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사유'를 갈구하는 또 하나의 '예술작품'...연극 '레드'
'소통'과 '사유'를 갈구하는 또 하나의 '예술작품'...연극 '레드'
  • 주하영
  • 승인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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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토니상 6개 부문 수상작, 미국 극작가 존 로건(John Logan)의 연극 '레드(Red)'
연극 '레드' 공연장면. '로스코' 역의 강신일 배우. 런던 초연 때 로스코 역을 맡았던 배우 '알프레드 몰리나(Alfred Molina)'에 따르면, '로스코'는 "매우 엄격했으며, 매우 지적이고,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무자비하며, 스스로에게도 무척 까다로웠던 속물적 속성"을 지닌 인물이다.
연극 '레드' 공연장면. '로스코' 역의 강신일 배우. 런던 초연 때 로스코 역을 맡았던 배우 '알프레드 몰리나(Alfred Molina)'에 따르면, '로스코'는 "매우 엄격했으며, 매우 지적이고,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무자비하며, 스스로에게도 무척 까다로웠던 속물적 속성"을 지닌 인물이다. /사진=신시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오래된 체육관처럼 보이는 스튜디오, 축음기 주변으로 정돈되지 않은 채 쌓여있는 레코드판들, 각기 다른 색깔의 물감이 담겨있는 양동이들, 테레빈유가 담겨있는 양철통, 계란 껍질과 붓이 나뒹구는 테이블, 구식 전화기와 휴대용 버너, 그리고 위스키가 담긴 술병들...

검붉은 색으로 바닥이 물든 작업실에는 여러 개의 그림을 동시에 올리거나 내릴 수 있도록 도르래가 설치된 거대한 그림들이 무대 뒤쪽으로 걸려있다.

작은 페인트 점들이 여기 저기 묻어있는 낡은 옷을 입은 화가는 무대 앞쪽으로 나와 관객들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유심히 바라본다. 그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다.

2010년 토니상 6개 부문 최다 수상에 빛나는 미국 극작가 존 로건의 연극 ‘레드‘의 무대는 희곡 대본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화가는 관객들 쪽으로 ‘그림’이 있다고 가정하고, 두꺼운 안경 너머로 그림을 관찰한다.

관객들은 화가가 고정된 시선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이 자신들임을 발견하고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어떤 ‘그림’인지 궁금해질 때쯤 조수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연극 '레드' 공연장면. '로스코' 역(앞쪽)의 강신일 배우, '켄' 역의 김도빈 배우.
연극 '레드' 공연장면. '로스코' 역(앞쪽)의 강신일 배우, '켄' 역의 김도빈 배우./사진=신시컴퍼니

첫날 면접이라도 보는 듯 잔뜩 긴장해 어색하게 말을 건네려던 청년을 막아서며 화가가 갑자기 묻는다.

“뭐가 보이나?”

막 대답하려는 청년을 막아서며 화가는 또 이렇게 외친다.

“가까이 다가서야 해! ... 더 가까이! 이런, 너무 가깝잖아! 거기! 거기에서 그림이 자신을 펼치도록 놔둬! 그림이 팔을 벌려 너를 감싸 안도록 내버려두란 말이다! 네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그림이 채울 수 있도록. 그래서 그림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 그림이 자신의 역할을 하도록 내버려둬! 하지만 함께 움직여야 해. 중간에서 만나라고!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 ... 자, 이제 뭐가 보이나?”

화가가 이토록 강렬하게 그림과 소통하는 법을 설명하는 동안 화가와 청년이 계속 응시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관객’이다.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며 답답하다는 듯 그림을 제대로 감상해보라고 외치는 화가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청년의 고정된 시선 앞에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해석되어야 할 ‘그림’이 되고, 이해되어야 할 ‘존재’가 되며,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야 할 ‘소통자’가 된다.

화가와 청년은 관객들을 바라보며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실 관객의 입장에선 자신에게 담긴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나름의 ‘빛’을 발하며 관람자의 시선과 하나가 되어야 할 ‘그림’은 ‘레드‘라는 제목의 연극이다.

