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홀트아동복지회의 산증인 마리 홀트 여사
[그때 그 인터뷰] 홀트아동복지회의 산증인 마리 홀트 여사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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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잃은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아온 60여년
평생 고아와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았던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사진=인터뷰365  

[편집자주] 독신으로 살며 고아와 장애아동을 위해 평생 헌신 봉사의 삶을 살아온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이 17일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35년 미국에서 태어난 홀트 여사는 1956년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후 한국의 고아를 돌보는 일을 평생의 사명이라 여기며 60여년간 봉사의 삶을 이어왔다. 

홀트 여사는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한 아버지 해리 홀트와 어머니 버다 홀트의 유지를 받들어 버림 받고 상처 입은 수 많은 전쟁고아와 장애인들에게 따뜻한 가정을 찾아주는 일에 온 일생을 바쳤다. 암 투병중에도 마지막 남은 일생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쏟겠다고 말했다. 

평소 자신도 한국 땅에 묻힌 부모님 곁에서 잠들고 싶다고 말했던 홀트 여사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2대로 이어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2009년 홀트일산복지타운에 위치한 '말리의 집'에서 <인터뷰365>를 맞이했던 마리 홀트 여사를 추억하며 생전 인터뷰를 소개한다.


 ◆ 10만 명 입양시킨 홀트아동복지회 산증인 말리 홀트

평생을 고아와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 봉사의 삶을 살았던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사진=인터뷰365

6.25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배고픔과 전염병을 이기지 못한 채 쓰러져갔다. 또한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급속히 증가한 혼혈아동들은 혈연중심의 유교문화 속에서 엄청난 핍박과 고통을 받았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비참한 현실은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지만,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는 아이들을 품에 안지 못했다.

이 무렵 탄생한 홀트아동복지회는 단체수용 방식의 기존 고아원과 다른 길을 택했다. 아이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선물해줌으로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한 것이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자 해리 홀트(1905~1964)는 한국 전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전쟁고아들을 돕겠다고 결심, 지난 1955년 12명의 아이를 입양한 것을 인연으로 전재산과 생애를 바쳐 한국 입양사업에 헌신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부인인 버다 홀트 여사가 한국을 오가며 부군의 유지를 평생 이어받았으며, 여사가 세상을 떠난 2000년부터는 셋째 딸인 말리 홀트 현 이사장(1935~)이 이어가고 있다. 조건 없는 사랑과 고결한 봉사정신의 대물림이다.

홀트家의 입양이 막 시작되던 1956년 당시 미국에서 간호대학을 다니던 말리 홀트 이사장은 아버지의 부름으로 머나먼 한국 땅을 밟았고, 서울 효창공원과 녹번동 일대에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모든 게 설레었을 스물한 살 청춘은, 결혼도 마다하고 그렇게 불우한 아이들과 더불어 반세기를 보냈다.

말리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홀트일산복지타운> 언덕에 자리한 '말리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복지타운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휠체어에 의지한 중증 장애인의 밥그릇을 확인한 말리 이사장이 예의 푸근한 인상으로 “와, 우리 수희 많이 먹었어~”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천천히 다 먹여주더니 혼자서 빈 그릇을 치우고 식탁을 닦았다. 일상인 듯 했다.

일을 마친 말리 이사장이 찬물에 잘 녹는다는 아이스커피를 타주며 인사를 건넸다. “세상 참 편리해졌지요? 생활이 편해졌으니 일은 더 많이 해야 돼요. 호호.”

평생을 헌신 봉사의 삶을 살아온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사진=인터뷰365

 

-외국에는 무슨 일로 다녀오신 건가요? (이날의 인터뷰는 말리 이사장의 해외 출장과 병원입원으로 몇 차례 미뤄진 후의 만남이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홀트 장애인합창단 ‘영혼의 소리로(Voice of the Soul)’ 팀이 <2009 안톤 브루크너 국제합창대회>에 참가하게 되어 오스트리아에 다녀왔어요. 다른 팀에 비하면 실력은 부족하지만 무척 아름다운 노래였지요. 특별상을 수상했는데, 이번 대회에 장애인합창단이 출전한 것은 처음이랍니다.(웃음)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했는데 건강은 괜찮으세요?

지금은 괜찮은데 혈압이 높아지지 않게 운동을 열심히 해야 돼요. 작년에는 백내장 때문에 눈 수술을 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괜찮아요. 나이를 먹으니까 몸이 자꾸 고장나요. 호호.

