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인터뷰] 의사교수직 떠나 구호조끼입은 김용민 구호활동가
[365인터뷰] 의사교수직 떠나 구호조끼입은 김용민 구호활동가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9.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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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간 몸담았던 대학에서 벗어나 '국경없는의사회' 구호활동가로 제2의 인생

-대학에 사표 내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에티오피아 오지에서 의료 구호 활동

-소록도 한센병환자 돌보며 정형외과 진로 결심..."소록도에서의 1년이 내 인생 바꿔"
정형외과전문의인 김용민 구호활동가는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구호활동가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충북대학교 의대 교수로 교육인의 삶을 살던 그는 지난해 사표를 내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에티오피아 오지를 찾아 봉사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는 "1980년대 한센병 환자들이 있는 소록도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현재의 제 모습을 거의 다 결정했다"고 말했다.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리선 기자] 안정된 교수직을 그만두고 구호 조끼를 입고 분쟁 지역을 누비는 이가 있다.

정형외과전문의인 김용민(62)구호활동가는 누구나 부러워 할 만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뒤로 하고 국제 인도주의 의료 구호 단체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구호활동가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1년 전 만하더라도 충북대학교 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써온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그런 그가 퇴직을 4년 앞둔 지난해 대학에 돌연 사표를 내고 찾은 곳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에티오피아 오지다.

때론 총성이 울리고 한국에 비해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도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며 묵묵히 현장을 지켰다.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정형외과로 진로를 결심했던 20대 시절부터 마음에 늘 품어왔던 봉사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많은 의료인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선례를 통해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실에서 김용민 구호활동가를 <인터뷰365>가 만났다.

의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구호활동가로 활동 중인 김용민 씨.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365>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현재 옆에 있는 이웃에게 도움이 되어 주는 것, 생각, 말과 행위로 도움을 주는 게 봉사"라고 말했다./사진=김리선 기자

의대 교수직 내려놓고 구호활동가로 제2의 삶 

-구호활동가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구호활동가로 불리는 기분이 어떤가.

변신이라고 불러야 하나. 난 기분이 좋다. 한번 사는 인생이고, 어차피 65세가 되면 교수란 직업에서도 은퇴를 해야 될 시기인데, 새로운 길을 선택해서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기까지 고민은 없었나.  

교수를 하면서도 20년 전부터 과에 모임에 있을 때마다 농담처럼 “55세 전에는 나가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나도 왜 55세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나이가 지난 뒤로는 서서히 여러 복합적인 상황들이 작용하면서 ‘지금이 적기’란 생각이 들더라. 급속도로 발전하는 의료계 환경 속에서 이젠 후학들을 위해 자리를 넘겨야 할 때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2017년 가을 경 '국경없는의사회' 채용 설명회에 참석하게 됐고, 이듬해 3월 구호활동가로 정식 가입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됐다.

-학교를 떠나겠다고 했을 때 주변 동료들의 반응은.

같이 일한 과의 후배 교수나 전공의들에게 오랫동안 이런 분위기를 여러차례 띄워 놓곤 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가지 말라고 붙는 후배도 있었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처럼 때가 되면 헤어지는 것 아닌가. 

-퇴직 후 재정적인 면에 대한 고민은.

내가 '백수'이지 않나. 하하. 여기서(국경없는의사회)잠시 일을 하면 보수가 나오고, 고용이 안 되면 계속 벌이가 없는 백수다. 다행히 교육공무원으로 오래 재직해서 연금은 나온다. 정년퇴직이 아닌 중도퇴직이라 연금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정적인 수입은 있으니까. 여유 있게 살 수는 없어도 연금이 매달 들어오니 굶지는 않는다.(웃음)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구호활동가로 전향했을 때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

예전부터 정확한 시점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겠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직장도 변동이 있을 수 있다는, 다양한 변화를 예고한 말이기도 했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을 꺼다. 그 말이 정작 현실로 다가왔을 때는 놀라거나 걱정도 있었겠지만, 고맙게도 담담히 받아들이더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나.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기엔 다들 바쁘게 산다. 하하. 가족들이 자랑스럽다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응원해주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 활동가들과 대화를 하면 처음 이 길을 선택할 때는 걱정을 많이 하지만, 그 길을 가기 시작하면 응원해주고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을 하더라. 어느 가족이나 그런 것 같다.

