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을 극복하는 '상상' 그리고 '사랑'...연극 '러브 스토리'
낯선 것을 극복하는 '상상' 그리고 '사랑'...연극 '러브 스토리'
  • 주하영
  • 승인 201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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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이경성 연출, 연극 '러브 스토리'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장면. 북한에 있는 '상상 속 친구'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는 배우 나경민. 그는 어쩌면 '지나친 이상'이자 '오해'일지도 모를 상상의 시도들이 '이해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간 노력'이 되기를 희망한다./사진=두산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낯선 장소, 낯선 공기, 낯선 사람들이 두려운 것은 그곳에 대한 정보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낯선 곳에 관한 어떤 이야기가 생기고, 관계가 생기고, 인상이 자리하게 되면 그곳은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닌 내 기억을 점유한 곳, 정이 가는 곳, 추억과 향수를 불러오는 곳이 되고 만다.

장소는 그렇게 이야기를 품고, 이야기는 기억을 품는다.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에서 “장소는 우리에게 우리가 되돌아갈 어딘가, 즉 연속성을 제공”하고, “커다란 눈금 안에서 우리의 문제가 어떤 맥락”을 얻게 되는지 깨닫게 함으로써 ‘광활한 세상’ 속 존재라는 관점에서 “상실이나 문제 혹은 추함을 해결하고 치유해 준다”고 말한다.

그녀는 “하나의 장소는 곧 하나의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지형을 이루고, 감정이입은 그 안에서 상상하는 행위가 된다”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감정이입을 통해 다른 누군가가 되어보는 일, 즉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누군가를 상상하거나 허구 속 인물이 되어보는 일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이해해보려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상상하기’란 곧 ‘사랑하기’를 의미하며, 타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주체를 확장시켜나간다는 점에서 “이야기로부터 자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자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야기는 우리를 자신 밖으로, 경계 너머로 시선을 돌려 다른 이의 삶을, 낯선 곳의 삶을 바라보도록 만들며, 그들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타인을 가깝게 느끼도록 만든다.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저 너머의 공간으로 사라져 버린 인물들의 뒷 모습. (왼쪽부터) 우범진(리예매 역), 성수연(김뿔 역).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장면.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저 너머의 공간으로 사라져 버린 인물들의 뒷 모습. (왼쪽부터) 우범진(리예매 역), 성수연(김뿔 역)./사진=두산아트센터

최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는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이경성 연출의 연극 ‘러브 스토리‘의 막이 내렸다. 그는 1년 전 연극 ‘워킹 홀리데이 Walking Holiday‘를 준비하면서 도라산 통일 전망대를 방문했다가 폐쇄된 개성공단의 모습을 바라보며 떠오른 구상을 통해 작품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그는 당시 전망대 너머로 “정돈된 장난감 블록”처럼 보이던 개성공단이 갖는 의미나 역할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막상 도보횡단여행을 통해 ‘선’을 따라 걷다보니 그 너머의 ‘점’을 보게 되었고, 그 ‘점’ 안에서 일어났을 여러 관계와 만남들에 대해 상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단지 갈 수가 없어서, 만나지 못해서 상상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내 바로 옆의 존재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상상하지 않으면 그 사이에 벽이 생긴다. 단지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언젠가 만나게 될 구체적 존재들에 대해 상상을 해 봤을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연극 ‘러브 스토리‘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확실히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사랑해나가는 이야기’를 관객들 앞에 펼쳐 보인다.

나경민, 우범진, 성수연 세 배우는 각자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개성공단’에 대해 공부하면서 알게 된 많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각기 만날 수는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인물들’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연극 '러브 스토리'의 무대. 스크린, 책상, 피아노, 노트북, 그리고 칠판이 갖추어진 무대는 마치 강의실 같기도 하고 사무실 같기도 하다. (왼쪽부터) 우범진(리예매 역), 성수연(김뿔 역), 나경민(최송아 역).
연극 '러브 스토리'의 무대. 스크린, 책상, 피아노, 노트북, 그리고 칠판이 갖추어진 무대는 마치 강의실 같기도 하고 사무실 같기도 하다. (왼쪽부터) 우범진(리예매 역), 성수연(김뿔 역), 나경민(최송아 역)./사진=두산아트센터

무대는 세 사람이 그려내는 개성공단에 있었을 법한 세 인물들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고민들, 사유들, 새롭게 깨달은 것들을 관객들과 함께 나눈다.

