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삶, 또 다시 두 발을 내딛는 인간...연극 '오이디푸스'
계속되는 삶, 또 다시 두 발을 내딛는 인간...연극 '오이디푸스'
  • 주하영
  • 승인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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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소포클레스 원작 '오이디푸스', 서재형 연출 X 한아름 각색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반인반수 괴물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황정민)는 오랜 가뭄으로 인해 비탄에 잠긴 백성들을 걱정한다.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반인반수 괴물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황정민)는 오랜 가뭄으로 인해 비탄에 잠긴 백성들을 걱정한다./사진=샘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것들에는 고전만의 ‘힘’이 있다.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히고 평가되며 재생산되어 새롭게 창조되어 온 고전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시대를 막론하고 각기 다른 세대를 살다 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했다는 점에서, 인종과 국가, 종교, 계급과 같은 이데올로기들이 파고들 수 없을 만큼 인간의 ‘근본’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그 자체로 ‘진리’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고전이 다루는 인간의 모습과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시간을 초월한다. 삶의 진실을 함께 ‘공감’하고 ‘연민’함으로써 스스로 ‘수용’하도록 만드는 예술 ‘연극’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라는 고전이 존재한다.

모든 극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비극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볼 수 없는 자손들을 세상에 내놓을 운명”이라는 신탁 속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불행과 슬픔, 고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 앞에 놓인 그의 삶이 2500년에 달하는 오랜 세월을 통해 관객들에게 던져온 질문은 하나이다.

신에 의해 예정된 ‘운명’ 앞에 인간이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인간의 선택, 의지, 노력, 투쟁과 같은 것들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럼에도 인간이 ‘선한 선택’을 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연극 '오이디푸스' 서울 예술의 전당 포스트컷./사진=샘컴퍼니

29일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 대극장에서는 황정민 주연, 서재형 연출, 한아름 각색의 연극 ‘오이디푸스‘의 공연이 펼쳐졌다.

2018년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차드 3세‘로 흥행을 거두며 화제를 모았던 샘컴퍼니는 ‘네 번째 연극 시리즈’ 작품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선보였다. 지난 1월 29일부터 2월 2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포문을 열었던 연극 ‘오이디푸스‘는 현재 투어 공연 중이다.

연출을 맡은 서재형은 제작발표회 인터뷰에서 오이디푸스의 ‘비참한 운명’보다는 “삶의 동력”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면서 “인간이 의지를 갖는 순간”과 그 과정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밝혔다.

그는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두 눈을 찌르는 장면의 “감성적 인상”을 강조하고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걸어 나가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일까? 서재형 연출, 한아름 각색의 ‘오이디푸스‘는 기본적으로 소포클레스의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만 첨가된 대사와 해석을 통해 새로운 ‘다른 옷’을 입는다.

서재형의 연극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왕이 오랜 가뭄으로 신음하고 있는 테베를 위해 기도하던 중 잠깐 잠이 들어 “잔혹한 꿈”을 꾸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너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와 같은 질문에 답하던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외친다.

“결정과 선택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내 발이 어디론가 나를 인도하겠지. 가자, 이 길로!”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코러스 장(박은석)/사진=샘컴퍼니

작품은 처음부터 인간이 내린 결정과 선택이 운명을 이끌고 있음을 강조한다. 코러스 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피할 수 없는 신들의 길을 걷는 오이디푸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떠났다. 먼지가 입에 가득 차고 가시가 발에 박혀도 그는 걷고 또 걷는다. 우리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이 때 운명이 달려온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지?’”

코러스 장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에 관한 끔찍한 ‘신탁’에 대해 알게 되고, 이를 피해 먼 곳으로 ‘길을 떠나는 선택’을 했음을 드러낸다.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의 아들로 살아가고 있던 오이디푸스는 어두운 신탁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발이 이끄는 대로 길을 떠났고, 우연히 ‘삼거리’에 도달했으며, 인간의 얼굴과 짐승의 몸을 한 채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의 정답을 맞혀 테베의 왕이 되었다.

잠시 악몽을 꾸었을 뿐 테베의 시민들이 겪는 ‘고통’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밖에 없음에 좌절한다. 백성들은 ‘탄원’을 의미하는 ‘마른 나뭇가지’를 든 채 나타나 “인간들 중 으뜸가는 왕”이자 “스핑크스를 물리친 가장 지혜로운 자”인 오이디푸스에게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을 외친다.