사실 우리 가족은 저처럼 표현이 많은 편이 아니다. 1남 3녀의 자녀들이 있는데, 딸들이 아빠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며 서운함을 토로하곤 한다. 설거지하고 요리도 하고 가정적이라고 나름 생각하는데,(웃음) 아무래도 30여 년간 선생을 해오며 나도 모르게 몸에 밴 말투가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첫 파견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서 총상환자들 치료

 야간공습·총성 들리기도...분쟁지역 실감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구호활동가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정형외과전문의 김용민 구호활동가/사진=인터뷰365 

-'국경없는의사회'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현직에 있으면서 구호활동가로 활동하긴 쉽지 않았을 텐데.

대학에 몸담으면서 해외 파견은 쉽지 않더라. 대표적으로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의 경우 파견 기간이 2년이다. 파견 기간이 길거나, 아니면 자비로 가야하는 경우가 많더라. 국경 없는 국경없는의사회의 경우 교통비와 체제비가 제공된다. 비록 일반 의사 기준으로 보면 턱 없이 낮은 금액이지만, 노고에 대한 급여를 지급해준다는 점이 좋았다. 무엇보다 외과계열의 경우 단기로 기간을 선택해 다녀올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긴급 구호 활동을 하는 국제 인도주의 의료 구호 단체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28개 사무소가 있으며, 2018년 한국 사무소에서 파견한 한국인 구호활동가는 의사 9명을 포함한 총 22명이다. )

-그동안 어느 지역에서 구호 활동을 진행했나.

2018년 5월 초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총상환자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긴급 파견 요청에 들어왔다. 당시 학교에 재직했을 때여서, 학교 측과 의논해 27년간 재직하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연가를 모두 모아 2주간 파견됐다.

그리고 그해 학교를 퇴직한 후 3개월간 에티오피아의 감벨라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남수단 난민 및 지역 주민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올해 1월에 돌아왔다.

2월 하순엔 다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긴급 파견되어 한 달간 머물렀다. 이번 주말에도 요르단 파견 요청을 받았는데, 기간이 맞지 않아 못 가게 됐다.

"MSF2 국경없는 의사회" "MSF1 사진=국경없는 의사회"
가자시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친선 자선병원(PFBT)에서 정형외과의사인 김용민 구호활동가(사진 오른쪽)을 비롯한 외과의, 간호사로 구성된 국경없는의사회 팀이 총상을 입은 환자의 수술을 진행하고 있다./사진=국경없는의사회

-파견은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

의사가 필요하다는 요청이 오면 국경없는의사회 측에서 관련 분야의 의사(구호활동가)들에게 요청을 하고, 구호활동가가 승낙하면 해당 지역으로 파견이 되는 식으로 이뤄진다.

-첫 파견지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의 구호 활동을 떠올려 본다면 현지 참상은 어땠나.  

한국에서는 웬만한 외과 계열의 의사들도 총상을 볼 일이 많지 않은데, 100% 총상환자였다. 처음 겪는 현실이었다. 유럽에서 온 다른 의사들과 함께 치료를 했다. 환자들은 계속 늘어가고...안타까웠던 현장이었다.

-현지에서 위험 했던 상황도 있었나.

아프리카에서는 종족간 분쟁이 여전히 있는 상황인데, 어느 날 휴일에 활동가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담벼락 밖 가까이에서 총성이 들리더라. 그리곤 내 주위를 둘러봤더니 나를 제외하고 모두 테이블 밑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더라. 난 처음 겪는 일이기도 해서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갔더니 다들 놀라더라. "난 이미 충분히 살만큼 살았는데 걱정할게 뭐 있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웃음) 2차로 가자에 파견됐을 당시 야간 공습이 있었다. 간혹 총성과 폭음이 들려 분쟁 지역임을 실감 했다. 