낯선 무언가를 설명할 때 필요한 것은 분명 ‘허구’가 아닌 ‘설명’이다.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이 없이 어떤 것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잘못된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 ‘러브 스토리‘는 매우 영리한 전략을 택한 듯 보인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개성공단’이라는 지역에 대해 연구된 사실들, 인터뷰들, 각종 자료들을 통해 얻은 것들을 ‘발표’하는 형식의 극은 관객들에게 그들의 상상이 충분히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가능한 일이었음을 긍정하도록 만든다.

‘상상하기’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방식을 출발점으로 하는 이 연극은 매우 독특하다. 하지만 잔잔하고 여운이 짙으며, 미세하게 어디론가 스며들어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고정관념과 틀을 돌려 세우는 매력이 있다.

연극 ‘러브 스토리‘는 연극이 관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반드시 거칠고 강렬하며 공격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때로 우리는 가장 소소한 것에서 가장 큰 진실을 발견한다.

내 삶의 ‘일상’이 무대 위 타인의 일상과 맞닿을 때, 내가 느낀 감정과 그 인물의 감정이 정확히 같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무대와 현실의 경계는 무너진다. 허구는 현실이 되고, 타인의 삶은 나의 ‘일상’이 되며, 그들의 거리는 한없이 가까워진다.

스크린과 책상, 피아노, 노트북, 칠판이 펼쳐져 있는 무대는 언뜻 강의실 같기도 하고, 사무실 같기도 하다. 세 배우는 줄곧 무대 위에 각자의 자리에 앉아 관객들을 향해 ‘상상 속 인물’을 두고 써내려간 소설의 창작 과정을 설명하고, 서로 다른 사람이 창작한 인물에 대해 궁금한 점을 질문하며, 각자 자신이 창작한 인물을 관객들에게 ‘시연‘해 보인다.

북한의 대중체육사업 '업간 체조'에 대한 설명과 함께 체조를 직접 '시연'해 보이는 배우들. (왼쪽부터) 우범진(리예매 역), 성수연(김뿔 역), 나경민(최송아 역).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장면. 북한의 대중체육사업 '업간 체조'에 대한 설명과 함께 체조를 직접 '시연'해 보이는 배우들. (왼쪽부터) 우범진(리예매 역), 성수연(김뿔 역), 나경민(최송아 역)./사진=두산아트센터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을 두고 상상함에 있어 결국 그들이 도달한 지점은 공단 건물들 사이로 좁게 나 있는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고양이’처럼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이다.

배우들은 들어가는 절차나 나가는 절차가 출입국 절차와 똑같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개성공단에 매일 드나드는 사람들을 ‘작은 것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배우들을 사로잡은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끼리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는 사람들”과 정해진 규율에 순응하는 삶을 살지만 “마음 한 켠에 숨겨놓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이 서툴고 뭐든지 잘 하지 못하지만 새로운 공간을 통해 조금은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를 그런 사람들이다.

극은 개성공단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폐쇄되었던 2016년 2월 12일을 시점으로 배우들이 각자 상상한 인물, 최송아, 리예매, 김뿔에게 발생했을 일들과 그들의 삶을 관객들에게 소개한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10대 시절부터 초코파이를 먹고 자라나 자신 또한 개성공단 출퇴근버스 운전수가 된 데 자부심을 느끼는 20대 청년 최송아, 기억력도 나쁘고 인간관계도 서툰 탓에 똑같이 생긴 건물들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일이 어렵고 남측 동료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 같은 건 절대 할 수 없는 유통기업 근로자 리예매,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농담을 넉살좋게 받아들이거나 분위기를 따르지 못하는 탓에 점점 마음 속 어딘가에 ‘뿔’이 자라고 있는 개성공단 편의점 직원 김뿔... 이 세 사람은 모두 2016년 2월 12일, 각자 영원히 잊지 못할 자신들만의 ‘기억’을 갖게 된다.

개성공단 출퇴근 버스 운전사로 일하는 20대 북한 청년 '최송아'에 대해 설명하는 배우 나경민.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장면. 개성공단 출퇴근 버스 운전사로 일하는 20대 북한 청년 '최송아'에 대해 설명하는 배우 나경민./사진=두산아트센터
같이 일하는 남측 정비사의 한쪽 새끼손가락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도 같이 한쪽 장갑을 잘 벗지 않게 된 사연을 설명하는 북한 청년 '최송아'(배우 나경민).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장면. 같이 일하는 남측 정비사의 한쪽 새끼손가락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도 같이 한쪽 장갑을 잘 벗지 않게 된 사연을 설명하는 북한 청년 '최송아'(배우 나경민)./사진=두산아트센터

다른 북한 청년들처럼 17세에 군 입대를 했지만 ‘작은 사고’를 겪은 후 다소 불편한 다리를 갖게 된 최송아는 차량 정비기술을 가르쳐주던 한 쪽 새끼손가락이 없는 남측 정비사와 남몰래 가까워진다.