연극 '레드' 공연장면. '로스코' 역(앞쪽)의 강신일 배우, '켄' 역의 김도빈 배우.
 연극 '레드' 공연장면. '로스코' 역(앞쪽)의 정보석 배우, '켄' 역의 박정복 배우./사진=신시컴퍼니

무대에서 청년을 향해 외치는 화가의 주문사항은 관객들이 연극 ‘레드‘를 감상하기 위해 행해야 할 태도이자 절차이기도 하다.

결국 화가를 연기하는 배우는, 아니 연극 ‘레드‘를 쓴 극작가는 자신이 펼쳐내고 있는 ‘예술‘에 몰입하고 함께 호흡하며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관객’을, ‘관람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는 ‘색면추상’의 대표자이자 “20세기 최고의 추상표현주의자”라 불리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일화를 담은 연극 ‘레드(Red)‘ 공연의 막이 내렸다.

한국에서 2011년 초연된 후 다섯 번째 재공연 무대에 오를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연극 ‘레드‘는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를 둘러싼 유명한 일화를 바탕으로 “붓질 하나 하나에 비극이 담겨있다”고 말했던 로스코의 예술관과 삶 뿐 아니라 관객들 자신의 삶과 새로운 흐름 앞에 선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연극 ‘레드‘의 극작가인 존 로건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에비에이터‘, 조니 뎁 주연의 영화 ‘스위니토드‘, 스타트랙 ‘네메시스‘와 제임스 본드 ‘007 스카이폴‘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 더 유명하다.

노스웨스턴대학 시절부터 극작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던 로건은 1985년 “세기의 범죄”로 알려진 ‘레오폴드와 롭의 시카고 납치 살인사건’의 실제 재판을 다룬 연극 ‘네버 더 시너(Never the Sinner)‘로 극작가로 데뷔했다.

‘레드‘는 그의 4번째 연극작품으로 2007년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 ‘스위니토드‘의 영화 작업을 위해 런던에 방문했을 당시 우연히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 들렀다가 로스코의 9점의 그림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1년여에 걸친 자료조사와 연구 끝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연극 '레드' 공연장면. 원하는 컬러를 위해 색을 조합하고 있는 '로스코'(강신일).
연극 '레드' 공연장면. 원하는 컬러를 위해 색을 조합하고 있는 '로스코'(강신일).

로건은 ‘타임아웃 시카고‘와의 인터뷰에서 시그램 벽화들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벽화들이 있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고, 심장이 멈추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이즈와 강렬함, 그림들이 담고 있는 진지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강타하는 것만 같았죠.”

이어 그는 자신이 ‘레드‘를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덧붙인다.

“로스코는 당대의 유명 건축가 필립 존슨으로부터 혁신적인 건물 ‘시그램 빌딩’의 최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즈’의 벽을 채울 작품 시리즈를 의뢰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레스토랑을 방문한 후 그 곳을 찾는 부유한 고객층들에게 환멸을 느껴 돈을 돌려주고 그림들을 보관하기로 결정했죠. 명확하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극작가들이 찾는 것은 바로 그러한 ‘변화의 순간’에 있는 인물들입니다.”

로스코에 관한 책을 쓴 아니 코엔 솔랄에 따르면, 시그램사가 제안한 포시즌즈 레스토랑 개별 룸에 걸 연작 그림의 대가는 당시 화가에게 주어진 전례가 없던 천문학적 금액인 3만5천 달러였고, 선불금만 7천 달러에 달했다.

