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경험을 체험하는 통로...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가상의 경험을 체험하는 통로...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 주하영
  • 승인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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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프랑스 안무가 앙쥴랭 프렐조카쥬(Angelin Preljocaj)의 2016년 작품 'La Fresque'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 머리카락의 움직임까지 '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프레스코화'의 가장 상징적인 안무로 그림 속 여인들은 네모난 단상 위에 앉아 절도있는 움직임과 현란함으로 머리카락 군무를 선보인다. /사진=LG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세상을 떠돌던 두 여행자가 있었다. 어느 날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작은 사원 앞에 도착했다. 오랜 세월 사원을 지켜온 노승은 두 사람에게 잠시 쉬어갈 것을 청했다. 노승은 사원 한쪽에 있는 커다란 벽화를 보여주었다. 한 사람의 시선이 소나무 숲 사이에 있는 여인들 중 유독 검고 긴 머리를 한 여인에게 멈췄다.

꽃을 고르고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여행자는 문득 자신이 그림 속 세상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긴 머리의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지만 그림 속 세상에 숨어든 인간을 수색하는 금빛 갑옷의 전사들을 피해 침대 밑으로 숨었다가 그만 현실로 되돌아 와 버렸다.

그는 동료 여행자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지만 여행자는 그가 사라졌던 시간이 단지 몇 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두 여행자는 다시 벽화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여인은 아직도 그 곳에 있지만 그녀의 머리는 이제 비녀를 꽂아 올린 모습이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의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두 여행자는 다시 자신들의 여정을 떠났다.

1740년 중국 작가 포송령(蒲松齡)이 민간에 전해지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들을 모아 50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한 ‘요재지이(聊齋志異)’에 수록되어 있는 ‘벽화(The Mural, 畫壁)’이야기이다.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의 책은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科擧)에 실패해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던 포송령이 40년 동안 모아 엮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도깨비, 귀신과 같은 신비한 존재가 인간과 사랑을 나누는 환상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20세기 이후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안무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앙쥴랭 프렐조카쥬(Angelin Preljocaj)'./사진=LG아트센터

최근 LG아트센터에서는 “20세기 이후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현대 무용 안무가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앙쥴랭 프렐조카쥬(Angelin Preljocaj)의 2016년 작품 ‘프레스코화(La Fresque)’의 공연이 있었다.

프렐조카쥬에 따르면, ‘프레스코화’는 프랑스의 극장 ‘떼아트르 드 라 빌’로부터 젊은 관객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에 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는 현대무용에 관심이 많은 프랑스의 젊은 관객들이 자신들의 삶과 예술을 연결할 수 있도록 일렉트로닉 팝 그룹 AIR의 니콜라스 고댕(Nicolas Godin)의 음악과 가상현실 혹은 증강현실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요재지이’의 ‘벽화’이야기를 무용과 연결해 “환상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현실”을 무대 위에 구현했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포스터/사진=LG아트센터

그는 2016년 당시 유행을 일으켰던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Pokémon GO)’와 ‘벽화’이야기 사이의 연계성을 발견하고는 오래 전 16세기 이야기가 마치 미래를 예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벽에 걸린 그림 속으로 실제 육체가 빨려 들어가 다른 세계로 여행을 하는 현실”을 무용으로 표현한다면 “젊은 층에게도 접근성이 높은 작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환상과 현실, 가상의 세상과 물리적 세상의 경계는 무엇으로 규정되는 것일까?