흥미로운 점은 왕으로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강조하며 지혜로운 자로서 크레온을 신전으로 보내는 조치를 취한 자신에게 ‘자부심’을 드러내는 소포클레스의 원작과는 다르게 서재형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신이 아님’을 강조하며 왕이라는 자리가 주는 ‘부담’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이디푸스는 비탄에 가득 찬 가련한 백성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구원’을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말한다.

“내 목숨보다 소중한 백성, 잠자는 나를 깨우는 그들의 탄원, 수많은 생각이 밀려드는 나, 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다!”

각색을 맡은 한아름 작가는 이오카스테 왕비에게도 원작보다 많은 대사와 역할을 부여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자신의 미약함에 슬퍼하는 오이디푸스에게 이오카스테가 말한다.

“정치는 예술이 아니에요. 결코 아름다울 수도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도 없지요!”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새들을 이끄는 눈 먼 예언자 테레시아스를 모욕하는 오이디푸스(황정민)와 끝내 '운명의 화살'을 당기려는 오이디푸스를 향해 "오늘이 가기 전 네 번 가슴을 치게 될 것"이라 예언하는 테레시아스(정은혜).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새들을 이끄는 눈 먼 예언자 테레시아스를 모욕하는 오이디푸스(황정민)와 끝내 '운명의 화살'을 당기려는 오이디푸스를 향해 "오늘이 가기 전 네 번 가슴을 치게 될 것"이라 예언하는 테레시아스(정은혜)./사진=샘컴퍼니

한아름 작가의 ‘오이디푸스‘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며 연민하는 훌륭한 ‘지도자’로서 오이디푸스를 설정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에게 크레온이 들고 온 모호한 ‘신의 메시지’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오이디푸스는 가능한 빨리 테베의 선왕인 라이오스 왕의 살인자를 찾아내 추방하거나 처형함으로써 “신께 버려진 테베의 백성”을 구원하고 모두를 만족시켜야 할 의무와 압박에 시달린다.

스핑크스라는 반인반수의 괴물과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도적떼에게 봉변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억울함을 달래지 못한 라이오스 왕에 대한 ‘속죄’의 필요는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눈 먼 예언자 ‘테레시아스’를 찾아가도록 만든다.

원작과 다르게 크레온의 조언으로 테레시아스를 찾아가는 오이디푸스를 이오카스테가 만류한다. 그녀는 “신의 비밀로 사람을 현혹하는 자”인 테레시아스에게 남편 오이디푸스를 보내 또 다른 비극을 낳을 위험을 감수하는 동생 크레온을 원망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고통 받는 테베를 위해, 버려진 백성을 위해” 자신이 움직여야 함을 강조한다.

신이 아닌 인간,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인간”의 선택은 때로 자신을 향해 ‘불행의 화살’을 날리기도 한다. 지혜를 총동원해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전체를 볼 수 없는 인간에게는 늘 ‘한계’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예언자 테레시아스는 탄식한다.

“지혜로운 자의 지혜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지혜롭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늙고 눈 먼 예언자 테레시아스의 의미심장한 말에 분노한 오이디푸스(황정민). 진실을 찾는 일을 멈추기를 권하는 테레시아스에게 분노한 오이디푸스는 눈 먼 예언자를 모독하고, 테레시아스는 결국 진실을 말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음모'라 소리치며 불을 지를 것을 명령한다./사진=샘컴퍼니

사실 서재형의 연극 ‘오이디푸스‘의 경우, 그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선의’이다.

자신의 고통보다 다른 이의 고통을 더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지 못한 죄의식에 속죄하려는 마음, 자신에게 내려진 끔찍한 운명을 피해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먼 길을 떠난 자기희생의 마음, 그 마음은 오이디푸스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의 잔혹함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테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성품이 운명의 화살을 더욱 재촉했음을 언급한다.

그녀는 말한다.

“거꾸로 날지 않는 화살은 절대 반대로 날아와 쏜 자의 심장을 겨누지 않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때로 칼과 같아 무기를 든 자의 성품에 따라 남을 향하기도 하고 자신을 향하기도 하지요. 어디로 향할지 모를 운명, 하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은 테레시아스는 왕이 더 이상 진실을 파헤치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무기를 든 오이디푸스라는 자의 성품은 결국 자신을 향한다.

그는 자신을 기만하며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 테레시아스를 참지 못한다. 스핑크스보다 더 큰 ‘괴물’을 품은 테베를 언급하며 살인자는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라 말하는 눈 먼 예언자의 말은 그로 하여금 분노로 폭발토록 만든다.

