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유토피아의 꿈, 사랑 그리고 삶...필름 오페라 '라보엠'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유토피아의 꿈, 사랑 그리고 삶...필름 오페라 '라보엠'
  • 주하영
  • 승인 20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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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코모 푸치니 탄생 150주년 기념 2008년 필름 오페라 '라보엠(La Bohème)'
-오페라계의 디바 ‘안나 네트렙코’(미미 역)와 로맨틱 테너 ‘롤란도 빌라존’(로돌포 역) 주연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꽃 자수를 놓는 여인 '미미(Mimì)' 역을 맡은 안나 네트렙코와 가난한 시인 '로돌포(Rodolfo)' 역을 맡은 롤란도 빌라존. /사진=케빈앤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한병철의 책 ‘에로스의 종말’의 서문에서 “역사의 오랜 전통 속에서 사랑에 강렬한 의미가 부여되어왔다면, 오늘날에는 바로 그러한 의미의 사랑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에로스, 즉 ‘사랑’이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개인주의, 시장 가격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려는 태도,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이해관계”등을 예로 든다.

그는 사랑이란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현재로서는 사랑 외에 그런 경험을 찾아볼 방법이 없기 때문에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에로스의 종말’이 상당히 의미 있음을 강조한다. 어쩌면 한병철의 말처럼 “사랑은 사유의 필수적 조건”이며 “오직 친구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사유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Anna Netrebko)'와 테너 '롤란도 빌라존(Rolando Villazón)' 주연의 필름 오페라 '라보엠(La Bohème)'의 2019년 앙코르 상영 포스터 컷./사진=케빈앤컴퍼니

뜨거운 사랑의 열정과 욕망, 좌절과 실패, 죽음의 주제를 평생 탐구해 온 이탈리아 작곡가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라보엠(La Bohème)’의 필름 오페라가 메가박스에서 앙코르 상영 중이다.

2008년 푸치니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감독 로베르트 도른헬름(Robert Dornhelm)의 연출 아래 “가장 환상적인 조합”이라 일컬어지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테너 롤란도 빌라존 주연으로 제작된 오페라 영화 ‘라보엠’은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미국의 클래식 음악 잡지인 ‘오페라 뉴스’의 에릭 마이어스는 도른헬름 감독의 ‘라보엠’은 “1984년 프란체스코 로시 감독의 필름 오페라 ‘카르멘’ 이후 최고로 잘 구현된 작품 중 하나”이며, “네트렙코와 빌라존이라는 스타들의 불타오르는 격정을 잘 포착했다”고 평했다.

그는 도른헬름의 감성적인 연출이 오페라를 다른 매체로 가져오는 데 성공적인 도약을 선보였고, 특히 도입부에서 흑백 화면으로 시작해 점차 컬러 화면들로 바뀌는 연출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시적 감성의 사진작가 으젠느 앗제(Eugène Atget)의 파리 사진들을 보는 느낌을 갖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파리에서 촬영된 것은 아니지만 그 점이 오히려 ‘연극적 무대’의 속성을 강조하고 “가깝게 촬영된 클로즈업 장면과 느리게 변하는 디졸브 효과, 절묘한 화면 분할과 합성 등이 푸치니의 음악과 플롯이 담고 있는 관능성을 강조한다”고 덧붙였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대학가 학생들의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파리 '라틴 구역(the Latin Quarter)'에 위치한 '카페 모무스(Café Momus)'. (왼쪽에서부터) 철학자 '콜리네(Vitalij Kowaljow)', 음악가 '쇼나르(Adrian Eröd)', 수 놓는 여인 '미미(Anna Netrebko)', 시인 '로돌포(Rolando Villazón)', 가수 '무제타(Nicole Cabell)', 화가 '마르첼로(George Von Bergen)'. 비엔나에 위치한 실내 세트장에 구현된 1840년대 보헤미안 거리는 ‘연극적 무대’의 속성을 강조한다. /사진=케빈앤컴퍼니

실제로 오페라를 영화화한 경우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던 많은 저명한 감독들에 비한다면 도른헬름의 ‘라보엠’은 “지극히 전통적인 방식에 안주했을 뿐 모험심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영국 언론 ‘더 가디언’의 평을 제외하고는 보편적으로 좋은 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도른헬름은 ‘비엔나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오페라를 영화화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갈망을 품고 있음을 밝히며, “프랑코 제피렐리와 같이 무대 연출의 재능을 보여준 전설적인 감독들도 스크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2006년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연출로 참여하면서 얻은 노하우가 “오페라를 영화화하는 한계에 맞서기 위한 연습”이 되었다고 말했다.

