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툴라의 독'에서 벗어난 노라...연극 '인형의 집'
'타란툴라의 독'에서 벗어난 노라...연극 '인형의 집'
  • 주하영
  • 승인 20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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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 풍경] 러시아 유리 부투소프 연출,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연극 '인형의 집' 1막 첫 장면. 러시아 연출가 부투소프는 입센의 원작을 해체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노라(정운선)는 종을 흔들어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뒤 마치 법정에 선 사람처럼 자신의 '위조'에 대해 고백하고 억울함을 토로한다./사진=예술의전당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사회 속에서 구별되는 성(性)의 차이는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성(性)의 구분은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성(性)에 따른 차별은 분명 문화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를 지탱해 온 사회적 규범은 타고난 본능이 아니라 공통의 신화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250만 년간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던 사피엔스는 대략 1만 년 전부터 ‘농업’을 시작했고, 단위 면적당 식량 생산이 크게 늘자 지배자와 엘리트를 출현시켰다.

스스로 삶의 방식을 구현해내기 시작한 인류는 더 이상 ‘자연의 법칙’이 아닌 “수억 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상호 주관적 질서”에 스스로를 내맡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물질세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살면서도 보이지 않는 질서에 얽매인 채 자신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배적인 신화’에 의해 규율 당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상상의 질서’는 사람들의 욕망의 형태를 결정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에는 ‘문화적 메커니즘’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현재에도 여전히 상상의 질서에 사로잡힌 채 같은 공간을 빙빙 돌고 있다. ‘상호 주관적 질서’라는 그물망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념이 한꺼번에 바뀌거나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감옥’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 나간다 해도,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가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한다. 즉, 무언가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 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차별하고 구분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성별의 대립이라는 ‘상상의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어떤 ‘강력한 신념’이 필요한 것일까?

인류에게 ‘문화’라는 것이 생긴 것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성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새로운 어떤 ‘상상의 질서’가 필요한 것일까?

연극 '인형의 집' 공연 장면. 검은 드레스에 비녀를 꽂은 모습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노라(정운선). 부투소프는 인물들의 개별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의 '전형화된 인물들'로 표현한다. '노라'는 이미 남성적 질서에 의해 '문화'라는 이름으로 강제되어 온 모든 '여성'을 의미한다./사진=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는 최근 개관 3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공연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의 연극 ‘인형의 집‘을 선보였다. 

현재 러시아 최고의 연출가라 불리는 ‘유리 부투소프’와 독특한 미학의 미장센을 구현하는 무대 디자이너 ‘알렉산드르 쉬시킨’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았던 ‘인형의 집‘은 2008년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 기념작으로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선보이며 한국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부투소프의 10년 만의 귀환이라는 점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배우들이 에너지를 ‘회오리바람’처럼 쏟아내고, 관객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며, 광적이고 혼란스러운 극을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부투소프는 이번에도 다양한 음악과 무용, 강렬한 시각적 은유와 청각적 효과를 이용하며 많은 오브제들을 활용한 여러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 나가는 ‘연극적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텍스트를 완전히 해체하고 장면을 재배열하면서 생략과 반복, 지연 등의 기법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부여하는 부투소프는 프로그램북에 소개된 인터뷰를 통해 “입센 작품의 연출이 처음”임을 밝혔다.

그는 ‘인형의 집‘이 초연된 1879년에 제기되었던 “남녀의 관계, 자유의 경계, 혹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속이며 살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함”을 강조하며, 자신은 “전혀 다른 ‘인형의 집‘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극장은 “자신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이미지의 실현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니라 다른 견해, 다른 해석, 다른 세계를 보러 가는 곳”이라고 여기는 부투소프는 140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여성해방의 아이콘’으로 여겨져 온 입센의 ‘인형의 집‘ 역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해체하고 조합하여 관객들이 인물의 감정에만 함몰되지 않고 ‘이성’에 질문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해석’을 펼쳐보였다.

부투소프는 무대를 마치 모든 것을 버리고 '인형의 집'을 떠난 노라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관객들 모두에게 진술하고 있는 동안 노라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기억들, 심상들, 의식들을 구현한 곳으로 설정한다.
연극 '인형의 집' 공연 장면. 연출가 부투소프는 무대를 마치 모든 것을 버리고 '인형의 집'을 떠난 노라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관객들 모두에게 진술하고 있는 동안 노라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기억들, 심상들, 의식들을 구현한 곳으로 설정한다./사진=예술의전당

그는 ‘연습 일지‘를 통해 “사실 이 이야기는 여기 앉아있는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노라에 대해 우리가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강조하는 부투소프는 사실상 ‘이미 누구에게나 일어났고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 보인다.

