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슬픔을 ‘몸’으로 표현한 ‘아름다움’...‘네이처 오브 포겟팅‘
망각의 슬픔을 ‘몸’으로 표현한 ‘아름다움’...‘네이처 오브 포겟팅‘
  • 주하영
  • 승인 201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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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연극열전 7, 피지컬 씨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Nature of Forgetting)‘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장면. '톰'의 학창시절 여자친구 '이자벨라'와 가장 친한 친구 '마이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 무대 위에 고정되어 있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질주하는 장면은 마임과 연기, 몸의 움직임으로만 표현된다. /사진=연극열전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많은 사람을 공감시키는 공연에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 주제가 놀라운 것 일수도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것 일수도 있으며 에너지가 강렬하거나 완벽히 다른 차원의 세상을 구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주 오래전 호모 사피엔스가 동굴 속 벽화를 그리고 춤으로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때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표현하려 애써왔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왔다. 말이나 문자가 없이도 인간이 자신을 이해시키고 놀라운 무언가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머릿속의 장면이나 사적인 생각, 비밀스러운 기억과 같은 것들을 대사 없이 몸으로만 표현하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 표현이야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다지만 한 사람의 ‘과거’가 무너지고 해체되며 모든 ‘기억’이 엉키고 사라지는 ‘치매’ 환자의 은밀한 머릿속을 단 4명의 퍼포머와 2명의 라이브 밴드만으로 관객들에게 완벽하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2인조 밴드 연주 장면. /사진=연극열전

최근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는 ‘연극열전 7’의 마지막 작품으로 선정된 2017년 에든버러 페스티벌 최고의 화제작 ‘네이처 오브 포겟팅(Nature of Forgetting)‘의 막이 내렸다.

2017년 런던 국제 마임 페스티벌에서 ‘전석매진’이란 신화를 기록하며, ‘프린지 리뷰‘로부터 “기억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강렬하고, 폭발적이며, 즐거운 작품”이란 평을 받은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대사가 아니라 주로 몸의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퍼포먼스 장르인 ‘피지컬 씨어터(Physical Theatre)’로 구현된 작품이다.

주로 마임과 몸의 움직임, 제스처, 모던 댄스를 통해 ‘이야기’를 구현하는 ‘피지컬 씨어터’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대사 없이 혹은 아주 최소한의 대사만을 사용한 채 거의 ‘몸’으로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필요한 음악과 조명, 음향효과, 오브제들을 활용한다.

‘몸의 언어’보다 더 리얼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피지컬 씨어터’는 라이브로 구현되는 “살아있는 인간적인 경험”을 지향한다.

신체마임(corporeal mime)의 거장 ‘에티엔 드쿠르(Etienne Decroux)’의 제자이자 브라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다니엘 스타인(Daniel Stein)에 따르면, 피지컬 씨어터는 “매우 신체적이고 감정적이며 본능적”이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삶에서 겪어본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장면. 낮은 단상의 무대는 '톰'의 두뇌 속. /사진=연극열전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창작한 ‘씨어터 리’(Theatre Re)는 2009년 런던에서 창단되어 강렬한 몸의 움직임과 마임, 연기, 라이브 음악을 통해 “아름답고 시적이며 에너지 넘치는 공연”을 선보이는 극단으로 이름을 알려왔다.

“다시 발견하다, 다시 이미지화하다”라는 의미의 접미사 ‘re(리)’를 강조하며,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씨어터 리’는 “부서지기 쉬운 인간 조건”을 표현하기 위해 ‘몸’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탐구해왔다.

‘씨어터 리’의 창단자이자 연출가, 퍼포머인 기욤 피지(Guillaume Pigé)는 2017년 ‘에든버러 리포터’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라는 작품은 ‘기억’이 아닌 ‘망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작품이기 때문에 신경과학자나 알츠하이머 커뮤니티 그룹과 같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협업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

