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할 필요...연극 '메리 제인'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할 필요...연극 '메리 제인'
  • 주하영
  • 승인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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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극작가 에이미 헤르조그의 2017년 신작, 2018 뉴욕드라마비평가 협회상, 오비상 수상
연극 '메리제인' 콘셉트 컷. 연극 '메리 제인'의 차별점은 '메리'라는 주인공의 남다른 성격 구현과 2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여성인물들의 '연대'가 보여주는 '위안'에 있다. 원작 텍스트의 경우, 주인공 '메리'를 맡은 배우를 제외하고 총 4명의 배우가 1인 2역으로 8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왼쪽부터) '셰리'(정재은), '루디'(예수정), '메리'(이봉련).
연극 '메리제인' 콘셉트 컷. 연극 '메리 제인'의 차별점은 '메리'라는 주인공의 남다른 성격 구현과 2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여성인물들의 '연대'가 보여주는 '위안'에 있다. 원작 텍스트의 경우, 주인공 '메리'를 맡은 배우를 제외하고 총 4명의 배우가 1인 2역으로 8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왼쪽부터) '셰리'(정재은), '루디'(예수정), '메리'(이봉련).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누구나 아플 것임을 아는데 아프다 말하지 않고, 누구나 고통스러울 것임을 아는데 고통스럽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 때로는 더욱 슬프고 가슴 시리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크기의 고통을 안으로 삭히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기에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삼키고, 또 삼키던 이는 되풀이되는 시간 속에 답답함과 피로감으로 지쳐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고, 또 버티는 순간의 ‘시시포스(Sisyphos)’를 향해 우리가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은 그의 숭고한 노력과 발버둥이 결코 남의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흘러내리는 거대한 돌덩이를 산비탈 위로 밀어 올리려는 무한의 노력을 계속하는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형벌은 우리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인내와 노력, 고통과 번뇌, 부조리함은 크고 작음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의 삶에 주어진 것들이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을 낼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항해 또 다시 걸어 내려오는 이 사람(시시포스)을 본다.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불행과 같은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그가 고통스러워할 이유가 있겠는가? ... 어떤 날에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산을 내려오겠지만 또 어떤 날에는 기뻐하면서 내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바위로 되돌아가는 시지프(시시포스)를 상상해본다. 그것은 고통으로 시작되었다.”

자칫 깔려 죽을 수도 있는 엄청난 무게의 짐을 버텨내려 애쓰는 안간힘, 끊임없이 밀려드는 번뇌와 고민으로 잠 못 드는 밤, 매일 아침 늘어가는 한숨, 그리고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시작하는 또 하나의 하루, 거역할 수도 내던져 버릴 수도 없는 운명 앞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는 인간의 모습...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미국 극작가 에이미 헤르조그(Amy Herzog)의 2017년 신작 <메리 제인(Mary Jane)> 속에는 시시포스와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결코 미소와 친절을 잃지 않는 주인공 ‘메리’가 존재한다.

임신 25주 만에 미숙아로 태어나 뇌출혈로 중증 뇌성마비를 앓게 된 아들을 혼자 돌보면서도 결코 웃음과 따스함을 잃지 않는 여인 메리가 선사하는 삶의 긍정, 그녀의 깊은 속에 흐르고 있는 고통과 슬픔, 아픔과 비극은 관객들에게 진정한 ‘사유의 시간’을 선물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여인, 아이를 낳자마자 “작은 몸에 링거줄과 호스를 온통 꽂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인큐베이터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여인, 출산 직후 아직 몸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의 공황발작까지 감당해야 했던 여인, 그리고 곧바로 죽음이 예견되었지만 3년 동안 생명을 이어온 아들 알렉스(Alex)와 둘만 남겨진 여인... 그녀는 비극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친 남편 대니(Danny)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도 노력했어. 정말로 노력했어. 하지만 알렉스의 삶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게 그에게는 지옥이었나 봐.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나는 진심으로 그가 평화를 찾았기를 바래!”