어느 날 장자가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 나서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오히려 나비가 장자라는 인간의 꿈을 꾼 것인지” 구분을 할 수 없어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겪게 마련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비현실의 세계가 가까이 있고 홀로렌즈(HoloLens)를 통해 가상의 사물이 현실에 놓이는 등 현실세계와 가상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혼합현실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시대에 프렐조카쥬는 모든 것의 시작이 인간의 예술 작품 속으로 빠져들고픈 욕망에서 시작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프렐조카쥬 발레단(Ballet Preljocaj) 홈페이지의 작품설명을 통해 예술에 빠져들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매료시킨 그림의 핵심, 혹은 본질에 닿을 수 있는 “비밀통로(a secret passage)”를 찾기 위해 골몰해 왔음을 말하며 프랑수아 1세와 리히텐슈타인의 왕자를 언급한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서울 공연장면. '프레스코화'는 총 10명의 남녀 무용수가 여러 역할을 맡으며 전체 공연을 이어 나간다. 프렐조카쥬는 '벽화'이야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그림 속 세상의 사회적 의례절차를 표현한 여러 상징적 장면들을 더한다./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서울 공연장면. '프레스코화'는 총 10명의 남녀 무용수가 여러 역할을 맡으며 전체 공연을 이어 나간다. 프렐조카쥬는 '벽화'이야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그림 속 세상의 사회적 의례절차를 표현한 여러 상징적 장면들을 더한다./사진=LG아트센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술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앙부아즈 성의 지하통로를 통해 클루 저택을 오가던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가 가장 아끼던 작품 ‘모나리자’을 놓칠 수 없었던 것처럼, 2016년 위작논란으로 커다란 스캔들에 휩싸였던 리히텐슈타인의 왕자가 독일 회화의 거장 루카스 크라나흐의 ’비너스’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때로 자신을 사로잡는 그림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우리의 몸이 그 속으로 순간 이동할지 모른다는 상상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순간은 실제로 “물리적 존재가 그림 속의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상”으로 이끌어주기도 하고,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 수 있도록 영감을 주기도 한다. 마치 어린 시절 유도선수였던 프렐조카쥬가 친구에게 빌린 책 속에 있던 러시아의 무용가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의 사진에 매료되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용의 세계에 뛰어든 것처럼 말이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 무대 위와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하얀 안개의 흐름은 상징적인 미장센을 구현한다. 흰 구름 혹은 안개의 움직임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 영향력을 암시한다./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는 또한 “시간의 상대성”에 주목한다.

그는 여행자가 벽화 속에 들어가 그림 속 세상의 삶을 살았던 긴 시간이 그림 밖에서는 오직 3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시간에 대한 고정 관념을 흔들고, 측정 기준에 따라 상대적인 양으로 증폭되거나 감소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초월적인 세상 혹은 공간에 위치한 우리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프레스코화’의 무대미술(scenography)은 블랙홀, 리사주 패턴, 오로라 현상을 연상케 하는 안개 혹은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이미지들로 초월적인 공간을 구성한다.

완벽한 암전에서 시작하는 무대는 거대한 머리카락인지, 신비한 힘을 품고 있는 안개인지 알 수 없는 아지랑이가 무대 위에서 아래로 연기처럼 피어나는 가운데 두 남자 무용수가 등장한다.

두 팔만 사용해 바닥을 기던 여행자들은 점차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템포가 빨라진다. 무대를 휘감은 흰 머리카락들은 세찬 비바람인양 두 여행자를 감싼다. 쓰러지면 부축하고 서로에게 의지해 길을 가던 여행자들은 세 명의 검은 수도복을 입은 사제들과 마주치게 된다. 함께 어울려 춤을 추던 여행자들과 사제들은 서로 엉켜 잠이 든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 그림 속 여인들의 머리카락 군무는 5명의 무용수가 한 호흡으로 동시에 움직이며 머리 전체와 목을 꺾어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세심한 계산과 엄청난 양의 연습이 필요했음을 짐작케 한다./사진=LG아트센터

무대 중앙의 검은 스크린이 절반쯤 열리고 마치 거대한 벽화처럼 긴 머리의 다섯 여인이 등장한다. 흰색과 적색, 녹색, 청색, 검은색의 슬립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네모난 단상 위에 둘러 앉아 긴 머리를 휘날리며 춤추기 시작한다. 마치 달빛이 비추는 밤에만 깨어나는 마법의 그림과 같이 무대 우측 상공에는 흰색 블랙홀인양 둥글게 엮이고 해파리처럼 촉수가 움직이는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프레스코화’ 안무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프렐조카쥬가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진 부분은 다름 아닌 그림 속 여인들의 ‘머리카락 춤’이다.