도른헬름은 오페라의 영화화 작업을 “한 손을 뒤로 묶고 링 위에 올라서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악보에 묶인 채 작곡가의 의도나 오페라 대본(리브레토)의 흐름을 망가뜨리지 않고 라이브 공연을 가장 큰 매력으로 하는 오페라의 ‘전달 매체’를 바꾸는 일이 많은 제약을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영화라는 매체가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무제타'는 자신을 못 본 척하는 헤어진 연인 '마르첼로'(게오르게 폰 베르겐)의 무심함에 화가 나 관심을 끌기 위해 소동을 피운다.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왈츠'를 부르는 무제타의 매력에 무너져내린 '마르첼로'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그대 내 방문을 두드린다면 내 가슴이 뜨겁게 열리리!"라고 노래한다./사진=케빈앤컴퍼니

무대 위의 막이 올라가는 대신 이야기를 품고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가까이에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관객들이 인물들과 보다 깊은 사랑에 빠지고 슬픔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조명 기법과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배경을 현대적인 무대로 옮기기보다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1840년대 파리의 분위기를 느끼도록 만드는 데 집중한다.

2008년 도른헬름은 오스트리아 영화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하면 푸치니의 ‘라보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최선의 방법을 연구하느라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오늘날에 맞게 옮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라보엠’의 원작인 앙리 뮈르제(Henri Murger)의 ‘보헤미안 삶의 정경’보다는 오히려 작곡가인 푸치니의 젊은 시절의 전기적 사실이 영화의 분위기를 구현하는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기본적으로 필름 오페라 ‘라보엠’의 무대는 실제 파리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위치한 실내 촬영 스튜디오에 꾸며진 19세기 중후반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대학가 학생들의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파리 ‘라틴 구역(the Latin Quarter)’의 다락방과 카페 모무스(Cafe Momus)가 위치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거리, 건물벽화 작업이 이루어지던 생 미셸 광장의 모습은 모두 실내 세트장에 구성된 1840년대 보헤미안들의 세상이라 할 수 있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북적거리를 '카페 모무스(Café Momus)'에 돈 많은 후견인 알친도르와 함께 나타난 유명 가수 무제타(Musetta)를 바라보며 '로돌프'(롤란도 빌라존)는 그녀가 마르첼로(Marcello)의 헤어진 연인임을 '미미'(안나 네트렙코)에게 말해준다. 로돌포는 친구들에게 '미미'를 소개하지만 마르첼로는 사랑은 "유토피아에서의 짧은 행복"일 뿐임을 지적한다./사진=케빈앤컴퍼니

오페라 ‘라보엠’은 1896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레지오 극장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된 푸치니의 네 번째 작품이다.

18세 때 오페라의 거장 주세페 베르디의 작품 ‘아이다’에 깊은 인상을 받은 푸치니는 1884년 26세의 나이로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하고 오페라 작곡가로 데뷔한다.

밀라노의 저명한 음악출판사 ‘리코르디(Ricordi)’의 후원을 받았던 푸치니는 유명한 극단들의 투어가 잦았던 이탈리아 중북부의 고향 루카(Lucca)에서 어렸을 때부터 연극 관람을 해 온 탓에 오페라 대본인 리브레토(libretto)의 구성에 상당히 까다로웠다.

오페라 ‘라보엠’의 경우, 푸치니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리코르디가 당시 가장 재능 있는 작가로 평가받던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를 푸치니의 리브레토 작가로 고용한 후 처음 집필된 작품이다.

