이 유령처럼 겹쳐지면서 서사시의 여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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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을린 사랑' 공연장면. 나왈 마르완의 '과거'로의 회귀장면. 14세의 '나왈'(이주영)은 난민 캠프의 14세 소년 와합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하지만 나왈의 엄마 '지안'(송희정)은 나왈에게 아이를 낳아 고아원에 보낼 것을 종용한다. 무대 위의 테이블은 세워지는 위치에 따라 사무실의 책상, 창문, 무덤, 숲 속 나무 등 여러 의미를 담은 오브제로 변모한다. 원작에서 14세, 19세, 40세, 60세의 나왈을 연기하는 배우를 각각 따로 설정한 것과 다르게 2019년 한국 공연의 경우, 한 배우가 모든 나이대의 '나왈'을 연기한다./사진=마크923

두 사람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아기는 나왈의 엄마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불행이 되고, 엄마 지안은 딸에게 당장 입은 옷을 모두 벗어놓고 알몸으로 떠나든지 아니면 아이를 몰래 낳아 고아원으로 보내든지 선택을 하라고 종용한다. 잔뜩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굴복하지 말고 떠났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나왈에게 할머니 나지라가 말한다.

“가혹하고 상처받은 삶에는 분노만 남겨지지. 길모퉁이마다 증오의 표시가 있단다. ... 네게 무엇이 남을까? 불행에 맞서 싸우거나 파묻히게 되겠지.”

그 때 사람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와합이 창문을 두드리며 말한다.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 50년 뒤에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까? 내가 있는 곳에 네가 있을 거야. ... 내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함께 있을 거야. 함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으니까!”

나왈은 와합에게 약속한다.

“내가 네 대신 우리 아이에게 말해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사랑할거라고!”

무아와드는 잔느가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던 간병인을 만나고, 어머니의 침묵이 녹음되어 있는 카세트테이프에 귀를 기울이며, 중동지방의 정치범들이 수용되던 크파르 라야트 감옥까지 방문해 어머니의 발자취를 추적해야 할 이유를 대학에서 ‘그래프 이론(Graph Theory)’을 강의하는 잔느를 통해 설명한다.

다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한 사람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가시성 그래프(the visibility graph)’만으로 원래 다각형의 모양을 재구축할 수 없듯 자신이 모르고 있던 아버지와 오빠의 존재라는 다른 2개의 꼭짓점이 추가된 이상 어머니와 시몽, 자신으로 구성되었던 3면의 다각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명확한 문제에서 출발해 정확한 답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학에서 “난해하고 몰두할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문제의 증명”에 힘쓰며 풀 수 없을지도 모를 문제와 씨름하는 이론 수학의 어려움은 잔느가 현재 마주한 삶의 문제와 같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고독한 비밀을 탐구하는 일은 쓸데없어 보이지만 1+1=2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할 잔느의 필요는 총을 들고 어떤 여인과 함께 “크파르 라야트의 난민들”이라는 낙서가 적혀있는 불 타버린 버스를 배경으로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도록 만든다.

하지만 진실을 향해 깊이 파고들수록 잔느는 “왜 그런 추구를 계속하느냐”는 시몽의 비난 섞인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점점 더 “침묵 속에 잠겨 심오한 태도로 말하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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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을린 사랑' 공연장면. 공증인 '에르밀 르벨'(남명렬)은 와즈디 무아와드의 원작에서 셰익스피어의 '광대(fool)'와 같은 역할을 한다. 다소 수다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표현들을 사용하지만 말 속에 날카로운 진실들을 숨기고 있는 '르벨'은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관객들을 향해 말을 건넨다. 원래 공증인 사무실 밖에 서 있는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을 향해 건네는 말이지만 2019년 한국 공연의 경우, '르벨'은 관객들을 향해 쌍둥이 남매에게 하듯 대사를 한다./사진=마크923

무아와드가 ‘그을린 사랑‘을 통해 탐구하는 것은 개인의 영혼과 집단의식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 그리고 침묵이 품고 있는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떠나온 탓에 레바논을 “산 속에 위치한 집 뒤 작은 정원과 태양이 내리쬐는 이상하리만치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는 무아와드는 ‘글로브 앤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성장하면서 제일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어떤 질문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부모님의 태도였다고 말한다.