"봉사는 나를 위한게 아니라 남을 위한 것"

"MSF2 국경없는 의사회" "MSF1 사진=국경없는 의사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알-아크샤 공립병원에서 활동한 국제 구호활동가들과 함께 한 정형외과의 김용민 구호활동가(맨 왼쪽). 당시 국경없는의사회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시위로 늘어나는 총상 환자들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으로 수술팀 위주의 의료진을 구성했다./사진=국경없는의사회

-현지 의료 환경은 어떻던가.

치료나 수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무래도 한국에 비해 열악하다. 수술 중 갑자기 정전이 되거나 수술 장갑 위에 파리가 날아와 앉을 때도 있는데, 의사로서는 굉장히 당혹스런 순간이다. 특히 현대의 정형외과는 수술기구나 첨단장비 등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는데, 아프리카에선 최소한만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와 다른 낯선 환경 속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수십 년간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쌓아온 치료 원칙이 있고, 이 환자에게 그 치료를 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데, 주변 여건들이 받쳐주지 않으니 너무 힘들었다. 환자들을 계속 오는데,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왜 나를 이곳으로 오라했을까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뭔가를 하라고 나를 보낸 거고, 나에게 필요한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이런 활동이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니 여기서 나의 할일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했다. 수술 여건은 열악해도 할 수 있는게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 있는 장비만 갖고서도 많은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기쁘고 보람이 느껴지더라. 주위 사람들도 “닥터 킴 덕분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하더라.

사실 환경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내가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하는거지, 나를 위해서 이 사람들이 바뀌어야 한다, 여건이 달라져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건 봉사가 아닌 거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돌보며 정형외과 진로 결심

아이티 대지진 때 구호 활동 참여...8년 뒤 실행한 구호활동가의 길 

치프때 의국에서
치프 시절 의국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정형외과전문의 김용민 구호활동가(사진 오른쪽). /사진=김용민 씨 제공

-처음 구호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소록도에서의 생활이 1차 계기였다. 1980년대 한센병 환자들이 있는 소록도를 가게 됐다. 남들이 꺼려하는 환자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돌보는 모습을 보고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주는 것이 의료구나'는 생각을 막연히 가졌다. 내가 정형외과(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형외과 전공)로 진로를 정한 이유도 소록도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이후 학교에서 재직하다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 아이티에서의 구호 활동이 두 번째 계기가 됐다. 의사를 만나기 힘든 그 곳에서 나조차도 도움을 줄 수 있는 필요한 의사였다. 언젠간 때가 되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막연히 들었던 생각을 8년 뒤에 실행하게 된 거다.

-소록도에서는 얼마나 생활했나. 어떻게 가게 된 건가.

병역으로 무의촌(의사가 없는 지역)지역에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했다. 3년을 전라남도에서 보냈는데, 이중 절반을 국립소록도병원에서 지냈다.

대학 동기로부터 우연히 소록도 얘기를 듣고 지원을 하려했더니 소록도는 나처럼 의대만 졸업한 일반의는 갈 수 없고, 전문의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소록도병원에 계신 대학 선배께 "기회가 되면 불러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 이후 1년간 아무 소식이 없어서 포기하고 무안에 있는 무의처보건지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던 어느날 갑작스럽게 발령이 떨어졌다. 알고 보니 전문의 한 분이 한센병 공포증으로 그만두면서 결원이 생기자 선배가 1년 전 받았던 그 편지를 떠올렸던 거다.

-실제로 생활을 해보니 어땠나.

내가 환자가 되는 꿈을 꾸곤 했다. 소록도에 온지 2개월 쯤 지났을 때 꿈을 꿨는데 거울 속 내 얼굴의 눈썹이 다 빠져있었다. 다들 얘기를 들어보니 직원들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더라. 누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극복하고 적응 하게 되지만, 끝내 적응을 못하면 소록도의 생활을 이어가긴 힘들다.

-소록도에서의 경험이 의사로서의 삶에 영향을 준 건가.

30여년이 흘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소록도에서 보낸 1년이 현재의 제 모습을 거의 다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전공을 정형외과로 결정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 역시 소록도에서의 경험이라고 말했는데.

평생을 한센병 환자 진료에 바치신 김도일 한국나병연구원 원장님이 1년에 한 번씩 소록도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시는데, 그 분의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당시 난 막 의대를 졸업한 상태라, 선생님께 그들에게 제일 도움이 되는 과를 여쭤봤더니 정형외과를 말씀하시더라. 한센병 환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얼굴 변형을 떠나 팔다리 마비가 오는 게 가장 심각하기 때문이다. 정형외과는 경쟁률이 높은 과였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이 과를 무조건 해야겠다 결정했다.