1830년대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뮈르제의 원작은 리브레토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일리카와 자코사에 의해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두 여주인공 미미(Mimì)와 무제타(Musetta)를 대조적인 성격의 인물로 창조하는 새로운 설정이 더해졌지만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다락방 꼭대기에 살고 있는 4명의 예술가 인물들에 있어서만큼은 원작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오페라 클래식 라이브러리’의 편집자이자 오페라 교육전문가인 버튼 피셔(Burton D. Fisher)에 따르면, 화가인 마르첼로(Marcello)와 음악가인 쇼나르(Schaunard), 철학자인 콜리네(Colline)는 모두 원작 작가인 뮈르제가 알고 지내던 실제 인물에 기초하며, 시인인 로돌포(Rodolfo)는 다름 아닌 뮈르제 자신을 그대로 반영한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시인 '로돌포'(롤란도 빌라존)로부터 장미빛 보닛을 선물로 받은 '미미'(안나 네트렙코)는 마치 "마음을 읽은 듯"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보닛을 고른 로돌포가 "사랑하는 법을 잘 알고 있는 매우 현명한 사람"일 것이라고 노래한다. /사진=케빈앤컴퍼니

하지만 ‘라보엠’은 나중에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유명해진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와 룸메이트로 다락방에서 함께 지냈던 젊은 시절의 푸치니의 모습 또한 많이 담고 있다.

피셔는 요리가 금지된 다락방에서 몰래 음식을 해먹으면서 그릇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크게 음악을 연주하던 일이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 악보를 살 돈이 없어서 푼돈을 모아야 했던 일, 빚 독촉에 시달리던 두 젊은 예술가가 우연히 길에서 채권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밀라노 시내 지도에 붉은색으로 ‘X’자를 표시해 두었던 일과 같은 에피소드가 오페라 ‘라보엠’의 젊은 예술가들의 삶에 스며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페라 ‘라보엠’ 속 예술가들은 추운 겨울에 땔감이 없어 자신이 쓴 원고를 태워 온기를 얻으려 애쓰거나 읽던 책을 전당포에 맡겨 돈을 마련하려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라 문을 닫은 사실에 화를 낼 정도로 궁핍함을 겪고 있다.

4명의 친구들 중 한 명이라도 돈이 생기면 서로 나누는 젊은 예술가들은 머리를 깎을 돈도 없고, 겨울 코트를 살 여유도 없으며, 어두운 층계를 밝혀줄 촛불도 없는 꼭대기 다락방에 살고 있다.

음악가인 쇼나르가 음식과 와인, 장작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나머지 3명의 친구들은 금방 사그라져 버리는 로돌포의 희곡 원고를 난로에 태우고 있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로베르트 도른헬름 연출은 시인 '로돌포'의 다락방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와 일들을 아래층에 살고 있는 여인 ‘미미’(안나 네트렙코)가 엿듣고 있는 것으로 설정한 장면들을 삽입한다. '미미'는 로돌포의 친구들이 모두 나간 것을 확인한 후 촛불을 일부러 끈 채 로돌포의 다락방을 방문한다./사진='라보엠' 공식 트레일러 캡쳐. 

쇼나르는 “앵무새가 죽을 때까지 피아노를 연주하라”는 영국 귀족의 무리한 요구를 앵무새에게 독이 묻은 파슬리를 먹이는 꾀를 내어 돈을 받아왔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술과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친구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힘든 시절을 위해 아껴두어야 한다면서 먹고 있는 음식을 치워버린 쇼나르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풍성함이 가득한 라틴 지구의 ‘카페 모무스’로 갈 것을 제안한다. 그 때 밀린 집세를 받기위해 집주인 브누아(Benoit)가 문을 두드린다.