그녀는 “시그램 프로젝트가 로스코에게 분명 아주 중요한 시기로 진입하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1958년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할 당시 “통일되고 조화로운 그림으로 감상자에게 오랜 여운을 남길 공공의 장소를 위한 그림”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8개월 후 “뉴욕의 가장 부유한 작자들이 와서 밥을 먹고 으스댈 공간을 위한 작업 때문에 씨름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연극 '레드' 공연장면. 손목에 붉은 물감을 칠한 채 술에 취해 잠이 든 '로스코'(정보석). '켄'은 로스코가 자살한 줄 알고 너무 놀라 허둥대지만 곧 술에 취해 잠든 것임이 밝혀진다. 실제 로스코가 런던에 위치한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 자신의 '시그램 벽화들'이 도착한 날 '자살'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극작가 로건이 이 장면을 삽입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연극 '레드' 공연장면. 손목에 붉은 물감을 칠한 채 술에 취해 잠이 든 '로스코'(정보석). '켄'은 로스코가 자살한 줄 알고 너무 놀라 허둥대지만 곧 술에 취해 잠든 것임이 밝혀진다. 실제 로스코가 런던에 위치한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 자신의 '시그램 벽화들'이 도착한 날 '자살'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극작가 로건이 이 장면을 삽입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로스코는 시그램사와의 계약을 돌연 파기하기 전 가족과 함께 떠난 유럽여행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저널리스트 존 피셔에게 자신이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모든 부유한 사람들의 식욕을 망쳐놓을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악의적인 의도”를 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였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그 어떤 그림도 공적인 장소에 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문과 창문이 벽돌로 꽉 막힌 방에서 감상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계속해서 벽을 들이박는 것밖에는 없게끔 만들고 싶다”던 로스코가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에 사실상 그림은 장식의 역할로 기능할 수밖에 없는 고급 레스토랑의 벽화를 작업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관람자의 모든 정신이 그림에 사로잡혀 먹는 것도 잊은 채 알 수 없는 세계로 빨려 들어가 ‘비극적 삶’에 대한 사유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랐던 화가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술과의 소통’에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수용자의 열린 태도와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마음, 담겨진 의미를 해석하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연극 '레드' 공연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1
연극 '레드'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로건은 연극 ‘레드‘ 속에 시그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화가인 로스코 자신이 번뇌하고 갈등했을 모든 내면적인 생각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의 조수이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 ‘켄(Ken)’을 창조해낸다.

로건에 따르면, 켄은 변화하는 세상과 쏟아져 나오는 젊은 예술가들로 인해 언젠가는 자신도 새로운 흐름에 밀려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로스코의 “내적 불안감”을 형상화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켄은 로스코의 다음 세대인 ‘팝 아트’의 대표격으로 창조된 인물이며,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과 같은 예술가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로건은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해 전임자를 살해하는 방식으로만 숲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신화를 다룬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의 서사에 켄과 로스코의 관계를 배치시킨다. 로스코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의해 ‘전복’되고 ‘소멸’되는 흐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큐비즘을 짓밟아 숨통을 끊어버렸지! 이제는 아무도 입체파 그림을 그리지 않아. ...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하는 법이야. 존경해야 하지. 하지만 살해해야 해!”

연극 '레드'의 하이라이트 장면. 로스코와 켄이 함께 캔버스에 '밑칠'을 하는 장면. 사실상 이 장면은 극 전개를 위한 일종의 '전환' 장면으로 '액션'이자 '안무'로 고안되었다고 한다. 로건은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며 캔버스를 채울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 동등해진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장면은 "로스코가 켄을 보기 시작하고,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기 위해 도움을 받으려는 후 세대를 삶의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두 배우는 각기 왼쪽과 오른쪽에서 시작해 결국 중앙에서 만나 캔버스를 완성하고 함께 바라보게 된다.
연극 '레드'의 하이라이트 장면. 로스코와 켄이 함께 캔버스에 '밑칠'을 하는 장면. 사실상 이 장면은 극 전개를 위한 일종의 '전환' 장면으로 '액션'이자 '안무'로 고안되었다고 한다. 로건은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며 캔버스를 채울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 동등해진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장면은 "로스코가 켄을 보기 시작하고,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기 위해 도움을 받으려는 후 세대를 삶의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두 배우는 각기 왼쪽과 오른쪽에서 시작해 결국 중앙에서 만나 캔버스를 완성하고 함께 바라보게 된다./사진=신시컴퍼니 

그것을 즐겨야 하냐는 켄의 질문에 로스코는 또 다시 답한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저 담대하게 해내는 거지. 미술에서 용기란 텅 빈 캔버스와 맞서는 게 아냐. 마네와 벨라스케스에 맞서는 거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에 있던 것을 지나 지금의 것으로 나아가고, 앞으로 있을 것을 미약하나마 넌지시 알려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야!”