-이곳을 ‘말리의 집’ 이라고 부르나 봐요.

원래는 그냥 ‘손님의 집’이었는데 예전에 우리 원장님이 ‘말리의 집’이라고 붙여주셨어요. 아버지가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만든 집이죠.

-함께 점심식사를 하던 몇몇 분은 교포인 것 같던데요.

입양인 두 명과 그들의 가족 네 명이 모국방문을 위해 자원봉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어요. 미국에서 온 21살의 크리스틴은 이곳에서의 자원봉사가 본인의 전공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아주 좋아해요. 음식도 비교적 잘 맞는지 오늘은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어요. 호호. 해외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1~3개월 동안 머무는데, 원래는 입양인부터 신청을 받았지만 인원이 모자라니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청이 받고 있습니다.

-‘말리의 집’에서 함께 지내는 가족들은 누구인가요? 소개 좀 해주세요.

(말리 이사장이 모든 방을 돌아다니며 한명씩 소개했다.) 여섯 명이 함께 지내고 있는데 이곳에는 병을 앓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환자들이 많아요. 유일하게 영혜(51)가 수저를 들고 밥을 먹을 줄 알고, 수희(31)는 뇌성마비를 앓고 있어요. 완복(50)이는 예전에 홀트에서 일을 도왔던 아이예요. 나리는 아직 스무 살이 안됐고, 귀희는 위암을 앓고 있는데 희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리고 희찬이(2)는 미혼모가 낳은 아이인데 엊그제 새로 왔어요. 희찬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보육사들보다 나이가 많아서 보육사들이 언니라고 부르며 잘 돌봐 주고 있지요.(웃음)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사진=인터뷰365

 

-아이들을 세심히 챙기는 습관이 몸에 배이신 듯합니다. 하루일과가 어떻게 되시나요?

말씀하신대로 보통 아이들을 돌보며 하루를 보내는데 귀희가 과일 밖에 못 먹어서 오늘 아침에는 과일을 사서 먹인다고 함께 외출을 했어요.(웃음) 또 홀트아동복지회 회장님과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원장님과 여러 가지 계획을 추진하기도 해요.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보면 내가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를 때가 많아요. 호호.

-미국에 있는 형제들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홀트 부부는 1남 5녀의 자녀를 두었고, 여덟 명의 전쟁고아들을 입양했다.)

오빠와 언니, 제 밑에 동생 2명이 세상을 뜨고 14명 중에 10명이 남았어요. 1년에 한 번씩 휴가를 내서 가족들을 만나러 미국에 가는데 이번에는 8월 4일에 가서 2주 정도 머물다 올 예정입니다. 모두들 예쁜 손자와 손녀들이 있고 다같이 모이면 피크닉도 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요. 홀트아동복지회 창립 기념일에는 가족들이 한국에 나오기도 했고요. 떨어져 있을 때는 이메일로 자주 연락을 하지요.

-형제 중에 자녀를 입양한 분이 있나요?

막내 동생 베티가 필리핀 남자 아이 두 명을 입양했어요. 어렸을 때 베티의 피부색이 다른 혼혈 형제들과 똑같아서 우리는 베티가 한국인이라는 걸 몰랐는데, 자라면서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베티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곁을 묵묵히 지킨 효녀예요.

-선친인 해리 홀트는 어떤 계기로 한국의 고아들을 입양하게 된 건가요?

아버지가 서른다섯 살에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가 찾아왔는데, 그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시고는 만약 살게 된다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건강이 회복되면서 성경책을 늘 읽으셨고 우리에게도 성경을 읽도록 하셨지요.

당시 오리건 주의 유진 고등학교 강당에서 <월드비전> 밥 피어스 박사의 특별강연을 열면서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후원을 요청했는데, 그들을 보며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간호학교를 다니느라 집에 없었는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한국의 고아들을 입양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아버지가 당시 오리건주에서 제재업을 하셨는데 이 사업이 번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어요. 그래서 집이 굉장히 넓었고, 밥상도 컸으니까 고아들을 입양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던 셈이죠. 호호.

주위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나이가 너무 많고(50대), 자녀가 여섯 명이나 되는데 굳이 입양을 할 필요가 있냐며 극구 말렸다고 해요. 그러자 아버지가 “하나님이 내가 한국의 고아들을 도울 수 있게 인도한 것 같다”고 말씀 하셨대요.