그는 작품 발전 과정에서 시작된 첫 번째 질문은 “기억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였지만, 그것은 곧 “기억을 잃게 되면 우리의 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라는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고, 결국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기욤 피지는 신경과학자 케이트 제프리(Kate Jeffery)와의 협업 과정에서 “과학과 실제 인간경험 사이의 연결과 망각의 매커니즘”을 보다 효과적으로 무대 위에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공연의 목표는 치매에 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그 밖에 다른 무언가를 파헤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기억들이 구성되고 해체되며, 또 재구성되고 잘못 구성되는지”에 대한 지식은 큰 도움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장면. 빵집 창문에 얼굴을 맞대고 군침을 흘리며 빵과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는 '톰의 친구들'. 조명과 마임, 표정연기와 움직임 만으로 구현되는 무대는 완벽하게 '기억'과 '감정'을 전달한다./사진=씨어터 리의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트레일러 캡쳐 컷

기억은 ‘시각적’으로 작용하며 대뇌 안쪽에 위치한 ‘해마(hippocampus)’에 저장되고 관리된다.

일종의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기억들은 일단 하나의 ‘실’이 잡아당겨지면 그것과 연관된 다른 기억들을 촉발하고 연달아 다른 ‘실’이 풀려나오며 계속 이어지고 펼쳐진다. 일단 떠오른 기억들은 시냅스(synapse)가 연결되어 있는 다른 기억들을 불러와야 하지만 그 연결 고리가 끊어지거나 부서지게 되면 전체의 시퀀스가 무너지기 때문에 기억들이 서로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기억에는 많은 신경이 관련되어 있고, 하나의 신경은 많은 기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치매’(dementia)라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무너지는 기억의 체계를 다시 세울 수가 없다.

그가 해체되어 가는 ‘망각의 과정’을 무대 위에 그려내기 위해 주목한 것은 “제일 처음 무언가를 기억하려 할 때 인간의 두뇌가 구현하는 것은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가령, 어린 시절 ‘첫 키스’를 기억해내고자 한다면 두뇌는 우선 시각적 이미지로 ‘교실’을 구현한다. 그 다음 공간을 채우고 있던 세부적인 기억들, 즉 책상이나 의자와 같은 이미지들이 더해지고, 그와 관련된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사건’은 맨 마지막에 발생할 뿐 제일 먼저 구현되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공간’이다. 이 때문에 그는 무대 중앙에 정사각형 모양의 낮은 단상과 같은 ‘판’을 설치하고 그 공간을 주인공 ‘톰(Tom)’의 머릿속의 ‘해마’로 설정한다.

‘해마’는 톰이 특정 기억을 촉발해야만 활동할 수 있으므로 관객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서고 공연이 시작되어도 관객들은 그의 ‘해마’를 볼 수 없다. 관객들과 무대를 장벽처럼 기다랗게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은 옷들이 잔뜩 걸려있는 두 개로 연결된 이동식 옷걸이이다. 무대 양쪽으로 너저분하게 놓여있는 작은 소품들 외에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옷’뿐이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장면. '빨간 넥타이'를 찾기 위해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뒤지는 '톰'. 지난 시절의 '옷'들은 그에게 과거의 '기억'을 불러온다. /사진=씨어터 리의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트레일러 캡쳐 컷

공연이 시작되면 오른쪽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55세의 나이에 벌써 치매증상을 보이는 듯 허공으로 불안한 시선을 드리우고 자신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초조하게 두드리는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 여자가 남색 재킷과 붉은 색 넥타이를 남자에게 보여주며 천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아빠! 할머니와 마이크가 생일 케이크를 가져 오신대요. 남색 재킷 꼭 챙겨 입으세요. 빨간색 넥타이는 재킷 오른쪽 주머니에 있어요. 옷걸이 맨 끝에 걸어 둘게요. 남색 재킷, 빨간색 넥타이예요!”

남자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손이 잘 닿는 곳에 재킷을 걸던 여자는 빨간 넥타이가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주머니 밖으로 넥타이의 절반을 길게 뽑아 놓는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장면.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 '톰'에게 남색 재킷에 '빨간 넥타이'를 맬 것을 설명하는 딸 '소피'./사진=씨어터 리의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트레일러 캡쳐 컷

여자는 다시 한 번 남자를 향해 확인하고 덧붙인다.

“셔츠 단추 꼭 채우세요!”

뒤돌아 나가는 여자를 남자가 불러 세운다.

“이자벨라!”

멈춰선 여자가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아빠, 소피예요, 소피!”