탁구도 치고 인삼주도 나눠먹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남측 정비사의 가족사진을 보게 된 최송아는 “관심이 있다면 여동생을 소개시켜주겠다”는 정비사의 말을 들은 후부터 ‘통일’을 소원하게 된다.

갑자기 남측 정부에 의해 공단 폐쇄 결정이 내려진 날, 남측 정비사가 평소 좋아하던 용봉 담배와 개성 산삼주를 힘들게 모아 챙겨놓았던 최송아는 부랴부랴 그를 찾아 탁구장으로 향한다.

자신이 쓰던 정비 연장을 선물하며 남측 정비사가 건넨 “다시 못 볼지 모르니 형, 동생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어색해하며 딴소리만 늘어놓던 최송아는 아쉬운 마음에 그와 마지막 탁구시합을 이어나간다.

갑작스러운 개성공단 폐쇄로 인해 남측 노동자와 헤어지게 된 안타까움에 마지막 탁구시합을 이어나가는 북한 청년 '최송아'(배우 나경민). 그들은 서로 각자에게 "헤어진 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로 자리한다.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장면. 갑작스러운 개성공단 폐쇄로 인해 남측 노동자와 헤어지게 된 안타까움에 마지막 탁구시합을 이어나가는 북한 청년 '최송아'(배우 나경민). 그들은 서로 각자에게 "헤어진 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로 자리한다./사진=두산아트센터
연극 '러브 스토리'의 공연 장면. '리예매'를 연기하는 배우 우범진.
연극 '러브 스토리'의 공연 장면. '리예매'를 연기하는 배우 우범진./사진=두산아트센터

2015년 2월, 개성공단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된 리예매는 ‘처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함경북도에 있는 군부대에 배치되던 첫 날도, 아내를 만나던 첫 날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첫 날도 좀처럼 기억하지 못했던 리예매는 2016년 2월 12일, 개성공단의 ‘마지막 날’ 만큼은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단 내 다른 기업들과 다르게 남측과 북측 근로자들이 탁구와 배구를 하며 곧잘 어울리곤 했던 ‘Y유통’에서 일하게 된 리예매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못할 뿐 아니라 운동신경이라곤 전혀 없는 탓에 주변과 도통 어울리질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생일선물로 축구화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남측 동료에게 부탁해 놓았다고 거짓말을 둘러 댄 리예매는 초조함에 다른 북측 동료의 부탁을 받고 축구화를 몰래 넣어두고 가는 남측 근무자의 ‘검은 봉지’를 훔친다.

없어진 축구화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난 다음 날, 화장실 천정에 몰래 숨겨둔 축구화를 챙기러 일찍 출근하려는 리예매 앞으로 난데없이 ‘개성공단 폐쇄로 인해 출근하지 말라!’는 통지가 배달된다.

10㎞에 달하는 길을 달려 공단 앞 출입구에 도달한 리예매는 군인들이 굳게 지키고 있는 철조망 주변을 배회하며 외친다. “축구화! 축구화!”

개성공단에서 처음 만난 남측과 북측 노동자들이 각자 서로의 이마에 '뿔'이 난 줄 알았다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는 데서 착안한 '김뿔' 캐릭터를 설명하는 배우 성수연.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장면. 개성공단에서 처음 만난 남측과 북측 노동자들이 각자 서로의 이마에 '뿔'이 난 줄 알았다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는 데서 착안한 '김뿔' 캐릭터를 설명하는 배우 성수연./사진=두산아트센터

배우 성수연은 무조건 애국심이 강할 거라는 편견과 다르게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 불만이 자라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근거해 북한에서 강요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갇혀 상처입고 마음에 ‘뿔’이 난 북한 여성을 그린다.

처음 만난 북측 사람들과 남측 사람들이 “서로의 이마에 ‘뿔’이 난 줄 알았다”고 했다는 데서 착안한 ‘김뿔’이란 인물은 남쪽 뿐 아니라 북쪽, 서쪽, 동쪽 그 어느 쪽 사람과도 말하는 게 불편하고 힘든 ‘부적응자’이다.