“침묵에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극을 썼다고 말하는 무아와드의 에피소드는 실제로 나왈의 동지이자 친구인 난민 여인 ‘사우다’를 통해 반영된다.

자신의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나왈은 임종을 맞은 할머니에게 “글을 읽고 쓰고 셈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 어머니에게서 딸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끝없이 대물림되는 ‘분노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미래를 세우겠다고 약속한다.

할머니의 묘비에 이름을 새기기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 온 나왈의 뒤를 따르던 사우다는 아들을 찾으러 고아원으로 가는 나왈을 도와주는 대신 글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한다.

사우다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침묵’이다. 왜 남부를 떠났는지, 왜 한밤중에 도망쳤는지, 왜 아버지가 불 타 버린 집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는지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며 “살아있으면 그걸로 된 거지. 모두 잊어버려!”라고 말하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는 사우다는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혀 ‘망각’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사랑’을 외친 나왈과 와합이 ‘기적’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자신의 뿌리와 역사를 내전을 겪은 이전 세대를 통해서가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의 역사가들의 책을 통해 배워야 했던 무아와드는 2010년 한 인터뷰에서 개인의 가치와 집단의 가치가 충돌하는 속에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 과연 위로와 안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피할 것이 아니라 “삶에 통합시키고 그 밖의 다른 것이 되도록 옮겨가야 함”을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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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을린 사랑' 공연장면. 난민들을 위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이어 온 40세의 '나왈 마르완'(이주영, 오른쪽). 지하에서 신문을 발행하는 '글을 쓰는 여인' 나왈과 '노래 부르는 여인' 사우다를 잡으려는 민병들의 수색은 거세지고, 더 이상 보복에서 앙갚음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고리'를 끊을 길이 보이지 않음을 깨닫자 '나왈'은 상대편의 수장 한 명만을 암살함으로써 모든 폭력의 고리를 끊고자 결심한다./사진=마크923

그는 기독교도이면서 이슬람 좌파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남부 레바논군(SLA)의 수장을 저격한 행위로 악명 높은 키암 교도소에 10년 동안 수감되었던 소하 베차라(Soha Bechara)의 실제 이야기를 나왈의 모델로 삼는다.

끔찍한 고문과 취조로 고통 받았을 뿐 아니라 10년 중 6년의 기간을 독방에 갇혀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다른 죄수의 소리를 들어야 했던 베차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하는 여인”에 관한 서사는 나왈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아들을 찾아 크파르 라야트에 도착한 나왈은 난민 무장세력이 모든 고아원 아이들을 난민 캠프로 데려갔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난민 캠프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나왈은 민병대가 휘발유를 뿌리고 기관총을 난사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불태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신은 난민이 아님을 밝혀 겨우 살아남았음을 울면서 토로하던 나왈은 사우다와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한다.

폐허가 된 고아원에 남아있던 의사의 말처럼 난민과 민병 사이에 되풀이되는 복수의 사슬은 “형제가 형제를 살해하고, 아버지가 그들의 아버지를 죽이는 전쟁”이고, “아들이 어머니를 강간하고, 한 가족을 돌로 때려죽이며, 불태우고 파괴하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살인과 고통의 연속이다.

나왈과 사우다의 신문 발행을 통해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노력은 미미하기만 하고, 어머니 나왈의 “침묵의 구렁” 한 가운데 빠져버린 잔느는 이제 “중심에서 다각형을 보기 위해” 밝혀지지 않은 진실 속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다.

어머니 나왈의 레지스탕스로서의 삶과 감옥에서의 고문, 강간으로 인해 고통으로 찢겨진 삶에 대한 잔느의 인식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고문 기술자였다는 끔찍한 사실의 충격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라는 꼭짓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시몽마저 중동으로 불러오고, 시몽은 형이라는 또 하나의 꼭짓점을 찾기 위해 난민 레지스탕스 지도자인 샴세딘을 만난다.

무아와드는 시몽에게 아마추어 복싱선수라는 직업을 부여해 “침묵을 깨기 위한 한 방을 날리도록” 만든다. 니하드 하르마니라고 불리던 형이 샴세딘에 의해 스나이퍼로 훈련되었다는 정보는 그가 “노래하는 여인”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며 또 하나의 끔찍한 퍼즐 조각을 완성한다.

