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의 별들의 고향] 필자가 만난 추억 속의 남매 가수 '현이와 덕이'
[김두호의 별들의 고향] 필자가 만난 추억 속의 남매 가수 '현이와 덕이'
  • 김두호
  • 승인 2018.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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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정일의 애창곡 '뒤늦은 후회' 가수 최진희가 열창해
-인기 검색어로 떠오른 천재 소녀의 눈물젖은 생애
남매 듀엣 '현이와 덕이'의 다정했던 모습 

[인터뷰365 김두호 기자] 못다 핀 꿈과 사랑과 노래, 슬픔으로 가득 찬 짧은 생애를 내려놓고 29살에 하늘로 떠난 싱어송라이터의 원조, 천재 가수 덕이의 노래와 이름이 갑자기 인터넷 검색창의 윗자리를 오르내려 시선을 모으고 있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190여명으로 구성된 남한의 예술단들이 평양에서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공연을 하고 돌아왔다. 무대에 오른 가수 중 최진희가 열창한 노래가 고(故) 덕이의 발표곡 <뒤늦은 후회>였고, 그 노래는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이었다는 이면 사연이 작용해 화제에 오른 것 같다.

필자는 덕이(1961∼1990 본명 장덕)와 그의 오빠 현이(1956∼1990 본명 장현)가 1970년대 '현이와 덕이'라는 남매 듀엣으로 공연활동을 할 때부터 만나고 지켜보고 기사를 썼고 그들의 어머니 이숙희 여사(서양화가)와는 두 남매가 떠난 뒤에도 꾸준히 만나 필자가 재직했던 서울신문사 발행 스포츠서울에 수기를 연재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창밖에 내리는 빗물소리에 마음이 외로워져요.

지금 내 곁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으니까요.

거리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슬픔이 밀려와요···

<뒤늦은 후회>의 노랫말이 그리움과 외로움의 애잔한 심경을 담고 있는데 덕이가 작사·작곡하고 오빠 현이와 부른 노래들이 대부분 꿈꾸는 소녀의 그리움과 외롭고 애잔한 심경을 드러낸 내용이 많다.

14살에 '꼬마인형'을 부르며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로 가요무대에 등장한 덕이와 현이의 이야기를 빛바랜 필자의 취재기록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 보았다.

 


<꼬마인형> <순진한 아이> <소녀와 가로등>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더욱 큰 사랑>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등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히트한 그 곡들이 현이와 덕이가 부른 노래들이다.

두 남매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들은 귀엽고 발랄한 듀엣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오누이는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그림처럼 웃는 얼굴로 우애를 나누며 노래와 함께 살았다. 오빠도 누이동생도 얼굴이나 마음씨가 달처럼 모나지 않고 둥글었고 나이가 들어도 소년 소녀처럼 티 없이 귀엽고 밝았다.

아버지는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화가였다. 남매는 음악적 소질을 타고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오빠 현이는 바이올린을, 덕이는 피아노를 치며 자랐다.

클래식 음악광인 화가 어머니는 첼리스트인 남편과 두 남매를 묶어 아름다운 가족 연주트리오를 만들어 주려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부모는 종교적 정신적 불화를 해소하지 못하고 현이 덕이가 한창 성장할 무렵 헤어졌다. 그것이 그들 가족 모두에게 비켜날 수 없는 운명적인 가족해체의 슬픔과 불운의 서곡이었다. 어머니는 트리오 음악가족의 꿈을 잃었지만 1975년 현이와 덕이 남매가 듀엣이 되어 가요무대의 아이돌로 눈부시게 부상하는 것으로 새로운 꿈을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꿈과 행복은 어느 한해 참혹한 절망을 엄마의 가슴에 남겨놓고 한꺼번에 날아갔다. 남매는 활짝 핀 젊은 나이에 6개월 간격으로 덧없이 하늘로 떠났다.

오빠 현이는 1990년 34살에 암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동생 덕이는 그 해 봄이 올 무렵 여섯 달 앞서 오빠의 시한부 삶을 곁에서 바라보며 좌절과 방황에 빠져 있다가 약물 중독으로 먼저 눈을 감았다. 의문을 남겼지만 스스로 생명을 저버린 것으로 보였다.