이쯤 되면 관객들은 남자가 딸을 기억하지 못해 아내로 착각하고 있으며, 소피의 엄마는 현재 그들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린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일까? 의자에서 일어나 옷걸이 끝 쪽으로 다가간 남자는 딸 소피의 말이 잘 기억나지 않는 듯 머리를 감싸 쥔다.

그 때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환청과 같은 딸의 목소리는 기억을 불러오고, 남자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남색 재킷을 꺼내 왼쪽 팔을 끼운다.

하지만 나머지 오른쪽 팔을 끼우기도 전에 갑자기 ‘빨간 넥타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남자는 한쪽 팔만 끼워진 재킷을 좌우로 흔들며 빨간 넥타이를 찾아 헤맨다. 재킷 주머니에 매달린 채 남자가 몸을 돌릴 때마다 출렁거리는 넥타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관객들은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무대를 향해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장면. 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조기 치매'에 걸린 '톰'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온다./사진=씨어터 리의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트레일러 캡쳐 컷 

남자는 이제 옷걸이에 걸린 모든 옷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은 갑자기 ‘빨간색 드레스’로 향한다. 한참을 만지며 드레스를 응시하던 남자는 이내 손길을 옮겨 카키색의 교복 재킷을 집어 든다. 그는 갑자기 교복 재킷을 입는다. 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순간, 두 개의 이동식 옷걸이는 무대 양쪽으로 치워져 세로로 세워지고, 가려졌던 뒤쪽 공간이 열리며 네모난 정사각형의 낮은 단상의 무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교복 재킷이 촉발한 학창 시절의 기억이 ‘교실’이란 공간을 구현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톰’의 기억을 관장하는 두뇌의 ‘해마’를 형상화한 공간은 책상과 의자로 이루어진 ‘교실’이 되고, 낮은 단상 바깥으로 서 있던 다른 퍼포머들은 양쪽으로 배치된 옷걸이에서 똑같은 교복을 꺼내 입고 무대 위로 올라선다.

밝은 표정의 퍼포머들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장난을 치고, 문제풀이 정답을 알려달라고 친구를 보채며, 무언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써내려간다.

모든 것은 마임과 연기,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밝은 오렌지 혹은 황색의 조명은 오직 ‘해마’를 상징하는 낮은 단상의 무대공간에만 비춰진다. ‘톰’의 기억에 변화가 생길 때면 관련이 없는 인물들이나 오브제들은 낮은 단상의 무대 바깥 쪽 ‘어둠’에 위치한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장면/사진=연극열전

흥미로운 점은 무대 밖에서 ‘톰’을 바라보는 인물들, 즉 다른 퍼포머들이 때로는 측은하게, 때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때로는 절망스럽게 ‘톰’을 바라보고 서 있다는 사실이다.

희미하지만 어둠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드러내고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연결된 기억들이 자신이 속해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함을 슬퍼하고 있는 것만 같다.

‘교복’으로 촉발된 기억은 단서가 될 만한 무언가가 새로운 ‘촉매’로 작용할 때마다 다른 ‘공간’을 불러오고, 또 그 공간에 속했던 ‘사람’들을 불러온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몰래 쪽지를 써 책상 위에 올려놓는 여자 아이, 그 여자 아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기 위해 수업 시간에 몰래 친구와 자리를 바꿔 앉는 톰, 아침마다 엄마가 머리를 단정하게 빗겨주고 옷매무새를 잡아주면 귀찮다는 듯 엄마의 손길을 피해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질주하던 톰, 여자 친구와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셋이 자전거를 타고 정신없이 페달을 밟던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들...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혼식, 밤새 즐기던 피로연, 선생님으로 부임한 자신의 모교에서의 수업들, 첫 아이 소피를 임신했을 때의 기쁨,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번진 부부싸움으로 인해 생긴 듯 보이는 비극적인 교통사고까지...

초반의 기억들은 꽤 선명하기에 관객들은 ‘톰’이 느끼는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뿐 아니라 자신의 기억 어딘가에 숨어있는 감정들과 연결시킨다.