총구를 통해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살하며 죽은 자들의 사진을 ‘예술’이라 여기던 미친 스나이퍼 ‘니하드’가 이스라엘 침공 당시 붙잡혀 재교육을 받고 고문 기술자 ‘아부 타렉’이 되었다는 사실은 1+1=2가 아니라 1+1=1이 될 수 있다는 증명되지 않은 가설 ‘콜라츠 추측(Collatz conjecture)’과 연결되며, 잔느와 시몽을 또 한 번 충격 속으로 몰아넣는다.

어머니의 ‘침묵’은 1997년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증인과 범죄자로 마주하게 된 자신과 아부 타렉이 사실상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때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침묵’은 반드시 아들을 찾으러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의식 때문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말을 지키기 위한 어미 늑대의 처절한 노력이고,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채 성고문 기술자로 20년의 세월을 증오로 일관한 데 대한 미안함의 제스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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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을린 사랑' 공연장면. 와합과 나왈의 사이에서 태어나 고아원에 버려진 아들 '니하드 하르마니'(백성광)는 남부에 위치한 난민 캠프로 끌려가 샴세딘에 의해 '스나이퍼'로 훈련을 받는다. 총구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살하는 '미친 스나이퍼'인 니하드는 죽은 자들의 사진을 찍으며 그것이 '예술'이라 말한다./사진=마크923

또한, 자신이 어머니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7번 감방의 72번 창녀”로 부르던 아들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 갇히게 될 침묵에 대한 연민이다.

“공포이자 고통, 분노”였던 존재가 “사랑이자 행복, 기쁨”이었어야 함을 깨달은 60세의 나왈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삶 속에서 느꼈을 감정을 ‘침묵’외에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왈은 마지막 편지에서 쌍둥이 남매에게 이제 목구멍에 박힌 칼을 뽑을 때가 되었음을 말한다.

목구멍에 꽂힌 칼을 뽑고 고통을 삼킨 후 잔혹한 사실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전진할 것을 요청하는 어머니 나왈의 편지는 감동스럽다.

그녀는 묻는다.

“너희들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너희들의 출생에서? 그렇다면 그건 공포란다. 너희 아버지의 출생에서?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란다.”

그녀는 계속해서 근원을 향해 올라가다보면 긴 역사의 출발은 살인과 강간이었음을 깨닫게 될지 모르지만 침묵을 깨뜨리고 진실에 다가선 쌍둥이 남매가 자신들의 출발을 “한 소녀가 할머니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향 마을로 되돌아가 비석에 이름을 새겼던 때”로 삼기를 바란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 글을 배우고 셈을 하며 생각하는 법을 배우던 ‘혁명’의 순간, 집단의 가치가 아닌 나 자신의 가치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던 시간... 나왈은 두 아이들이 그 지점을 출발로 삼기를 바란다. 

무아와드는 “극장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과 불안감을 통해 탐험을 할 수 있는 장소”라고 말한다.

복수가 독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망각과 외면이 해결책이 아님을 알면서도 상처가 너무 깊다는 이유로 보지도 않고 봉합하는 성급함,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이 두려워 자신들의 책임을 외면하고 침묵 속으로 침전하는 취약함...

무아와드는 연극이 그들을 위한 “침묵의 배출구”가 되기를 바란다. 코르뱅은 침묵도 하나의 “변화된 말”이며 “영혼의 언어”일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불행 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침묵은 사실상 진실로 할 말이 있음에도 입을 다무는 “가장 내밀한 말”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침묵은 언젠가 깨져야만 하며 진실을 내보여야 하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과 이해를 통해 앞으로, 미래를 향해 움직여야 한다.

삶이란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기에 나왈의 ‘침묵’은 침묵에 귀기울여주는 잔느와 시몽, 그 노력을 지지해주는 르벨의 힘에 의해 진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고통스럽고 끔찍하며 충격적인 진실은 쉽게 치유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앞으로 흐르고, 삶은 계속된다. 그렇기에 잔느와 시몽에게 더 나은 미래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8월 10일까지 올림픽공원 K-아트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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