 

-당시 해외 입양이 전무했으니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고아 여덟 명을 입양하려고 했는데 우선 미국의 ‘피난민 구호법’은 한 가정의 입양 가능 인원을 두 명으로 제한하고 있었어요. 입양을 하기 위해서 오리건 주 출신 리처드 뉴버거 상원의원과 에디스 그린 하원의원이 도움을 주셨는데 우리 가정이 아이를 입양해 잘 키울 수 있는지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가 동네 분들로부터 85개의 추천서를 받아 의회에 제출했고, 두 달 만에 극적으로 해결이 돼서 열두 명의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었어요. 그 중 여덟 명은 저희 집으로 오게 된 거고요.

-아버지가 한국의 전쟁고아를 입양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주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 형제들끼리 많이 다투며 지냈지만 항상 동생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머니가 임신을 할 때마다 동생이 생긴다고 다들 좋아했으니까요. 어머니는 딸이 많으니 내심 아들을 원했고, 큰 오빠는 여동생 밖에 없으니까 남자 형제들을 원했으니, 우리 모두 형제가 생겼을 때 좋은 나름의 이유가 하나씩 있었던 셈이죠.(웃음)

-동생들이 입양된 후 집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동생 스잔이 자기도 입양아였으면 좋았을 거라고 얘기하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당시 입양된 동생들을 취재하려고 집에 기자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사람들이 자기는 쳐다보지 않는다며 질투를 하는 거예요.(웃음) 그렇지만 스잔은 누구보다 동생들을 예뻐했어요. 당시 취재진의 요청으로 인터뷰나 촬영이 끊이지 않았고, 입양을 축하하는 편지와 입양을 하고 싶다며 궁금한 점을 물어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집이 한동안 소란스러웠어요.

아기들을 부려 먹으려고 데려왔다는 식으로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아버지는 매스컴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가 기사화되는 걸 피하지 않으셨어요. 우리 가정을 통해 한국에 있는 아이들의 입양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죠.

-아버지 해리 홀트는 어떤 분이셨나요?

(전형적인 미국인 농부의 옷차림을 한 사진을 가리키며) 우리 아버지가 이런 옷을 참 좋아하셨어요. 농부답게 소박한 차림이 누구보다 어울린 분이셨죠.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보다 앞선 영리한 머리를 가진 분이셨는데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는 건 아직 멀었어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살가운 분은 아니었어요. 우리 형제들 기저귀 한번 갈아주지 않으셨으니까요. 주로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는, 한국의 가정과 똑같았어요. 한번은 먼 길을 가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 힘들어하는데 동생만 안아주셔서 섭섭했던 기억이 있어요. 호호. 오히려 그런 아버지 덕분에 형제들이 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처음 한국에 왔을 때를 기억하세요?

1956년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스물한 살에 한국으로 와서 효창동 고아원의 아이들을 처음 만났는데 당시에는 혼혈아동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구경하려고 울타리 사이로 매일 기웃거렸지요. 마당의 빨래줄에는 기저귀가 한가득이었고요. (바구니 속에서 이민국 통과를 기다리는 아이들 사진을 가리키며) 아이들을 입양 보낼 때는 이렇게 바구니에 담았어요. 추운 날씨에 출발이 지연되면 아이들 몸이 차가워지기 때문에 도착할 때까지 철야로 돌보며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어요. 한번은 가장 심하게 아팠던 여자아이가 숨을 멈췄는데 심장의 박동이 안 느껴져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도를 올리고 나자 아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화도 있어요.(웃음)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입니다만, 굶어죽는 아이들도 많았죠?

영아원이나 시립병원에서는 갓난아기들이 많이 죽어갔는데, 제대로 먹지 못해 빼빼 말라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었어요. 분유 한 컵에 물 네 컵을 타게 되어있는 분유를 아끼느라 물을 열 컵 넣기도 했어요. 간호원으로서 죽어가는 아기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최선을 다해 보살핀 아기가 죽었을 때 너무 슬펐어요. 숨이 멎어가는 아기를 안고 병원에 데려갔는데 산소 호흡기가 하나밖에 없어 다른 아기의 산소 호흡기를 벗겨 산소 호흡기가 하나 더 올 때까지 두 아기에게 교대로 호흡기를 대주며 밤을 새기도 했지요. 다음날 한 아기가 죽었는데 정말 슬펐어요.