빵가게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고 군침을 뚝뚝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실제로 고정되어 있는 자전거를 달리고 있음에도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듯 보이는 마임과 연기, 몸동작들은 절묘하고 놀랍기만 하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장면. 몰래 '톰'의 책상에 편지를 끼워넣는 어린 시절의 '이자벨라'/사진=씨어터 리의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트레일러 캡쳐 컷.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은 모든 움직임과 어우러지며 기억의 단절이나 왜곡, 해체가 발생할 때마다 기계적인 소음이나 불편한 선율, 리듬을 더한다.

마치 오래된 낡은 영화 속 장면들을 보듯 ‘몸’으로 구현해내는 무대는 너무나 리얼하다. 하지만 중간중간 ‘톰’의 정신이 흐려지고 다른 기억에 의해 방해를 받을 때마다 그는 낮은 단상의 무대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고,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정신이 ‘망각’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톰’이 단상의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기억의 장면들은 조금씩 어긋나고 변형되고 스러지기 시작한다. 책상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인물들이 사라지며, 일그러진 화면처럼 의자와 테이블, 술잔과 사람들이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톰’은 어떻게든 그것들을 되돌려놓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결코 쉽지가 않다. ‘톰’의 반복되는 기억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차이’를 발견하도록 만들고, 점점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게 변하는 그의 기억은 처음과 같은 ‘이미지’를 불러내려는 ‘톰’의 고군분투와 노력 속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을 느끼도록 만든다.

자신의 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톰’이지만, 성장과정에서 축복으로 느껴졌던 순간들, 후회와 죄의식으로 얼룩져 고통으로 자리한 시간들 중 가장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기억은 다름 아닌 아내 ‘이자벨라’이다.

피지컬 씨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사진제공=연극열전)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장면. 아내 '이자벨라'와의 결혼식 날 밤에 대한 기억. /사진=연극열전 

그녀를 처음 만났던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 그 기억을 놓지 않으려는 ‘톰’의 노력은 처절하고 아름답다. 기욤 피지는 ‘더 바일 블로그(The Vile Blog)’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관객들이 극장을 나설 때 얼굴에는 미소를 띠우고 눈에는 눈물을 가득 담고 있기를 바랍니다. 부서지기 쉬운 삶의 조각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간직한 채로 말이죠.”

고통스럽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삶의 모든 것들을 붙들고 싶었던 ‘톰’은 결국 연결되었던 실타래의 많은 부분들이 끊어져 버린 기억을 다시 잇지 못한다.

이제는 너무 늙어버린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친한 친구 ‘마이크’가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음을 알리는 딸 ‘소피’를 향해 처음으로 아버지 ‘톰’은 이렇게 외친다.

“소피!”

아름다움은 하나가 아니다. 아름다움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 어떤 것들은 슬프기에 아름답고, 또 어떤 것들은 빛나기에 아름답다.

트레일러 캡처. 신경회로들의 연결이 끊어지고 점점 더 '기억'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수록 '톰'은 자신의 옷에 팔을 끼워넣지 못한다거나 스르륵 흘러내리는 물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장면. 신경회로들의 연결이 끊어지고 점점 더 '기억'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수록 '톰'은 자신의 옷에 팔을 끼워넣지 못한다거나 스르륵 흘러내리는 물건들을 발견하게 된다./사진=씨어터 리의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트레일러 캡쳐 컷

눈부시게 찬란한 것이 있는가 하면 빛이 바래고 스러져감에도 그 애잔한 슬픔에 왠지 목이 메어와 ‘아름답다’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훔치면서도 ‘슬프다’가 아니라 ‘아름답다’라 말하게 되는 경우, 시선을 뗄 수 없이 너무나 환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다’ 말하게 되는 경우, 이 두 가지가 모두 공존하는 ‘아름다움’이라면, 그것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기욤 피지는 이렇게 답한다.

“때로는 무대 위에 은유로 창조된 것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부서지기 쉬운 삶 속에서 기억이 사라지고 난 뒤 남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영원한 ‘무언가’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몸’으로 표현되기에 감각과 직관으로 느끼게 되는 무언가를 체험하고, 공감하며, 어떤 ‘이해’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아름다운’ 공연...

우리의 가장 빛나는 시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의 ‘기억’을 놓아줄 수밖에 없는 ‘슬픔’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난 뒤 남는 것은 또 하나의 ‘기억’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짧은 ‘찰나’의 것일지라도 그것 역시 ‘기억’이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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