연극 '메리제인' 콘셉트 컷. 중증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2살 반 아이 '알렉스'를 돌보며 밝음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싱글맘 '메리 제인'(임강희(왼쪽))과 메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관리인 '루디'(홍윤희).
연극 '메리제인' 콘셉트 컷. 중증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2살 반 아이 '알렉스'를 돌보며 밝음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싱글맘 '메리 제인'(임강희(왼쪽))과 메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관리인 '루디'(홍윤희).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 되기를 꿈꾸었지만 출산과 함께 학교를 그만두고 의료보험혜택이 제공되는 직장과 소아과 병동을 갖추고 있는 종합병원 근처에 살면서 아들을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메리는 퀸스(Queens)에 위치한 작은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삽관된 튜브를 통해 음식과 영양분을 공급하고 기도를 막을지 모르는 침이나 이물질들을 빨아들이는 석션기를 24시간 착용한 채 ‘삐’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점검해줘야 할 필요가 있는 아들의 간호는 전문 간호사들의 교대조 투입과 센터에서 제공되는 치료 프로그램들을 통해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

메리의 신용상태는 컴퓨터에 그녀의 이름을 치면 커다란 ‘X’자가 포함된 대출 불가 리스트가 뜰 정도로 심각하고, 언니의 대학동창에게 부탁해 어렵게 들어간 회사의 행정보조 일은 아들로 인해 병가와 휴가를 지나치게 많이 쓴 탓에 현재 불화를 겪는 중이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편두통이 심했던 메리는 한 번 씩 편두통이 시작되면 토하거나 어지러움을 느끼고 마비가 오는 탓에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완전히 뻗어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메리는 아주 많이 지쳐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부담을 가중시키거나 불행의 기운을 옮기지 않기 위해 밝음을 유지한다. 초긍정, 유머, 웃음, 배려, 그리고 절대로 통제를 잃지 않는 놀라운 의지력, 이 모든 것들은 이제 곧 3살이 되는 뇌병변 장애아를 키우는 30대 싱글맘 ‘메리’를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2013년 <4000마일>로 퓰리처상 희곡부문 최종후보로 선정되었고, 2018년 <메리 제인>으로 뉴욕드라마비평가협회 베스트 연극상과 오비상 극작가상을 수상한 헤르조그는 한 개인의 경험이 결코 사회 속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기에 “전체 인간의 삶 혹은 역사로 기능할 수 있음”을 긍정하는 작가이다.

예일대드라마스쿨(Yale School of Drama)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헤르조그는 극작가 리처드 넬슨(Richard Nelson)으로부터 “깔끔하고 단순하며 위트가 넘치는 대사들을 쉽게 전달하면서도 삶에 관해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극작가이자 시나리오작가로 유명한 존 궤어(John Guare)는 그녀가 “자신의 인물들에게 냉정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는 작가”임을 강조한다.

이는 그녀가 항상 자신의 경험과 관련된 것들이나 가족, 혹은 주변 사람들의 삶에서 소재를 찾기 때문이며 자연주의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진짜 삶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도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 아들의 '무당벌레' 장난감의 밧데리를 교체한 후 음악 소리에 맞춰 어두운 벽에 비춰지는 별과 달을 바라보며 잠시 꿈 같은 '위안'을 받는 '메리'./사진=극단 맨씨어터

연극 <메리 제인>의 초연과 뉴욕 공연의 연출을 맡았던 앤 카우프만(Anne Kauffman)은 헤르조그의 극이 “냉철한 현실에서 출발해 꿈같은 초현실적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연극 <메리 제인>의 경우, 선천성 신경근육계 질환인 네말린근병증(Nemaline Myopathy)을 앓고 있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작가 개인의 삶과 건강보험공단 관료로 평생 일해 온 헤르조그의 어머니를 통해 홀로 아픈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여성들의 현실에 보다 밀접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환경이 출발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헤르조그는 드라마터그 에이미 보랏코(Amy Boratko)와의 인터뷰에서 “현실 속에서 아픈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거의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늘 그들의 역경과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극이 초연되었던 2017년 미국 연방정부의 아동 건강보험 프로그램 개혁의 실패는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서비스 철회와 예산 삭감, 미국 전역에 9백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위험으로 내몰고 있다는 문제 제기는 아픈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비난과 재정부담의 문제를 지적하는 시선 사이의 첨예한 충돌을 불러왔다.