흥미로운 점은 “오늘에 대해 잘 아는 것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최선의 준비책”이라 주장하며, 로스코 자신 역시 전통적 화가들과 반대되는 정체성을 추구하고 ‘다양성’과 ‘새로움’을 외쳤던 화가임에도 켄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세대가 호응하고 펼쳐내는 새로운 예술에 대해서는 매우 고집스럽고 완고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로스코가 쏟아내는 말 가운데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틀렸어!”나 “아니야!”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던 앙리 마티스의 “놀라운 레드의 심연”과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을 만큼 불안 속에 빠져있다.

그는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릴” 두려움에 떨며 “덧없는 것”을 바라고, 시간을 멈춰보려 안간힘을 쓰며, “블랙을 레드로 만들겠다”고 발버둥치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그 진실을 켄이 지적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한다.

이 때문에 감상자의 “공감”에 의해서만 숨을 쉴 수 있고, 관람자에게 불안과 슬픔, 비극에 대한 사유를 불러내도록 창조된 그림들이 ‘예술’을 ‘장식’으로 전락시키는 공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포시즌즈 레스토랑에 있도록 만드는 일에 동의한 로스코의 결정이 ‘자기기만적 행위’임을 켄이 지적하는 순간, 두 사람은 가장 맹렬한 싸움에 돌입하게 된다.

연극 '레드' 공연장면. '포시즌즈 레스토랑'을 방문 후 '시그램 프로젝트'를 돌연 취소하고 그림들을 자신이 보관하기로 결정한 '로스코'(정보석)는 '켄'(박정복)에게 세상에 나가 자신만의 '동료'들을 찾고 '새로운 예술'을 추구할 것을 조언한다.
연극 '레드' 공연장면. '포시즌즈 레스토랑'을 방문 후 '시그램 프로젝트'를 돌연 취소하고 그림들을 자신이 보관하기로 결정한 '로스코'(정보석)는 '켄'(박정복)에게 세상에 나가 자신만의 '동료'들을 찾고 '새로운 예술'을 추구할 것을 조언한다./사진=신시컴퍼니 

켄은 말한다.

“위선을 인정하세요! ... 예술의 상업주의를 비난하지만 돈을 받았잖아요. 그림을 위해 명상과 경외로 가득한 예배당을 만드는 거라고 자신을 속일 수 있겠죠. 하지만 현실은 돈 많은 갑부들을 위한 또 하나의 장식품을 만드는 것뿐이라고요!”

켄은 자신이 과소평가되었다고 느끼는 로스코의 불안과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픈 허영이 시그램 벽화작업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외친다.

“모든 게 그렇게 진중하고 중요하기만 할 수는 없어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슴에 사무치고 영혼을 들추는 그림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구요! 정물화, 풍경화, 스프 캔이나 만화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 선생님한테는 그 어떤 것도 충분하지가 않은 거죠! ... 선생님 그림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요? 선생님 그림을 가지려면 도대체 얼마나 고귀해야 하나요?”

그는 더 이상 공감하면서 그림을 봐 줄 수 있는 관람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울과 비관이 로스코로 하여금 희망을 잃게 만들었고, 그래서 정말로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던 로스코와 켄의 관계는 5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극본 안에서 마치 난해한 그림을 이해할 수 없던 관람자가 점점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고, 때로 부정하고 맞서며, 극복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품듯 발전하고 대립하며, 투쟁하고 수용한다.

“아버지도 아니고, 랍비도 아니며, 정신과 의사도, 친구도, 선생도 아닌, 고용주일 뿐”이라고 강조하던 로스코는 어느새 자신을 도발하는 아들과 갈등하는 아버지이자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포효하는 구세대로 자리하게 된다.

