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의 별들의 고향] 신성일과 40여년 교유 노(老)기자의 비망록
[김두호의 별들의 고향] 신성일과 40여년 교유 노(老)기자의 비망록
  • 김두호
  • 승인 201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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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 “꼭 간다”
-배우 신성일과 인간 강신성일의 진면목
-신성일 별세 오보 해프닝의 뒷이야기
지금은 고인이 된 '톱스타'의 원조 신성일 배우와 함께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은 고인이 된 신성일 배우는 필자와 긴 세월을 두고 만나며 ‘형님, 아우’하며 형제처럼 정을 나눴다. 그는 분명하고 솔직하고 자존심 강하고 언행에서도 강단이 있었다. 항상 멋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비굴한 것을 싫어하고 사나이다운 기백을 잃지 않았던 배우였다. ⓒ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영화평론가] 2018년 11월 6일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에 활동한 ‘톱스타’의 원조 신성일(1937∼2018)은 몇 줌의 재가 되어 만년의 거처로 삼았던 경북 영천시 근교의 자택 ‘성일가’(星一家) 잔디밭 정원으로 돌아갔다. ‘배우의 신화, 신성일 여기 잠들다’를 비문으로 새겨 얹어놓은 사각의 작고 차가운 대리석 밑에 홀로 잠들었다.

스스로 ‘성일가’로 명명한 산자락 밑의 집 한 채는 생전에 주인이 직접 강원도에서 실어 온 주문 목재로 공들여 지은 한옥이다. 마루 밑에는 아주 작은 연못도 있다. 몇 번 그 집을 방문한 기자가 이건 왜 이곳에 만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내 사주에 오행중 수(水) 없어 기복이 많으니 물을 가까이 두면 좋다 해서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기자와 긴 세월을 두고 만나며 ‘형님, 아우’하며 형제처럼 정을 나누는 동안 신성일이라는 인물이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는 매사에 소신이 분명하고 솔직하고 자존심 강하고 언행에서도 강단이 있었다. 그는 항상 멋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비굴한 것을 싫어하고 사나이다운 기백을 잃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만년에 보여준 성격 변화의 일면은 아마도 영화배우로 최장기 최고의 인기를 풍미하며 살았던 화려한 과거가 지나가고 한 때 정치 쪽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서 겪은 시련들이 사주팔자를 믿는 마음 여린 남자로 만든 것으로 짐작했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알 수 없는 운명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그는 남은 인생이 평화롭기를 그 작은 연못을 통해 기구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한국영화 인물사(人物史)에서 영화배우로 은막을 통해 관객들에게 꿈과 사랑을 전파하며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린 신성일이지만 마지막 그가 떠나는 시간과 장소는 평범한 보통사람의 작별과 차이가 없었다. 한동안 입원한 전남 화순의 요양병원에서 인접한 전남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이동했을 때 확인을 못한 일부 매체에서 성급하게 별세 오보기사를 쏟아내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다음날 새벽 결국 그는 떠났다.

기자는 신성일의 강건한 정신력을 아버지 곁에서 간병생활을 하고 임종을 지켜본 사랑하는 외아들 강석현(영화배우)을 통해 유언으로 남긴 말을 전해 듣고 새삼 절감했다.

의식을 잃지 않았을 때 스스로의 병세를 자각하고 “꼭 (김두호에게) 연락해 행사에 참석 못할 것 같다고 전화하라는 말씀이 있었다”는 말을 아들이 기자에게 전해준 것이 별세 하루 전날인 11월 3일 낮이다.

기자는 불과 5일 전 쯤 “꼭 참석할테니 걱정마라”라는 전화를 해준 아버지에게 지금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고, 아들은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실 것 같지 않다는 황망한 상황을 전해왔다. 신성일이 꼭 참석키로 한 행사는 기자가 임원으로 주관하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주최 ‘제8회 아름다운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 시상식 행사였다.

9일 오후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식에 4일 오전 타계한 배우 신성일을 대신해 엄앵란 여사와 아들이자 영화배우 출신 강석현씨가 공로예술인부문 시상식에 참석했다./사진=신영균예술문화재단
9일 오후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식에 4일 오전 타계한 배우 신성일을 대신해 엄앵란 여사와 아들이자 영화배우 강석현씨가 공로예술인부문 시상식에 참석했다./사진=신영균예술문화재단

타계 닷새 후인 11월 9일 서울 명보아트홀에서 개최된 이날 시상식에서 수상자의 상패와 시상금은 부인 엄앵란 여사와 함께 참석한 큰 딸 경아, 아들 석현 가족들에게 따뜻한 기립박수 속에서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기자가 아들로부터 전화를 받은 3일 낮 오후 갑자기 부고 뉴스가 나왔을 때 즉시 아들에게 오보임을 확인해 인터뷰365가 처음으로 생존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결국 하루 뒤 4일 새벽 2시 25분 임종 연락을 받았고 다시 인터뷰365에서 별세 소식을 처음으로 보도한 것이 ‘영화배우와 기자’관계로 이어온 40여년의 인연도 마침표를 찍는 시간이 되었다.