실제로 헤르조그는 연극 <메리 제인>을 통해 “2029년이 되어도 공사가 끝나지 않을” 소아병동의 개관이나 비용과 예산 삭감에 관한 문제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데 국내 공연의 경우 국가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국내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들은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연극 '메리제인' 콘셉트 포스터.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은 연극 '메리 제인'을 "'어머니'라는 일상의 영웅에 대한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라고 칭하며, "신파성의 결여가 오히려 더 감동을 불러온다"고 평했다.
연극 '메리제인' 콘셉트 포스터.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은 연극 '메리 제인'을 "'어머니'라는 일상의 영웅에 대한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라고 칭하며, "신파성의 결여가 오히려 더 감동을 불러온다"고 평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보는 부모에 관한 유사한 다른 극들과 연극 <메리 제인>이 구별되는 점은 ‘메리’라는 주인공의 남다른 성격 구현과 1인 2역을 맡은 4명의 배우들에 의해 각기 다르게 연기되는 2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여성인물들의 ‘연대(solidarity)’와 ‘위안(comfort)’에 있다.

점점 더 심각한 상황으로 흐르는 알렉스의 상태와 어려움 속에서도 눈물을 보이거나 분노, 좌절을 표출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독이며 자신과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과 배려, 따뜻함으로 대화하려는 메리의 모습은 오히려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슬픔 앞에서 슬픔을 드러낼 수 없는 외로움, 아픔 앞에서 아픔을 보일 수 없는 두려움은 알렉스가 실려 간 병원 대기실에서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 메리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에게 더 깊이 전달된다.

또한, 가족은 아니지만 상대의 짐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거나 원칙을 깨고, 자신의 불편을 다소 인내하며 배려를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메리 주변 여성들의 모습은 아직 남아있는 세상의 ‘온기’를 관객들의 가슴에 전한다.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헤르조그는 아픈 아이를 둔 부모로서 실제 자신이 느꼈을 법한 것들을 인물들의 대사에 무덤덤하고도 날카롭게 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었을 현실적인 문제와 어려움, 주변 사람들의 위로가 상처가 되거나 스트레스가 될 수 있는 상황들, 종교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등과 같이 보다 폭넓은 주제들을 극 속으로 불러온다.

메리의 아파트 관리인 루디(Ruthie)는 꽉 막힌 주방 싱크대 배수구를 뚫느라 애를 쓰면서 힘든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안으로 삭히는 메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정말이지 친절하고 유쾌해. 너무 유쾌해서 당신이 감당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 당신이 감정을 표출할 출구가 따로 있는 건지, 아니면 몸 안에서 그런 감정들을 모두 흡수하는 건지 말이야.”

메리가 말한다.

“내가 좀 피곤해 보이긴 하지? ... 그런데 막상 나와 같은 상황에 실제로 들어가게 된다면 말이야. 사람들은 좀 놀라게 될 거야!”

꽉 막힌 싱크대 배수구는 분명 답답하고 암담한 메리의 상황을 대변하는 은유이다. 하지만 루디가 자신의 힘만으로는 배수구를 뚫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결국 포기하듯 메리의 상황 역시 그녀의 힘만으로는 타개할 수가 없다.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아들로 인해 가정 간호사 '셰리'와 '메리'(이봉련)는 정신이 쑥 빠지고, 셰리의 조카 '아멜리아'(김세영)는 응급구조대에 전화를 건다. 당황한 자신이 발빠른 대처와 도움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사과를 건네자 메리는 "왜 네가 미안해 하니?"라고 말하며 따뜻하게 아멜리아를 보듬는다./사진=극단 맨씨어터

어쩌면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을 다 해야만 하는 메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피로와 우울, 슬픔의 감정 속으로 끝없이 침잠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그녀가 아들에 대한 책임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내면의 깊은 감정에 대해 얘기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일은 일종의 ‘사치’일 수도 있다.

삶에서 ‘잠’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메리는 그저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다하는 전문 간호사들이 교대조 순번을 잘 지켜주기만 해도 ‘행복’이라고 생각할 만큼 힘겹다.