성의문화상 대학 본과 때 찍은 사진 한장(성의문화상 소설부문 입선, 시상식 가서 찍은 것)과
정형외과전문의 김용민 구호활동가는 학창시절 책과 글을 좋아하던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대학 본과 때 '성의문화상' 소설부문에 입선 후 시상식에서./사진=김용민 씨 제공

-어린 시절 의사가 꿈이었나.

나는 문과 성향에 가깝다. 책 읽고 글 쓰는걸 좋아한다. 학창 시절에도 영어와 국어는 재미있었던 반면, 수학이나 과학에는 흥미가 없었다. 장래에 국어선생님을 할까, 글을 써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의대로 진로를 정한 계기가 있었나.

제가 7남매 중 막내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힘들었겠나. 그래서 저 뿐 아니라 형제들에게 전문직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지금은 다들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7남매 중 큰 형과 제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변 이웃에게 도움이 되어 주는 것이 진정한 봉사

구호 경험,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되었으면

J 34병동 전공의 J 동료와 찍은 사진 보낼께요. 한 장은 그 동료와 둘이 나머지 한장은 수련동기들 함께.
젊은 시절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전공의 동료와 병동에서 함께한 정형외과전문의 김용민 구호활동가(사진 오른쪽), /사진=김용민 씨 제공

-의사로서 가장 뿌듯할 때는.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다. 치료한 환자들이 좋은 결과를 얻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하다. 결과를 떠나 그들에게 위안이 되거나 도움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때면 제일 뿌듯하다.

-후배 의료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직업을 갖는 이유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나와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측면’에서의 직업, 두 번째는 직업이 생긴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남을 위해서’다. 나를 위해서, 또 남을 위해서 이 양쪽 측면을 다 고려하면서 지내면 좋지 않을까 싶다.

-봉사에 대한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의료인의 삶을 살고 있다. 삶의 철학이나 신념이 궁금하다.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의사는 환자에게 ( )해야 한다>에 대한 각자의 답을 써보라고 한다. 제가 개인적으로 바라는 답은 'Helpful, 도움이 되는' 이다. 제 의사로서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디를 가야 봉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재 옆에 있는 이웃에게 도움이 되어 주는 것, 생각, 말과 행위로 도움을 주는 게 봉사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기뻐서 해야 하고, 행복하고 보람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봉사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구호활동가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정형외과전문의 김용민 구호활동가. 그는 "현재 옆에 있는 이웃에게 도움이 되어 주는 것, 생각, 말과 행위로 도움을 주는 게 봉사"라고 활짝 웃었다. /사진=인터뷰365

-지난 1여 년간 숨 가쁘게 구호활동을 해왔다. 앞으로의 계획은.

퇴직 당시 목표는 세 번 이었는데 벌써 다 채웠다.(웃음) 긴급하게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 달려갈 생각이지만, 사실상 정형외과 전문의가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 등 위험하고 위험한 분쟁 지역 대부분 한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여행 제한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어디이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지금 당장은 제가 겪었던 구호 경험들을 젊은 의사들, 간호사들, 의대생, 간호대생, 그 외의 많은 의료인과 일반인들과 공유하며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되었으면 한다. 아직 한국의 많은 분들이 잘 모르고 있다. 내가 학생 때는 이런 얘기를 해주거나 경험을 들려줬던 선배들이 없었다. 이런 선례를 보여주는 게 제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고 사명이란 생각이 든다.

강연도 1-2회 했고, 학회에서 발표도 했다. 현장에서 느꼈던 경험들을 구체적으로 들려주고 보여주니 청중들의 관심이 놀랄정도로 뜨거웠다. 정형외과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끝난 후 교수님이 이렇게 다들 안 졸고 열심히 듣는 강의는 처음 봤다고 하더라.하하. 의미 있는 강의가 되겠구나 싶더라. 앞으로도 이런 일을 많이 해야겠다 싶다.

 

김리선 기자
김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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