4명의 예술가들은 집주인에게 와인을 권하면서 지난 밤 바(bar)에서 젊은 여인과 바람피우던 장면을 목격한 사실을 언급하며 집주인의 도덕성을 꼬집고 “품격과 높은 가치를 오염시켰다”고 비난해 위기를 모면한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의 흥미로운 점은 도른헬름이 시인 로돌포의 다락방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와 일들을 아래층에 살고 있는 자수 놓는 여인 ‘미미’가 듣고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화면은 미미가 로돌포와 마르첼로가 나누는 대화에 얼굴을 붉히거나 미소를 띠는 장면을 삽입할 뿐 아니라 3명의 친구들이 먼저 나가고 잡지사에 보낼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홀로 남겨진 순간을 인식한 후 촛불을 일부러 끈 채 로돌포의 방으로 향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파리 시내의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다락방에 살고 있는 시인 '로돌포'(롤란도 빌라존)에게 불 꺼진 촛불에 '불'을 켜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방문한 아래층 여인 '미미'(안나 네트렙코). 연출을 맡은 오스트리아 감독 로베르트 도른헬름(Robert Dornhelm)은 시와 사랑, 꿈, 미래를 노래하는 서로에게 끌리는 두 남녀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구현한다./사진=케빈앤컴퍼니

미미는 꺼진 촛불에 불을 밝히기 위해 왔다면서 방 안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갑자기 기침을 하면서 쓰러져 잠시 정신을 잃는다. 미미의 손에서 방 열쇠가 떨어지지만 당황한 로돌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미미의 아름다움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로돌포는 촛불을 일부러 꺼뜨리거나 잃어버린 방 열쇠를 찾는 척 하면서 미미의 손을 잡는다.

푸치니의 유명한 아리아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이 울려 퍼지며 화면은 서로에게 끌리는 두 남녀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구현한다.

“시와 사랑, 노래에 있어 군주와 같이 부자”이고 “꿈, 미래, 공상에 있어 백만장자와 다름없다”고 공언하는 로돌포에게 “사랑을 말하고, 봄을 노래하며, 꿈과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적 감성의 미미가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글을 쓰기 위한 영감을 떠올릴 수 없어 고심하던 시인 로돌포가 ‘희망과 꿈’을 느끼게 해 주는 아름다운 미미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들의 사랑이 결코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없다는 데 있고, 사랑에 빠진 기쁨도 잠시일 뿐 곧 지나친 사랑의 열정이 불러온 질투와 가난, 질병, 자격지심으로 인해 슬픈 이별과 비극적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있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서로를 위해 '이별'을 선언하는 두 사람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로베르트 도른헬름은 하얗게 쏟아지는 눈을 맞는 '로돌포'(롤란도 빌라존)와 '미미'(안나 네트렙코)의 모습을 아름답게 연출해 아리아 '이젠 안녕!(Addio senza rancor)'의 슬픈 분위기를 완성한다./사진='라보엠' 공식 트레일러 캡쳐. 

사실 오페라 ‘라보엠’의 작곡과 관련해 푸치니 주변 친구들의 상당한 만류가 있었다고 한다. 폐결핵으로 죽게 되는 여주인공의 설정이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똑같고, 뮈르제의 원작에 로돌포의 부유한 삼촌으로부터 미미가 떠날 것을 종용받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유사한 플롯의 작품이라는 우려가 존재했다.

게다가 오페라 초연 이후 비평가들의 냉담한 반응과 혹독한 비판에 시달렸던 푸치니의 ‘라보엠’과 달리 1897년 이탈리아의 또 다른 작곡가 루지에로 레온카발로(Ruggiero Leoncavallo)에 의해 발표된 동명의 오페라는 큰 호평을 받았다는 아픔도 존재했다.

하지만 많은 비평가들의 예언과는 다르게 당대의 관객들은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 폭발적으로 반응했고, 심지어 팔레르모 공연 당시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이 반복될 때까지 극장을 나서기를 거부했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폐결핵으로 인해 점점 몸이 약해지는 '미미'(안나 네트렙코)를 위해 부유한 귀족에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로돌포'(롤란도 빌라존)는 질투심과 자격지심, 죄의식으로 고통을 겪으며 '미미'에게 화를 낸다. 하얗게 눈이 덮인 생 미셸 광장에서 '이별'을 고하는 두 사람은 결국 따뜻한 햇살로 인해 "누구도 외롭지 않을 봄"이 올 때까지 좀 더 사랑하기로 마음 먹는다. /사진=케빈앤컴퍼니