실제 가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애정과 관심을 다하는 셰리(Sherry)같은 간호사도 있는 반면 ‘삐’ 소리에 제 때 반응하지 않으면 발작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환자 옆에서 졸고 있거나 일하는 환경의 열악함에 대해 불평하는 도나(Donna)와 같은 간호사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생계와 의료보험혜택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 일도 해야 하는 메리가 밤새 자기 대신 아들을 돌봐 줄 전문 간호사들의 교대 순번에 문제가 생길 때 겪게 되는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는 도나의 실수를 상부에 보고하겠다는 셰리를 만류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메리가 말한다.

“우린 이미 너무 많은 간호사들을 잃었어! 알렉스와 같은 케이스가 힘들다는 걸 알아서 다들 두려워하잖아. ... 이번 달만해도 3번이나 간호사를 구하지 못해서 내가 3일 밤을 꼬박 새웠거든. 상부에 보고하지 마, 제발!”

아픈 사람들을 간호해야 하는 보호자들이 자신을 챙기는 일은 쉽지 않다. 또한, 자신이 돌보는 환자가 처한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특정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특히 환자가 의견이나 감정을 전혀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주변 가족들의 위안이나 도움은 때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알렉스와 같은 병동에 입원해 있는 유대교 여인 차야(Chaya)의 말처럼 그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축복이자 전혀 알고 싶어하지 않는 종류의 축복”에 대해 숙고의 과정 없이 피상적인 말들을 내뱉는다.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 어릴 적부터 편두통에 시달려온 '메리'(임강희)는 시야가 흐려짐을 느끼고 두 눈을 감는다. 그녀는 차츰 자신의 머릿속을 점령하는 프랙탈 문양들을 바라보며 슬픔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사진=극단 맨씨어터

대부분 공감과 조언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유사한 경험의 소유자들이고, 다른 이의 비극에 진심을 다할 수 있는 것도 같은 길을 겪어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마주치게 되는 낯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봐 주기 위해 노력하는 따뜻한 배려와 친절에 ‘위로’가 놓여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풀이하도록 만드는 상황들, “천 갈래의 가능성”을 놓고 걱정하는 것 외엔 사실상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현실, 보호자가 하는 모든 노력이 환자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 조차 판단할 수 없는 막막함...

헤르조그는 9개 장면의 에피소드와 9명의 인물들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보호자들이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현실 속에서 느끼는 실질적인 감정들, 내면에 조심스레 품게 되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노출한다.

헤르조그는 연극 <메리 제인>의 결말을 관객들의 상상에 맡긴다. 뇌수술을 받고 있는 아들을 기다리며 어항 속의 물고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제인은 점점 심해지는 편두통을 감지한다.

시야의 왜곡과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편두통은 눈송이나 서리, 결정구조에서 볼 수 있는 패턴들이 “프랙탈(fractal)”로 반복되는 아름다운 구조를 생성한다. 메리는 병원 소속 승려인 텐케이(Tenkei)와 함께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반짝이는 문양들의 반복을 바라본다.

전체 구조를 그대로 닮은 작은 구조가 패턴을 무한히 반복하고 순환해 복잡하고 묘한 구성을 낳는 프랙탈 현상은 자연계의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에 “우주에 속한 모든 것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사진=극단 맨씨어터
연극 '메리제인' 공연 장면.  세 번째 발작으로 인해 뇌수술에 들어간 아들 '알렉스'를 기다리는 '메리'(임강희)와 병원소속 승려 '텐케이'(예수정). 메리는 편두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 두 눈을 감은 채 '프랙탈' 문양들을 바라보고 있다./사진=극단 맨씨어터

미국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는 “한 사람을 알면 모두를 아는 것이고, 한 장소에 대한 감각을 알면 우주에 대해 아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삶을 안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들의 삶을 알게 됨을 의미한다.

어쩌면 헤르조그가 바란 것은 관객들이 ‘메리 제인’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바라보며 놓친 것이 무엇인지, 미처 눈치재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그 ‘드러나지 않은’ 고통의 무게를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스티븐스는 시 <눈사람(The Snow Man)>에서 서리와 얼음으로 뒤덮인 소나무 가지의 감정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사람이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혹독한 추위와 거센 바람이 흔드는 겨울 숲 한 가운데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귀 기울여 듣는 자”만이 “그곳에 없는 무(無)와 그곳에 있는 무(無)를 볼 수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겨울의 마음을 가지고 바람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1월 19일까지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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