홀트아동복지회는 전쟁고아, 혼혈아동뿐 아니라 심각한 중증 장애로 입양이 어려운 장애아동들의 복지에도 애정을 쏟았다. 1960년대 한국에서는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서비스가 사실상 전무했는데,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홀트아동복지회가 벌인 각종 사업과 활동은 한국 장애인복지 사업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해주었다는 평가다. 일산에 위치한 홀트일산복지타운은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생활 시설이다. 이곳은 심각한 장애로 입양이 불가능한 아동들의 보호시설로 약 3백여 명의 장애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좋은 가정에 입양이 되거나 취업이 되어 떠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이제 입양 사업과 더불어 가정위탁, 미혼모지원, 다문화가정지원, 지역사회복지 등 소외된 약자들에게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한민국 대표 사회복지 전문기관으로 성장했다.

-어머니와 나머지 형제들도 한국을 찾아와 입양 사업을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스잔과 바바라가 먼저 한국에 도착해 아버지를 도왔어요. 어머니는 미국에서 집안을 돌보며 한국으로 필요한 물품과 돈을 보내주셨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이들을 입양보내기 위한 절차를 상의하셨고요.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자 어머니가 형제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오셨어요.

-다들 고생이 많으셨죠?

아버지는 너무나 많은 일을 하셔서 항상 피로해하셨어요. 아기들에게 우유를 먹이고 돌보느라, 잠을 거의 못 주무셨어요. 바바라는 간염에 걸리기도 했고, 완다는 소아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했어요.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는 한쪽 다리를 절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회복되었어요. 제가 한국에 들어오던 해에 예방접종을 처음 실시했던 터라 저는 많이 아프지 않았어요.

 

-해외 입양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따가운데요. 해외 입양을 중단해야 할지, 지속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있어 좋은 가정은, 국내이든 해외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국내 아동이 해외에 입양되면 피부색깔이 다르다고 놀림을 당하거나 차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 아이에게 최선의 방법일 것인가죠. 그래서 입양된 아이가 적응을 잘하는지 지속적으로 살피고, 입양인들끼리 교류할 수 있도록 입양 후에도 지원을 하고 있어요.

-해외입양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나요?

그렇습니다. 국가적으로도 해외입양을 줄이고 있는 상황이고, 현재 미혼모와 장애아동에 한해 해외입양이 가능한데, 국내입양의 경우 입양하려는 가정의 조건이 까다롭다는 문제가 있어요. 건강한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입양을 마다하는 경우가 많아요.

-공개입양을 지향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나중에 아이가 받을 차별과 상처를 생각하면 비공개 입양이 좋은 것 아닌가요?

공개입양을 선택하는 가정이 증가함에 따라 입양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어요. 사실 비공개입양은 혈통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선입견이기도 해요. 주위에 입양사실이 알려질 경우 마음 아픈 말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족의 사랑으로 극복하는 게 중요해요. 극복해낸 가정은 입양을 생각하는 다른 가정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어요. 공개입양을 권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힘든 편입니다.

-50년간 소외된 약자들을 돌보며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였나요?

장애아동이 좋은 가정에 입양되어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를 만날 때가 가장 행복해요. 나중에 그 아이들이 잘 자라서 고향인 한국을 찾아올 때는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정을 붙였던 아이가 멀리 떠나갈 때 섭섭하지는 않나요?

오히려 더 좋아요. 보육사가 아무리 아이들을 가족같이 잘 보살핀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요. 보육사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면 아이들은 충격을 받고 다른 보육사에 적응 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요. 이런 생활이 자꾸 반복되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날 수가 있겠어요.

-앞으로 바람이 있으시다면?

입양은 가정이 없는 아이들에게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줍니다. 입양이 원활하지 않아서 고아원의 아이들이 늘어나는 실정이 매우 안타까워요. 물론 좋은 고아원도 많지만 사랑하는 부모 곁에서 있어야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 할 수 있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도 꾸준히 추진하겠지만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다문화가족, 미혼모 지원, 맞벌이 가족을 위한 어린이 집 등 아이들을 건강하게 돌보기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중이예요. 또 홀트복지타운에는 중증 장애인이 많은데 그들을 위한 병원건립과 장애아들의 자활을 위한 작업장을 넓히려는 계획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김리선 기자
김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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