“동양적인 붓글씨, 캘리그라피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는 머리카락 춤은 다섯 명의 무용수들이 머리 전체와 목을 한 호흡으로 동시에 움직이며 한쪽으로 출렁이거나 흔들리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세심한 계산과 엄청난 양의 연습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섯 여인들의 머리카락 군무가 멈추고 나자 여인들은 정지된 ‘벽화’가 된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만이 잠든 남자들을 향해 있을 뿐 다른 여인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잠에서 깬 한 여행자는 그림 속 흰 드레스의 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천천히 그림을 향해 다가가 마네킹처럼 고정된 여인을 안아 단상 위에 바로 세운다. 여인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고 두 남녀는 단상 위에서 함께 춤을 춘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 그림 속 여인과 여행자의 아름다운 키스 장면. 두 사람의 듀엣 장면은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이다./사진=LG아트센터

‘프레스코화’의 서사는 ‘요재지이’의 ‘벽화’ 이야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단, 그림 속 세상의 장면들에 대한 프렐조카쥬의 상상력이 더해지며 그림 속 사회의 의례절차처럼 보이는 여러 상징적인 장면들이 추가된다.

여인과 여행자의 사랑의 듀엣 장면은 밝게 빛나는 별들로 수놓아진 우주의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고, 마을 청년들로 보이는 무용수들이 서로 짝을 이루어 경쾌한 댄스를 선보이는가 하면, 흰색 가면을 쓴 어두운 복장의 무용수들이 나타나 혼자 잠들어 있는 여인을 깨워 가면을 쓸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흰 가면을 쓴 채 다른 무용수들과 함께 춤추던 여인은 이제 다른 여인들에 의해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꽂는 의식을 거행한다.

흰 드레스의 여인이 가운데에 움직임 없이 서 있는 동안 나머지 4명의 여인들이 각각 한 갈래씩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탑을 돌 듯 움직이며 춤을 춰 완성시키는 ‘쪽진 머리’는 놀랍기만 하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여행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 여자의 상징적인 머리인 틀어올린 '쪽진 머리'를 하게 된다./사진=LG아트센터

허리까지 출렁이던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남김없이 둥글게 틀어 올려지고 여인들은 각자 자신의 묶은 머리에 꽂혀있던 핀을 뽑아 여인의 머리에 꽂아준다. 양 손에 붉은 꽃다발을 든 여행자가 머리를 올린 여인 곁으로 다가간다. 두 사람은 무대 한 쪽에 함께 누워 잠이 든다.

그들이 잠든 사이 검은 문이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강렬한 조명을 배경으로 팔과 다리가 여섯 개, 머리가 셋인 괴물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황금 투구 가면을 쓴 세 명의 전사들은 잠든 남자를 들어 올려 그림 세상 바깥으로 던져버린다.

깜짝 놀라 깨어난 남자는 동료 여행자를 발견하고 그림 속 여인의 춤사위로 상황을 설명하지만 동료는 반신반의하는 듯하다. 이제 무대는 처음 여인들이 등장했던 벽화의 모습을 재현한다. 여인들은 똑같은 자세와 시선으로 무대를 채우고 있지만 이제 흰색 드레스의 여인은 붉은 꽃 한 송이를 쪽진 머리에 꽂은 채 남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서울 공연장면. 여행자와 그림 속 여인이 잠든 사이 무대 위 중앙의 '검은 문'이 열리고 머리 세 개 달린 괴물처럼 보이는 황금투구 가면을 쓴 전사들이 등장한다./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서울 공연장면. 여행자와 그림 속 여인이 잠든 사이 무대 위 중앙의 '검은 문'이 열리고 머리 세 개 달린 괴물처럼 보이는 황금투구 가면을 쓴 전사들이 등장한다./사진=LG아트센터

무대 오른쪽 위로 블랙홀인 듯 움직이던 흰색의 정체모를 실타래 역시 이제는 더 이상 촉수를 드러내지 않은 채 정지해 있다. 그림 속 여인을 향해 안타깝게 손을 뻗는 남자의 어깨를 동료 여행자가 잡으면서 막이 내린다.

“가상현실(VR)의 아버지”라 불리는 재런 러니어(Jaron Lanier)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체험을 하고 나면 “자신의 몸과 세계에 관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고 “그렇다면 과연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가상현실은 자신이 다른 장소에 있는 듯 철저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수단”일 뿐 아니라 “인지와 지각의 관점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심층적으로 연구하도록 만드는 장치”임을 강조한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 여행자와 사랑에 빠진 그림 속 여인의 아름다운 솔로 춤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어린 시절 미술책에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삼면화 ‘쾌락의 정원’를 보고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최면에 빠져들었다는 러니어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거대한 새의 부드러운 깃털을 만지고 빨간 공이 있는 놀이터를 돌아다니며 몸을 꿰뚫는 거대한 악기를 부수는 상상을 했다고 말한다.