“가슴이 미어지는 사랑 이야기”, “파토스와 감성을 자극하는 압도적인 음악”, “관능적인 서정성과 에로틱한 신비주의가 만들어내는 하모니”라는 수식어로 평가되는 오페라 ‘라보엠’이 이토록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셔는 푸치니가 계급이 높거나 영웅적인 사람들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 즉 가난함에도 자유와 꿈, 사랑과 예술을 추구하는 보헤미안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가 늘 강조해 왔던 “작은 것들(cosettine)”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평범한 서민들이 일상의 삶에서 부딪치는 딜레마, 즉 사랑을 향한 갈구와 고통, 절망과 번뇌, 기쁨과 슬픔, 불안과 공포와 같은 감정들을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음악을 통해 관객들을 쉽게 인물들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친구, 가족 혹은 과거 자신의 삶 속에서 유사한 경험을 도출해낼 수 있는 평범하고 서투른 인물들의 사랑과 고민, 헤어짐과 재결합, 경제적 불안이 가져다주는 어려움과 비극의 요소들은 오히려 현대에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지나친 질투심과 사랑으로 인해 로돌포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줄 알았던 '미미'(안나 네트렙코)는 자신이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듣게 된다. 로돌포는 친구 마르첼로에게 가난한 자신으로 인해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미미'를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는 '고통'을 토로한다./사진='라보엠' 공식 트레일러 캡쳐. 

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해 실현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오페라의 경우,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음악의 선율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잠재의식 속에서 이해되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관능”을 드러내며, 사랑의 성취와 환희에서 사랑의 실패와 죽음으로 향하는 긴장 속에 “인간 영혼의 깊숙한 곳에 도달할 수 있는 감성적 힘”을 발휘한다는 점은 오페라 ‘라보엠’의 가장 큰 성취라 할 수 있다.

한낱 “유토피아에서의 행복한 꿈”에 불과할지라도, “꿀보다 달콤한 사랑”이 한 순간 ‘독배’로 변하는 고통을 겪게 될지라도 “4월의 햇살이 비출 때까지” 이별을 유예하고 사랑의 시간을 늘리려는 가난한 연인들의 모습은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감성적인 장면들로 슬픔을 더한다.

붉은색 드레스에 장밋빛 보닛을 한 미미가 검은색 드레스에 창백한 피부로 로돌포 앞에 다시 등장하는 변화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암시한다. 도른헬름은 흑백 화면의 노란색 꽃을 강조하거나 미미와 로돌포가 이별을 고할 때 쏟아지던 눈을 잠시 멈추었다 다시 흩날리도록 설정하는 섬세한 연출을 선보인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마치 관 속에 누운 미미의 모습을 형상화하려는 듯 침대에서 잠든 채 죽음을 맞이한 미미를 비추는 카메라의 초점을 점점 멀어지게 함으로써 검은 화면에 작은 점처럼 남겨진 강렬한 이미지를 관객들의 머릿속에 심는다.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 사진=케빈앤컴퍼니
필름 오페라 '라보엠' 장면.'죽음'의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로돌포에게 돌아온 '미미'(안나 네트렙코). 로베르트 도른헬름은 죽어가는 '미미'(안나 네트렙코)가 로돌프에게 '사랑'을 노래하고 키스하는 장면을 '흑백 장면'으로 연출함과 동시에 소프라노의 입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노래'만 들리도록 설정한다. 이는 감정의 크기가 맥시멈에 다다랐을 때 소프라노의 입술이  다시 움직이면서 '컬러 화면'이 돌아오기 때문에 도른헬름의 표현대로 "매우 강렬한 드라마의 효과를 완성"하게 된다./사진='라보엠' 공식 트레일러 캡쳐.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사랑은 우리의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으며,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말처럼 “사랑은 영혼을 조정하고,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지배한다.” 그리고 ‘에로스의 종말’의 저자 한병철의 주장처럼 “둘의 무대”인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하도록 돕는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서 미미의 마지막 외침인 “당신은 내 사랑, 내 삶 그 자체에요!”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도는 이유는 비록 비극이라 할지라도 그런 꿈같은 사랑의 필요를 느끼는 인간의 감성,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닐까? 1월 8일까지 메가박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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