기자는 신성일 영화인장 추진위원회에서 홍보위원장을 맡아 3일간 현대아산병원 신성일 영화배우 빈소를 지키며 정을 남기고 몸만 떠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에서 고인의 생애를 요약한 약력을 보고한 것이 기자의 마지막 역할이었다.

필자는 신성일 배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에서 고인의 생애를 요약한 약력을 보고한 것이 그를 위한 필자의 마지막 역할이었다.ⓒ인터뷰365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진행된 고 신성일 영결식/사진=박상훈 기자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진행된 고 신성일 배우의 영결식 현장에서.ⓒ인터뷰365

빈소를 찾은 문화예술인들과 정치인을 비롯해 식사 그릇을 비우고 간 각계 문상객이 1000여 명이 넘었다. 멀리 지방에서 온 무명의 올드팬들도 있었다.

극적인 장면은 양재동 서울추모공원에서 고인의 뒤를 휠체어에 의지해 뒤따르는 아내(엄앵란)가 마지막 작별의 순간을 맞이할 때 어디선가 흘러나온 구슬픈 섹소폰 연주 음악이었다. 적멸과 이승의 경계선에서 작별을 나누는 엄숙한 공간을 잔잔하게 흔들어 놓으며 섹스폰을 불어 준 노신사도 지방 어디선가에서 온 고인의 흘러간 올드팬이었다.

걷는 것이 불편해 이동에 고통이 따르는 엄앵란은 거리가 먼 지방 병원에 입원중인 부군 곁을 지키지 못했다. 의식을 잃지 않았을 때 아들(강석현)과 둘째 딸(강수화)이 아버지 신성일에게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6일 故 배우 신성일을 떠나보내며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엄앵란 여사/사진=인터뷰365 영상 캡쳐<br>
6일 故 배우 신성일을 떠나보내며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엄앵란 여사ⓒ인터뷰365

그는 딱 두 마디를 전하게 했다. “고생했다고 그래(그래라), 미안하다고 그래”라는 라는 말을 또렷하게 남겼다. 비록 두 마디였지만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엄앵란을 빈소에서 만났을 때 그 한마디로 맺힌 한을 쓸어낸 듯이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타계하기 불과 한 달 전만해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씩씩하게 밟고 걸으면서 박수갈채를 받았던 신성일은 결국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의 말기 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떠났다.

신성일이 생전에 마음을 두고 친교(親交)를 나눈 마지막 모임이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말을 줄여서 ‘영사모’라고 부른 모임이다. 회원은 기자를 포함해 신성일이 지명해서 참여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립 멤버인 김종원, 영화연구가인 정종화, 1960년대 영화기자인 소설가 한보영, 조선일보에서 한 때 영화기자로 활동하고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한 정중헌 씨 등 6명이다.

지난해 영천 성일가에서 팔순 잔치를 맞이한 신성일 원로 배우는 경북고 동문 친구들과 서울에서 영사모 회원만을 초청했다. 영사모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임’ 또는 ‘영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모임’의 이름으로 발족된 소수의 모임이다. 사진 왼쪽부터 필자, 정중헌 평론가, 신성일 한보영 평론가, 정종화 영화연구가.
2016년 영천 성일가에서 팔순 잔치를 맞이했을 당시 신성일 배우는 경북고 동문 친구들과 서울에서 영사모 회원만을 초청했다. 영사모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임’의 이름으로 발족된 소수의 모임이다. 사진 왼쪽부터 필자, 정중헌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 신성일 배우, 한보영 평론가, 정종화 영화연구가. ⓒ인터뷰365
지난해 영천 성일가에서 팔순 잔치를 맞이한 신성일 원로 배우는 경북고 동문 친구들과 서울에서 영사모 회원만을 초청했다. 영사모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임’ 또는 ‘영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모임’의 이름으로 발족된 소수의 모임이다. 사진 왼쪽부터 필자, 정중헌 평론가, 신성일 한보영 평론가, 정종화 영화연구가.
배우 신성일은 투병 중에도 지난해 8월 건강한 모습으로 무교동의 한 식당에서 '영사모'와 함께 오찬을 함께 했다. 사진 왼쪽부터 필자, 김종원 영화평론가, 정종화 영화연구가, 신성일 배우, 정중헌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 한보영 평론가. ⓒ인터뷰365
필자를 포함한 '영사모' 회원들과 함께 한 배우 신성일 ⓒ인터뷰365

창립자인 신성일은 가끔 그의 수십 년 단골집인 무교동의 부민옥과 충무로의 진고개에서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모두 한국영화와 신성일의 내력을 꿰고 있는 사람들이라 만나면 술잔을 나누며 지나간 충무로시대의 이면사를 쏟아냈다. 아마도 영사모 회원들을 만나면 외로움과 쌓인 회포를 풀 수 있어서 그에게는 소중한 모임이었던 것 같다. 그가 2년전 자신의 팔순잔치를 영천 성일가에서 마련했을 때 초청한 사람도 경북고 시절 동기들과 영사모 회원 뿐이었다.