끊임없이 손님들과 마주쳐야 하는 편의점 직원 일이 불편했던 김뿔은 차라리 자신을 괴롭히던 작업반장이 있던 속옷 공장으로 되돌아가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김뿔의 관심을 유일하게 끄는 것은 그녀가 ‘공단이’라 부르는 건물 뒷골목을 누비는 고양이와 자신에게 몰래 휴대용 장치에 담긴 ‘음악’을 선물해주는 ‘담배 피우는 남측 여직원’ 뿐이다.

배우 성수연은 겉은 평범하지만 마음 속에 '뿔'을 간직한 북한 여성 노동자 '김뿔'을 상상해 낸다.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장면. 배우 성수연은 겉은 평범하지만 마음 속에 '뿔'을 간직한 북한 여성 노동자 '김뿔'을 상상해 낸다./사진=두산아트센터

여자가 술을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엄격하게 금지된 북한 사회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남측 여성 직원은 북한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뒷담화’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김 뿔에게는 심장박동수를 높이는 낯선 음악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강렬한 세상을 알려주고 금기를 깨고 싶게 만드는 그녀가 위안과 동경의 대상이 될 뿐이다.

어느 날, 바람을 쐬고 있던 그녀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측 남자 직원이 자신을 개의치 않고 방귀를 뀌고 가래를 뱉는 것을 바라보면서 김뿔은 생각에 잠긴다.

기분이 나쁜 이유가 “더러운 것을 봐서인지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서인지” 궁금해 하던 김 뿔은 “옆에 사람이 있든 말든 속에 있는 것들을 이렇게도 빼고 저렇게도 빼는 그 속내가 얼마나 시원할까?”라는 상념에 이른다.

불현듯 그녀는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어떤 일을 해 볼 결심에 이른다. 그녀는 공단 퇴근길에 광고 전단지를 떼어 “녀성의 흡연권을 보장하라!”는 글귀를 써 넣은 뒤 담배를 입에 물고 종이를 번쩍 든 채 ‘인민을 위해 근무함’이란 빨간 글씨 아래 서 있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새어나오는 자신을 발견한 김뿔은 생각한다. “내일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갈 것인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지 뭐,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다음 날 개성공단은 폐쇄되어 더 이상 출근할 필요가 없게 된다.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 중 '국뽕 테스트' 장면. "자신의 나라에 대한 결점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거나 혹 인정하더라도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경향"을 일컫는 '국뽕' 상태를 테스트하는 질문들은 관객들에게 자신을 점검하도록 만든다
연극 '러브 스토리' 공연 중 '국뽕 테스트' 장면. "자신의 나라에 대한 결점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거나 혹 인정하더라도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경향"을 일컫는 '국뽕' 상태를 테스트하는 질문들은 관객들에게 자신을 점검하도록 만든다./사진=두산아트센터

연극 ‘러브 스토리‘의 드라마터그를 맡은 전강희는 프로그램북에서 주로 “서적과 논문을 참조”해 연극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로 인해 언론에 쏟아진 정보들이 “그간의 노력을 한순간 초라하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프레임에 따라 볼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쪽과 북쪽은 항상 같은 위치에 그대로 있는데, 카메라의 렌즈가 다 찾아내고 보여주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연극을 작업하는 과정은 “바라보는 방식을 연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일까? 연극 ‘러브 스토리‘는 마치 원거리에서 비추던 낯선 공간을 ‘줌 인’으로 확대하고 초점거리를 당겨 우리의 삶과 비교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삶을 규정하는 틀에 갇혀 부당함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사람들, 자신이 믿고 사는 세상이 전부인 양 다른 삶은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 큰 흐름을 결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조건 휩쓸려가야 하는 사람들, 타인과 교감하는 일이 어렵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힘들지만 ‘인간’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결국은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낯선 공간에 대한 세 배우의 ‘상상하기’는 관객들 역시 상상하도록 만든다. ‘상상하기’는 낯선 것들을 가까이 당기고, 어쩌면 ‘지나친 이상’이자 ‘오해’일지도 모를 시도들을 ‘이해를 위한 노력’, 즉 ‘사랑하려는 노력’이 되도록 만든다.

‘상상의 경험’은 우리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만들고, 우리가 ‘되돌아갈 어딘가’를 제공한다. 상상은 그렇게 낯선 곳을 가까이 당긴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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