온통 ‘암흑 상자’와 같이 보이는 무대는 사회가 부여한 윤리와 질서에 혹은 현실에 갇혀있는 노라의 마음, 실존을 상징한다. 이 때문에 무대 위의 공간은 발생하는 사건마다 노라의 마음 상태와 불안 정도에 따라 끊임없이 축약과 확장을 반복한다.

극은 마치 이미 집을 나간 노라가 관객들 앞에서 재판을 받기라도 하듯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관객을 향해 책상 앞에 앉아있는 노라는 말한다. “네, 맞아요. 전 남편을 속였어요. 하지만 그건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어요! ···제가 잘못된 건가요?”

남편이 과로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노라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한 서류로 고리대금업자 크로그스타드에게 돈을 빌린다.

뱃속의 아이는 태어나기 직전이고 남편의 요양은 시급한데 병상에 있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노라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건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하는 헬메르를 설득할 수 없었던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녀는 관객들을 향해 묻는다. “남편의 목숨을 구하고 병석에 계신 아버지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한 일이 남편 몰래 돈을 빌렸으니까, 아버지와 남편에게 거짓말을 했으니까, 그렇게 잘못인 건가요? 난 법 같은 건 몰라요. 법이 옳다는 것조차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돼요. 하지만 어디선가 분명 이런 일이 허용되고 있으리라 믿어요. 그런 건 모른다고 하실 건가요? 그렇다면 당신들의 법은 정말 나쁜 법이네요!”

사진 16 - 거울을 들고 춤을 추는 린데 역의 배우(우정원). 사물을 비추는 기능을 하는 거울은 자신의 모습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비춰볼 수 있도록 해준다. 기본적으로 부투소프는 린데와 노라를 하나로 연결한다. 노라의 심정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은 린데 역을 맡은 배우(우정원)이며, 종종 같은 의상을 입는다.
연극 '인형의 집' 공연 장면. 거울을 들고 춤을 추는 린데 역의 배우(우정원). 사물을 비추는 기능을 하는 거울은 자신의 모습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비춰볼 수 있도록 해준다. 기본적으로 부투소프는 린데와 노라를 하나로 연결한다. 노라의 심정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은 린데 역을 맡은 배우이며, 종종 같은 의상을 입는다./사진=예술의전당

‘법’이란 건 무엇일까? 어째서 ‘법’은 당시 여성에게 ‘사유재산’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며, 그로 인해 아버지나 남편의 허락 없이는 돈을 빌릴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법이 사회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 또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법’을 어기는 것뿐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그리고 그 ‘법’을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부투소프는 노라가 객석을 향해 던지는 질문에 이어 바로 달빛 아래 ‘광기의 춤’을 추는 사람들의 무대를 펼쳐 보인다. 긴 의자에 누워있던 남녀 배우들은 성별에 상관없이 흰 원피스를 입은 채 갑자기 무언가에 물리기라도 한 듯 점차 속도가 빨라지는 과격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팔 다리를 제 멋대로 휘두르고 미친 듯이 속도를 더해가는 ‘광기의 춤’은 고대의 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마이나데스와 사티로스들의 의식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술에 취해 벌이던 극단적인 종교행위와 광기어린 의식들이 기원전 7~8세기 무렵 노래와 춤, 무용, 연극 경연대회를 갖춘 디오니소스 축제로 변모되고 순화된 것이 ‘연극의 기원’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프리카 음악에 온 몸을 내맡긴 배우들의 광기어린 춤은 ‘문화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1막의 춤 장면. 노라가 관객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사라진 후 무대는 커다란 달이 뜬 어두운 밤에 다섯명의 배우가 광란의 춤을 추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타란텔라'는 독거미 타란툴라의 '독'을 해독하기 위한 춤이라는 민간의식에 기원한 것이기도 하지만, 고대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던 의식과도 연결된다.
연극 '인형의 집' 1막의 춤 장면. 노라가 관객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사라진 후 무대는 커다란 달이 뜬 어두운 밤에 다섯명의 배우가 광란의 춤을 추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타란텔라'는 독거미 타란툴라의 '독'을 해독하기 위한 춤이라는 민간의식에 기원한 것이기도 하지만, 고대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던 의식과도 연결된다./사진=예술의전당

흥미로운 점은 이 춤이 다름 아닌 2막에서 헬메르가 노라에게 가장무도회에서 추기를 권하는 ‘타란텔라 춤’과 그 기원이 같다는 점이다. 물론 헬메르가 요구하는 “카프리에서 배운 타란텔라”는 ‘구애’를 주제로 한 빠르고 열광적인 정열의 춤이지만 그 기원은 이탈리아 ‘타란토’라는 지방에 서식하던 독거미 ‘타란툴라’에게 물린 고통을 이기지 못해 미친 듯이 몸을 움직이던 고대의 의식에서 출발했다.