“사악한 혀”를 뽑아버리겠다는 오이디푸스는 그녀가 크레온과 협잡해 자신의 왕권을 노리고 있음을 의심하며 불을 지를 것을 명령한다.

테레시아스가 외친다.

“눈이 있어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가련한 분!”

그리스 문학자 말콤 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서문에서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지식을 갈망한다”는 말이야 말로 인간에 대한 기본 이해를 설명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갈망에 충실하며, 비록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는 일이 그토록 피해서 도망쳐 온 끔찍한 ‘신탁’을 실현하는 일이 될지라도 자신의 두 눈과 귀로 그것을 확인해야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 ‘인간’임을 강조한다.

크레온의 음모와 배신을 확신하며 처형을 명령하는 오이디푸스를 막아 선 이오카스테에게서 선왕이 ‘삼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갑자기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삼거리는 그가 테베로 오기 직전 마차를 타고 가던 노인 일행과 만나 싸움을 벌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아름 작가의 오이디푸스는 ‘불같은 성미’나 ‘자만심’과 같은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신탁에 의해 규정된 ‘괴물과 같은 자신’, “더러운 놈”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한 인간의 투쟁이 잠시 좌절되던 순간, 즉 ‘의지’가 약해지던 순간에 비극의 원인을 설정한다.

길잡이 하나와 마부 한 명, 세 명의 시종과 함께 델포이 신전으로 달려가고 있던 라이오스 왕은 친부모라 믿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떠나온 길에 지쳐 방황하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오이디푸스와 마주친다.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오이디푸스 왕에게 코린토스의 왕 폴리버스가 사망하였음을 알리러 온 코린토스의 사자(남명렬). 그는 자신이 오이디푸스 두 발에 묶여 있던 줄을 풀어준 코린토스의 양치기였으며,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 오이디푸스를 양자로 준 사람임을 밝힌다.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오이디푸스 왕에게 코린토스의 왕 폴리버스가 사망하였음을 알리러 온 코린토스의 사자(남명렬). 그는 자신이 오이디푸스 두 발에 묶여 있던 줄을 풀어준 코린토스의 양치기였으며,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 오이디푸스를 양자로 준 사람임을 밝힌다./사진=샘컴퍼니

마차라도 얻어 타기 위해 친절을 기대하며 두 팔을 벌린 오이디푸스에게 라이오스 왕이 던진 “이 놈! 썩 비키지 못할까?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한 놈! 이 짐승보다 더러운 놈!”이란 말은 오이디푸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태어날 때부터 온 몸이 더럽혀진 놈”,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하게 될 ‘더러운 놈’이라는 꼬리표는 그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스치며 그의 내면에 억눌러 놓았던 모든 분노를 쏟아내도록 만든다.

“아니야! 난 더러운 놈이 아니에요! 아니야!”라는 그의 외침은 관객들의 가슴에 꽂힌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더러움’으로 규정된 생명체, 그로 인해 부모로부터 죽도록 숲에 방치된 아기, 자신이 속한 세상이 어디인지 모른 채 두 발이 부르트도록 끝없이 걸어야 할 뿐, 누구도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곳에서 그가 느끼는 절망과 분노, 억울함과 비통함은 관객들이 그를 연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자신이 살인자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오이디푸스를 향해 이오카스테는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람들이 모이는 삼거리에서 그가 라이오스 왕과 마주칠 확률은 매우 적으며, 자신이 불행한 신탁을 받은 아이를 죽였고, 오이디푸스는 폴리보스 왕의 외아들이기에 예언은 모두 틀렸음을 강조한다.

그녀는 말한다.

“중요한 것과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구별하는 혜안을 가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의 굳은 의지만이 현명한 지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상 이오카스테이다. 그녀는 자신이 두 발을 묶어 늑대의 밥이 되도록 키타이론 산에 버린 아이가 두 양치기의 ‘선의’에 의해 코린토스 왕에게 양자로 보내졌다는 사실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다.