그는 상상만으로도 온 몸에 퍼져나가는 온기나 간지러움, 격렬한 느낌을 모두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보스의 그림 속에서 캔버스 밖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던 인물들이 현실의 세상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면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간주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사유에 이르게 되었음을 회상한다.

그는 “가상현실 안에 몸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라 그 세상의 주민이 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프레스코화’ 속에서 여행자는 그림 속 여인을 바라보던 관찰자에서 ‘주민’으로 변모한다. 그는 그림 속 세상을 실제로 느끼고 함께 춤추며 여인과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눈다. 그가 여인에게 선물한 붉은 꽃이 그림 속 여인의 머리에 꽂혀 있다는 사실은 그가 경험한 세상이 허구가 아닌 ‘또 다른 현실’이었음을 긍정한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사진=LG아트센터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공연장면. 갑작스레 현실로 돌아오게 된 여행자는 허탈한 마음으로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검은 머리의 그림 속 여인은 처음과 같은 모습이지만 그림 속 세상에서 여행자가 선물했던 '붉은 꽃'을 쪽진 머리에 꽂은 채로 여행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사진=LG아트센터

러니어의 말처럼 현실이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시험하는 우리의 몸과 두뇌작용에 대한 반응으로 되돌아오는 결과”이고, 신경계에 충분한 단서가 주어질 경우 가상현실이 실제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면, “오직 한 번에 하나의 외부 세계만을 선택해 믿는 인간”이 현실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보다 더 진짜로 느껴지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는 인간은 가상세계를 경험한 뒤 현실로 되돌아 왔을 때 “모든 것이 달라져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경험한 ‘나’는 중심에 그대로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가상의 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조각이 사라져도 여전히 경험한 내가 존재하며, 몸이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져도 경험의 중심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상현실 시스템은 “현상을 벗겨냄으로써 의식이 남고 진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드러내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서울 공연장면.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여행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 여자의 상징적인 머리인 틀어올린 '쪽진 머리'를 하게 된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서울 공연장면.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여행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 여자의 상징적인 머리인 틀어올린 '쪽진 머리'를 하게 된다.

프렐조카쥬 역시 예술이 인간으로 하여금 또 다른 차원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수단이자 장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오래 전 ‘벽화’ 이야기가 현실 속 존재와 그림 속 존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신비의 세상으로 독자들을 초대했듯 그는 ‘춤’이라는 예술을 통해 고정된 이미지와 살아있는 움직임, 시간의 상대적 속도, 활성화 된 것과 비활성화된 것 사이의 경계를 탐험하고 가상의 세계로 관객들을 유혹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의 ‘프레스코화’는 관객들의 신경계를 한껏 뒤흔들어 뇌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 속 세상을 한동안 ‘현실’로 느끼고 믿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예술이 무의식이나 과거의 체험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통로를 제공한다”고 말했지만 프렐조카쥬는 ‘예술이 다른 사람의 신비한 경험 자체를 관찰하는 현장’이자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만든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서울 공연장면. 그림 속 여인들의 머리카락 군무는 5명의 무용수가 한 호흡으로 동시에 움직이며 머리 전체와 목을 꺾어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세심한 계산과 엄청난 양의 연습이 필요했음을 짐작케 한다.
프렐조카쥬 발레 '프레스코화' 서울 공연장면. 그림 속 여인들의 머리카락 군무는 5명의 무용수가 한 호흡으로 동시에 움직이며 머리 전체와 목을 꺾어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세심한 계산과 엄청난 양의 연습이 필요했음을 짐작케 한다. /사진=LG아트센터

관객들은 어느 새 무대 위 여행자와 같은 입장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현실은 환상적인 무대를 바라보며 몰입하고 빠져들었던 80분간의 춤의 세계 속에 멈춰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고,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신비라 할지라도 모두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일에 동의할 경우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러니어의 말에 근거한다면, 적어도 프렐조카쥬의 ‘프레스코화’의 세상에 빠져들었던 관객들에게 무대는 가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프렐조카쥬는 ‘프레스코화’라는 무대 그 자체로 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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