필자는 두 남매와 함께 어머니 이숙희 화백의 인터뷰 기사를 이따금 쓸 기회가 있었다. 1990년 8월 아들 현의 장례식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통곡의 수기를 필자에게 보내온 바 있다. 당시 스포츠서울에 게재했던 엄마의 눈물에 젖은 삶의 기록들은 한동안 많은 신문독자와 음악팬들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때 수기의 첫머리는 어린 딸 덕이가 엄마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던 추억으로 시작된다. 덕이는 어릴 때 호들갑을 떨며 꽃을 달아주다가 실수로 엄마의 가슴을 옷핀으로 찔렀다. 엄마가 "아얏!"하고 소리치자 덕이는 "엄마 많이 아파? 미안, 사랑은 아픈거래.'라고 속삭였다. 어린 딸의 어른스런 그 한마디를 두고 엄마는 다음같이 적었다.

"덕이도 현이도 조숙한 아이였다.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이 덕이의 머릿속에서 사랑의 정체가 흘러나왔다. 나는 육십이 다되어 사랑을 조금씩 파악해 가고 있는데 나보다 절반도 못 살고 떠난 덕이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게 부족하면 사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알고 있었다."

현이와 덕이가 남매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곳은 75년 4월 미8군 무대였다. 최희준, 윤복희, 패티김이 노래하던 무대에서 19살 현이와 14살 덕이가 부른 노래는 덕이가 작곡한 <투 비 어 차일드 어게인>이란 노래였다. 처음에는 <드래건 네츠 (어린용들)>이란 듀엣 예명을 달았으나 TV출연을 시작하면서 <현이와 덕이>로 바꾸었다. 덕이는 데뷔시절부터 천재 음악소녀로 평가받았다. <꼬마 인형> <일기장> <순진한 아이> 등 초기 히트곡은 모두 덕이가 14살 때 작사 작곡하고 현이와 함께 기타를 치며 발표한 노래였다. 

'조용한 밤이었어요. 너무나 조용했어요. 창가에 소녀 혼자서 외로이 서 있었지요. 밤하늘을 바라 보았죠. 별 하나 없는 하늘을, 그리곤 울어버렸죠. 아무도 모르게요. 창밖의 가로등불은 내 맘을 알고 있을까. 괜시리 슬퍼지는 이 밤에 창백한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 밤에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

<현이와 덕이>의 히트곡 <소녀와 가로등>은 덕이가 창밖의 가로등을 바라보며 순간적인 감정을 가사로 옮긴 노랬였다. 가족이 흩어져 살 때 엄마 집에 잠시 머물러 있던 덕이는 그 노래말을 만든 날 밤 실제 외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뺨에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고 어머니는 전했다. 현이와 덕이는 방송사의 10대 가수로 선정되고 국제음악제에서도 빛을 발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한 덕이의 방황은 틈틈이 문제를 야기했다. 

 

1979년 덕이가 안양예고를 졸업한 직후인 18살 때였다. 불길한 소문들이 나돌 때 그녀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면서 깜짝 놀랄만한 고백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 때 였다. 그녀는 결혼한 오빠 집에 얼마간 살다가 월셋방을 얻어 혼자 살고 있었다.

"외로울 때는 죽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아요. 엄마가 떠난 후 도봉산에 있는 절에서도 아버지와 세 가족이 한 1년을 살았어요. 구파발에서 살 때는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외딴 흉가에서도 살고 그러다가 새 엄마가 들어왔지만 언제나 외로웠어요. 도봉산에 살 때 음독 자살을 기도 했고 며칠 전에는 동맥을 끊었지만 죽지 않았어요. 죽기로 하고 자살하려했던 게 세 번이죠."

싱어송라이터로 가요무대에서 비중 있게 설자리를 차지했던 덕이의 화려한 시선 뒷전에 고독으로 찌던 죽음의 그림자가 늘 함께 하고 있었다. 덕이의 소식을 들은 미국의 어머니가 1980년 간곡하게 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중매로 만난 동포 젊은이와 내슈빌에 있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행복은 잠시 그녀 곁에 머물다가 떠나버렸다. 서로 화합을 하지 못하고 쉽게 헤어진 덕이는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돌아왔다.

덕이가 떠난 것은 1990년 먼 산자락의 눈이 녹는 2월이었다. 동생 덕이를 보내고 설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현이도 경기도 성남에 있는 병원에서 짧은 생을 접었다. 불행한 환경을 애써 감추고 웃음과 꿈과 밝은 노래를 선물하던 오누이는 그렇게 6개월 사이에 하늘로 떠났다.

 

김두호

인터뷰 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기자, 스포츠서울 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전무이사를 지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