입센의 원작에서 노라는 헬메르에게 “저는 요정의 딸이 되어 당신을 위해 달빛을 받으며 춤을 출거예요”라고 말하며 크로그스타드의 은행 복직을 위해 애원한다.

노라의 ‘위조’ 사실을 볼모로 자신의 복직에 “영향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는 크로그스타드는 결국 헬메르가 해고통지서를 보내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모든 것을 폭로하는 편지를 보낸다.

남편이 크로그스타드의 편지를 읽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헝클어진 머리로 끊임없이 타란텔라 춤을 추는 노라에게 헬메르는 이렇게 외친다. “노라, 마치 목숨을 걸고 춤을 추는 사람 같잖아. 꼭 미치광이 같아, 이제 그만해!”

부투소프는 노라가 불안과 걱정으로 인해 점점 폭력적으로 타란텔라 춤을 추는 장면을 극 초반에 배치할 뿐 아니라 모든 인물들에게 공통으로 부여한다. 대신 2막에서 노라는 날개가 달린 노란색 미니 드레스를 입고 커다란 양철 통 위에 앉은 채 빨간 구두를 들고 춤을 추는 린데 역의 배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웨딩드레스에 밍크코트를 입고 침대 머리 장식으로 달려있는 광대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노라(정운선). 1막에서 노라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바퀴달린 침대에 앉아 좀처럼 발을 땅에 딛지 않는다. 오랜 친구 린데(정운선)가 찾아와 자신의 일자리를 부탁하고 나간다.
연극 '인형의 집' 공연 장면. 웨딩드레스에 밍크코트를 입고 침대 머리 장식으로 달려있는 광대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노라(정운선). 1막에서 노라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바퀴달린 침대에 앉아 좀처럼 발을 땅에 딛지 않는다. 오랜 친구 린데가 찾아와 자신의 일자리를 부탁하고 나간다./사진=예술의전당

부투소프는 헬메르가 ‘종달새’ 혹은 ‘다람쥐’라고 부르는 노라를 새장 속에 갇힌 ‘카나리아’로 설정한다. 사람에 의해 길들여진지 400년이 넘었다는 카나리아는 ‘애완용 새’이기 때문에 새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자유’를 꿈꾸지만 기능을 할 수 없는 날개를 달고 양철통 위에 불안하게 앉아있는 노라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바퀴 달린 침대에 앉아 다른 누군가가 끌어줘야만 움직일 수 있는 1막의 노라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두 발이 묶여있다.

광대인형이 달린 침대에 페티코트까지 있는 불편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앉아있는 창백한 얼굴의 노라는 그야말로 ‘감옥’에 갇힌 병자와 같다. 무대는 마음에 ‘감옥’을 품고 있는 노라의 의식을 표현한다.

아픈 과거를 떠올릴 때의 빛바랜 영상처럼 허공으로 떠다니는 대사들, 당시의 감정 상태를 구현하듯 커다란 기둥이 갑자기 나타나 좁아지거나 소음으로 채워지는 공간들, 충격이나 불안, 공포를 불러오는 인물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끈적끈적한 액체인 양 몸에 엉겨 붙거나 목을 조르듯 강압적으로 내리누르는 상대 인물들의 무용적인 움직임들...

무대는 관객들에게 인형이 되어버린 노라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형들의 집’에 갇힌 인간 노라의 ‘심리상태’ 혹은 ‘실존적 위치’를 구현한다.

사실 1막은 부투소프가 극을 통해 드러내려는 주제의식의 틀을 명확하게 세운다. 광란의 춤 뒤에 남겨진 헬메르는 관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흰 원피스를 벗고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양말을 신고 바지와 셔츠를 입으며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로 변모한다.

옷을 다 차려입은 헬메르는 관객들을 향해 세계 여러 언어로 인사말을 건네며 자신이 ‘은행장’이 되었고 “아름다운 종달새 노라”를 소개하기 위해 나왔다고 말한다.

인형처럼 앉아있는 노라(정운선) 뒤로 뜨개질감을 챙기는 린데(우정원)에게 '뜨개질보다는 자수가 여성에게 훨씬 어울리는 일'임을 설명하는 헬메르(이기돈). 뜨개질은 두 개의 바늘이 서로 엮이며 동등하게 땀을 만들어가야 하는 반면, 자수는 바늘이 하얀 천을 뚫고 들어가 실이 박히는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남성적 질서를 강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극 '인형의 집' 공연 장면. 인형처럼 앉아있는 노라(정운선) 뒤로 뜨개질감을 챙기는 린데(우정원)에게 '뜨개질보다는 자수가 여성에게 훨씬 어울리는 일'임을 설명하는 헬메르(이기돈). 뜨개질은 두 개의 바늘이 서로 엮이며 동등하게 땀을 만들어가야 하는 반면, 자수는 바늘이 하얀 천을 뚫고 들어가 실이 박히는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남성적 질서를 강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사진=예술의전당

하지만 자신의 아내를 “무엇보다 아름다운 엉덩이”라고 표현하거나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쓰레기’임에도 가식을 떨고 있음을 비웃는 헬메르는 관객들에게 ‘불쾌함’과 ‘불편함’ 그 자체로 인식된다.