연극 '레드'에서 '로스코' 역을 맡은 강신일 배우/사진=신시컴퍼니 

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어 보이던 로스코와 켄의 관계는 반복되는 말싸움과 감정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변화로 나아간다.

로건은 로스코와 켄의 관계는 자신의 아버지와의 경험에서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연극 ‘레드‘는 “무게감 있는 대뇌작용을 요구하는 지적인 극”이지만 동시에 “가족극”임을 강조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바닥에 놓여있는 감정은 ‘애정’이라는 점에서, 서로를 공격하거나 상처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부자관계’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전 세대를 넘어서야 하는 켄과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로스코의 갈등은 사실상 로스코가 주장해 온 “맹렬한 감정과 이성 사이의 조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완벽한 균형”을 추구하면서도 계속되는 ‘불균형’에 시달리다 소멸되지 않기 위해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일종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과의 완벽한 ‘교감의 장소’를 꿈꾸는 로스코는 실제 인간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서툴기만 하다. 그는 7살 때 부모가 살해당한 장면을 목격한 켄이 느꼈을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며, 그의 결핍 또한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자 애쓴다. 그는 유약을 바르듯 몇 겹씩 덧칠을 하는 노력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시간의 흐름 속에 남겨진 자취들로 인해 ‘광채’를 간직하게 되는 ‘그림’은 창조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숙성시키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소통’은 일방적인 요구와 억압일 수 없다. ‘관계’가 생기면 상대가 요구하는 것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하며, 그 느낌을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끊임없이 두뇌를 움직여야만 한다.

사람과 사건보다는 사상과 생각에 관심을 보이던 로스코는 켄과의 ‘관계 맺음’과 ‘갈등을 통한 사유’ 속에서 “말라붙은 피 색깔”로 빛을 발하는 붉은 캔버스를 바라보며 누군가는 ‘비극’을 떠올리지만 다른 누군가는 ‘열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는 ‘블랙’이 죽음을 의미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화이트’가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는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연극 '레드' 공연의 마지막 장면. '레드' 앞에 마주선 '로스코'. 어두운 조명 속 그림은 '광채'를 발한다.
연극 '레드' 공연의 마지막 장면. '레드' 앞에 마주선 '로스코'. 어두운 조명 속 그림은 '광채'를 발한다./사진=신시컴퍼니 

그는 깨닫는다. ‘소통’에 있어 필요한 것은 관람자의 안목이나 관람자를 압도할 만큼 위협적인 예술의 위대함이 아니라 “변화하고 움직이며 숨을 쉬는 그림”이 관람자들의 삶에 닿아 각자의 감성과 공감 속에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연극 ‘레드‘ 속 로스코의 대사들 중 오직 절반만 실제 사실에 근거했을 뿐 나머지 절반은 모두 자신의 창작임을 밝히는 로건은 처음부터 이 이야기는 ‘연극’으로만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예술이 관람자의 ‘심장’을 멎게 하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로스코의 생각이 “90분의 시간을 전력질주”하며 등장인물 사이의 “직접적인 교전”을 만들어내고 관객들의 ‘생각’을 파고들어야 하는 ‘연극’이라는 예술장르의 목표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로스코가 자신의 그림들을 위해 ‘성스러운 곳’을 원했듯 자신의 작품이 ‘극장’이라는 ‘성스러운 곳’에서 펼쳐지길 바랐다는 로건은 이렇게 덧붙인다.

“극장은 포용하고, 환영하며, 연민으로 격려하고, 친절로 감싸 안는 그런 곳이다. 또한, 이곳은 다른 어떤 곳보다 ‘생각’이 중요한 곳이다.”

연극 ‘레드‘는 분명 극작가 존 로건이 마크 로스코라는 위대한 거장에게 보내는 ‘헌사’이며, 관람자들로부터 ‘공감’되기를, ‘소통’되기를, 사유라는 확장을 통해 ‘변화’로 나아갈 수 있기를 고대하는 또 하나의 예술작품, 즉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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