그 때 코린토스에서 폴리보스 왕의 승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이방인이 찾아온다.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오이디푸스의 두 발을 묶고 있던 줄을 풀어 준 코린토스의 양치기였음을 밝히는 그는 폴리보스 왕이 친아버지가 아니며, 자신에게 아이를 건네주며 먼 곳으로 가서 돌아오지 말라고 했던 사람은 라이오스 왕의 가신이었다고 말한다.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다름 아닌 자신이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오이디푸스(황정민)를 보듬으며 진정시키는 이오카스테(배혜선).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다름 아닌 자신이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오이디푸스(황정민)를 보듬으며 진정시키는 이오카스테(배혜선)./사진=샘컴퍼니

이오카스테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다. 그녀는 끝내 친부모를 찾겠다는 오이디푸스를 만류하며 절규한다.

“제발, 당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거든 들춰내는 일을 멈추세요. 저는 이 상황을 더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멈출 수가 없다. 그는 확인해야만 한다. 자신이 그토록 피하기 위해 몸부림쳐 온 신탁이 현재 자신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님을, 설사 그것이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온다 할지라도 말이다.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고 그곳이 어디이든 과녁에 꽂혀야만 움직임을 멈출 수 있다.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라고 소리치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이오카스테를 향해 ‘비천한 출신’을 남편으로 맞이한 것이 창피해 그러는 것이라 여기는 오이디푸스는 여전히 ‘더러운 놈’이라는 신탁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더러운 놈’이 아님을, 자신이 ‘선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는 ‘진실’을 위해 라이오스 왕의 가신이었던 양치기를 불러들인다. 하지만 진실은 혹독할 뿐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모든 노력을, 그의 간절한 시도들을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는 최초의 저주이니!”

두 발이 묶여 부어 있던 아기에게 지어준 ‘오이디푸스’, ‘부은 발’이란 뜻의 이름은 그에게 ‘저주’로 작용한다.

진실의 가혹함을 받아들이고 살 수 없던 이오카스테는 머리를 쥐어뜯다 목을 매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자신의 두 눈을 브로치로 찌른다.

무대는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 천들로 물결치며 폭포수처럼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코러스 장이 외친다.

“피의 폭포가, 검은 피들이 왕비의 시체에 켜켜이 쌓입니다!”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두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황정민). 두 눈에 흐르는 붉은 피는 무대 천장에서부터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는 붉은 천으로 형상화된다.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두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황정민). 두 눈에 흐르는 붉은 피는 무대 천장에서부터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는 붉은 천으로 형상화된다./사진=샘컴퍼니

두 발이 흙먼지로 덮이고 부어터지도록 떠돌아야 할 ‘저주’에 묶여 있는 오이디푸스, 그의 운명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누군가의 ‘선의’가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 ‘행운’으로 다가오지 않는 삶, 패륜과 근친상간을 범하는 끔찍한 운명 앞에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발을 딛는 맹인의 삶,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억울함이 사무쳐도 ‘책임’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삶, 무엇보다 그 모든 ‘불행’에도 불구하고 끝날 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삶,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겪게 되는 크고 작은 불행이 넘쳐나는 안타까운 삶...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두 눈이 멀고 지팡이를 짚은 자신을 향해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니, 괜찮소. 내 비록 보이지는 않으나 갈 길은 분명하니. 아! 옛날의 당신은 이런 선의로 나를 살려준 것이로군. 고맙소!”

오이디푸스는 살인자의 추방만이 테베를 정화시킬 수 있기에 가뭄을 종식시키고 비를 불러오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난다.

연극 '오이디푸스' 공연 장면.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황정민)는 홀로 테베를 떠나 지팡이를 짚은 채 먼 길을 떠난다./사진=샘컴퍼니

코러스 장이 관객들을 향해 외친다.

“보라. 오이디푸스의 뒷모습을 본 자라면 누구든 명심하라. 삶의 끝에 이르기 전에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사람으로 태어난 자신을 행복하다 믿지 말라.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통’으로 점철된 삶,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삶, 그래서 함부로 속단하거나 자만할 수 없는 삶, 오이디푸스의 삶의 교훈은 모든 이의 가슴에 울려 퍼진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을지 모른다. 과정이 누군가의 힘에 의해 이끌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베를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의 저주를 스스로에게 행하며 ‘책임’의 길을 선택한 것은 신이 아니라 오이디푸스라는 한 인간이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놓을 수 없는 존재, 알면 다칠 수 있음을 예감하면서도 ‘진실’을 파고들 수밖에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 아닐까? 아무리 비통해도 삶은 계속되고 인간은 또 다시 두 발을 내딛어야만 한다. 그것이 삶이기에! 31일까지 GS칼텍스 예울마루 대극장, 4월 5일~6일까지 울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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