그는 처음에는 ‘완벽한 여자’였던 노라가 언제부터인가 돈만 밝히는 아주 ‘천박한’ 여자가 되어버렸다면서 폭력적인 경멸을 드러내지만 이미 노라가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다름 아닌 그를 살리기 위해 빚진 돈을 갚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헬메르가 천박하고 위선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 때문에 3막에서 헬메르는 관객들의 동정을 받을 수 없다. 아내의 불법적인 ‘위조’에 대해 알게 된 헬메르가 노라를 향해 엄청난 멸시와 비난을 쏟아내는 3막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배우들이 서로의 성 역할을 바꾸어 두 번 연기함으로써 각기 남성과 여성으로 앉아있는 관객들이 반대의 입장이 되었을 때 느끼는 ‘불편함’에 대한 인식을 통해 스스로 사회가 부여한 ‘상상의 질서’ 속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토록 만들지만 여전히 헬메르의 ‘위선적 모습’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다.

자신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사실에 더 큰 관심이 있는 헬메르는 린데의 따뜻한 수용으로 인해 마음이 변한 크로그스타드가 모든 것을 철회하겠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차용증서’를 돌려보내자 순간 돌변하여 모든 비난을 거둬들인다.

연극 '인형의 집' 공연 장면. 2막의 타란텔라 춤 장면은 1막으로 옮겨지고, 헬메르(이기돈)와 노라(정운선)가 빨간 구두를 들고 춤을 추고 있는 린데 역의 배우(우정원)를 바라보고 있다./사진=예술의전당

하지만 이미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모두 ‘허상’이었음을 깨달은 노라에게 모든 진실은 너무 명확하기만 하다.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 이어지는 ‘상상의 질서’를 옳은 가치라 믿으며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여 온 그녀는 모든 가치 체계가 무너져 내린 그 집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역할 이전에 ‘하나의 인간’으로서 새로운 가치 체계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노라는 말한다. “정말 모르겠어요. 이 모든 것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좀 더 사회 속으로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런 후에 사회가 옳은 것인지 내가 옳은 것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방 하나만 든 채 흰 원피스 차림으로 홀연히 집을 떠나는 노라는 강렬한 여운을 남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누구보다 냉담하고 이성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모든 결정이 감정적인 선택이 아님을 강조한다.

반면, 그런 노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용서한다니까!”를 부르짖는 헬메르의 반쯤 옷을 벗은 흉측한 모습은 광기에 휩싸여 춤을 추던 반인반수의 ‘사티로스’를 연상케 한다. 무섭게 내려앉는 천장은 사람의 얼굴에 염소의 하반신을 가진 ‘사티로스’처럼 변해있는 헬메르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공간만을 남긴다.

노라의 의식은 그렇게 ‘광기의 질서’에 사로잡혀 있는 헬메르를 암흑 속에 가둔다. 새로운 질서를 찾아 나선 그녀의 의식 속에 타란툴라의 ‘독’과 같은 헬메르의 질서는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극 '인형의 집' 공연장면. 열정, 결단, 분노를 상징하는 붉은색의 구두를 손에 들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무대를 질주하는 노라(정운선).
연극 '인형의 집' 공연장면. 열정, 결단, 분노를 상징하는 붉은색의 구두를 손에 들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무대를 질주하는 노라(정운선)./사진=예술의전당

결국 부투소프는 자신이 1막에서 관객들을 향해 던진 질문에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보느냐”이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택하지 않은 것”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우리가 자신을 가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 보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건지, 있는 걸 보지 않는 게 이상한 건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없는 걸 보지 못했던 노라가 이상한 게 아니라 눈을 멀쩡하게 뜨고도 보려고 하지 않는, 알면서도 무시하고 덮으려 하는 헬메르가 더 이상하다는 답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그의 많은 시도들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프레스 콜을 통해 밝힌 부투소프의 말처럼, 연극은 지식을 전달하는 강연도 아니고 설명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밝혔듯 “관객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를 파악하기”를 원한다면 오롯이 관객들에게만 평가를 맡길 것이 아니라 조금은 자신이 내린 해석에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들을 제공해주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연극은 분명 ‘다양한 해석의 장’이지만 소통에는 ‘설득’의 노력 또한 필요하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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