신성일은 2000년 대구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을 당시 기자에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난 기자 체질이지 정치와 거리가 멀다"고 거절하자 "그럼 당신 같은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하여 기자가 추천해 준 지인을 보좌관으로 채용한 일화도 있다.  

신성일과 기자가 ‘배우와 기자’라는 직업관계를 떠나 40여년을 두고 가족처럼 인연을 나누게 된 것은 기자가 1985년 6월 서울신문사에서 창간한 스포츠서울에 재직할 때 그의 회고록을 연재한 것이 동기가 됐다. 당시 스포츠서울은 영화배우와 탤런트, 가수와 개그맨 등 연예인들의 자전적 스토리를 ‘스타고백’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해 독자들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모았다.

국내 최초 가로쓰기 신문에 컬러신문을 표방하고 창간된 스포츠서울이 100만부 일간지로 대박을 터뜨린 시기의 초입에 신성일의 스타고백을 시작했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회고록을 내가 맨 처음 쓰려하니 기회를 달라고 요청을 해 두었는데 마침 신성일은 서울마포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낙선해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야말로 주연 출연 작품만 507편을 기록하며 신화에 가까운 인기를 누린 톱스타 신성일의 일대기가 기자의 손으로 넘어오면서 한사람 당 2∼3회 정도 연재했던 스타고백 시리즈를 무제한의 연재로 바꾸었다. 대하장강(大河長江)의 자서전을 시작하면서 기자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동부이촌동 아파트를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며 고백을 기록했다.

과거 한 방송에서 엄앵란 여사와 함께 출연했던 필자
저자는 신성일 영화인장 추진위원회에서 홍보위원장을 맡아 3일간 현대아산병원 신성일 영화배우 빈소를 지키며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빈소에서 신성일 배우의 부인 엄앵란 여사와 함께 ⓒ인터뷰365

놀랍게도 3개월이 넘는 연재를 하면서 그야말로 엄앵란과 결혼 전후의 비화에서 적나라한 외도 러브스토리까지 처음으로 공개되어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나타났고 한동안 전국적으로 화제 거리가 됐다. 인쇄 업무에 종사하는 신문사 내 직원들부터 원고 독촉을 해올 정도였다.

두 달 쯤 연재가 이어지던 어느 날 대구에서 당시 음식점을 운영하던 엄앵란이 장문의 육필편지를 기자에게 보내왔다. 요지는 사생활 부문의 노골적인 고백으로 가족들이 견디기 힘드니 제발 신성일의 스타고백을 중단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신성일은 감추는 비굴함과 솔직하지 못한 처신이 스스로에게 더 부끄러운 행위라며 고백을 이어갔다.

당시 그는 장모인 원로배우 노재신 여사를 모시고 살았고 빈번하게 찾아가 사생활을 접하는 동안 본의 아니게 돌발적인 사건도 목격했다. 늦은 오후 함께 얘기를 나눌 때 다소 거칠게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뛰어 들어와 느닷없이 주인의 멱살을 잡아 싸움판이 벌어진 일이 지금도 충격적으로 기억된다.

선거전에서 차용한 빚을 받기 위해 채권자가 아마도 대리인을 보내 협박해온 사태 같았다. 그 후 신성일은 곧잘 “보여주지 말아야할 것까지 다본 사람”으로, 또 “내 살아온 발자국 수까지 알고 있는 사람”으로 기자를 소개할 때가 있었다.

인간 신성일의 매력 중에 기자가 곧잘 감동하는 부문은 챙겨야 할 의리나 예의는 철저하게 지킨다는 점이다. 경조사가 있을 때 그는 잠시 얼굴만 비쳐주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혼주나 상주의 가까이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할애하는 미덕을 실천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기자의 가족 혼사 때 처음부터 끝까지 식장 앞자리에 앉아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영화배우와 기자. 40여년을 두고 변함없이 정을 나누며 살던 신성일 영화배우는 의사가 포기한 중병을 안고 살았지만 한 번도 환자의 기색을 보여주지 않고 당당하게 1년을 살고 어느 날 갑자기 떠났다.

그의 못다 쓴 회고록을 노(老)기자는 다음 세상에서 쓰겠다는 약속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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