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뜻밖의 대어'를 만나다...박력넘쳤던 연극 '세기의 사나이'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뜻밖의 대어'를 만나다...박력넘쳤던 연극 '세기의 사나이'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9.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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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호 작, 최원종 연출의 '세기의 사나이'...한 편의 만화책을 보듯 다양한 미장셴 구사
-균형잡힌 역사관으로 현대사 조명...지난 100년 역사를 민초의 삶으로 그려내
사진=극단 명작옥수수밭
연극 '세기의 사나이' 콘셉트 컷/사진=극단 명작옥수수밭

[인터뷰365 정중헌 칼럼니스트] 연극계의 신선한 반란. 그들의 연극은 젊고 재미있다. 기성 연극과 다른 형식을 시도해 싱싱하고 박력이 넘쳤다. 역사극, 시대극이면서 사관(史觀)이 올곧고 이해가 쉬웠다.

무슨 연극 이길래 이리 칭찬하는 것일까? 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2월 22일~3월 3일)한 차근호 작, 최원종 연출의 '세기의 사나이'가 그 대단한 작품이다.

올해가 3.1만세운동 100주년. 연극계에서 아무런 조명과 이벤트 없이 넘기나 우려했는데 극작가 노경식 선생님의 배려로 뜻밖의 대어를 만났다.

'세기의 사나이'는 지난 100년 우리가 잊고 살았던 역사를 민초의 삶으로 그려낸 작가 차근호의 발상과 구성이 재밌고 역사관이 균형감을 지녔다. 이 싱싱한 활어를 최원종 연출은 관객이 먹기 좋게 요리했다. 무대에서 관객들이 한 편의 만화책을 보듯이 스피디하면서도 다양한 미장셴을 구사한 것이다.

정지된 만화가 아니라 만화 속 인물이 튀어나와 연기하고 때로는 한 시대의 역사적 순간을 정사진으로 고정시킨다. 만화와 다르고 영화와 다른 것은 배우들의 라이브 연기가 살아 숨쉬고 관객과 함께 호흡하기 때문이다.

김동현의 연기가 이 작품을 역동적으로 살려냈고, 개성을 살린 오민석 이갑선의 연기가 삼각 편대를 이뤄 시대의 인물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 필연과 우연을 사실감 넘치게 각인시켰다.

여기에 스태프들의 꼼꼼한 열정이 시대극의 묘미와 생활의 변천사를 살려냈다. 조성훈의 만화를 최종찬이 영상으로 변주했고, 연인원 1백 여 명의 인물을 김민경의 의상이 뒷받침 해주었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밭
연극 '세기의 사나이' 공연장면/사진=극단 명작옥수수밭

심플한 무대를 디자인한 심채선, 변화무쌍의 장면들을 조명으로 건축한 성미림, 라이브를 곁들인 김동욱의 음악, 석수정의 안무, 박현이의 소품도 움직이는 만화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들은 아직 연극동네에서 익숙한 이름들은 아니나, 오히려 그 점이 미래의 가능성에 기대를 갖게 한다.

젊은 세대 작가와 연출, 스태프들의 협업이 이룬 이번 성과가 앞으로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섬싱뉴'(something new)가 있는 작품으로 이어져 연극의 지평을 넓혀주기를 기대한다.

창작이라고 하지만 100% 창작은 불가능하다. '세기의 사나이'를 쓴 차근호 작가와 연출한 최원종은 수많은 콘텐츠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재구성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본다.

수많은 작품을 오마주하고 수많은 장면을 패러디 하는 솜씨가 뛰어나 찾아보고 견주는 재미가 쏠쏠했다.

공연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작품이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알란 칼손은 20세기 현대사의 주요사건에 개입한다.

'세기의 사나이'에서 주인공 박덕배(김동현)는 25살 청년시절 3.1만세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왜경의 총에 맞아 죽지만 저승사자의 도움으로 100년의 삶을 약속받아 역사의 현장에 민초로 서게 된다.

사진=극단 명작옥수수밭
연극 '세기의 사나이' 공연장면/사진=극단 명작옥수수밭

그는 김구, 윤봉길에서 안창남에 이르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을 만나고, 홋카이도의 탄광에 징용 당한 광부가 되기도 하고 남양군도의 패잔병이 되기도 한다.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천국에서의 5월'이 당선되어 등단한 차근호 작가는 '조선제왕신위'로 2000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실력파 유망 작가다. 그는 지난 한 세기를 조명한 이 작품에서 역사적 사건의 나열보다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주인공 박덕배는 우리가 잊었던,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을 재연하기 위해 시공을 초월한 만화적 인물로 설정되었다. 우리의 현대사는 일제 식민통치, 상해 임시정부, 해방, 동족상잔의 6.25전쟁으로 얼룩져있지만 2019년 우리는 그 질곡을 딛고 그 시대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에서 가장 심한 상흔이 좌와 우의 대립 구도인데 차근호 작가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역사관으로 현대사를 조명했고, 수많은 사건을 다루면서 연도 등을 정확히 기술했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 공연장면/사진=극단 명작옥수수밭

지난해 서울연극인대상에서 '블루하츠'로 젊은연극인상을 수상한 최원종 연출은 이번 창작산실 작품에서 독특한 무대기법을 활용했다. 무대 위의 인물들이 만화 영상과 치밀하게 어우러지는 장면들을 연출해낸 것이다.

연출이 의도한 이런 무대기법은 관객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역사에 더 쉽게 다가가는 장치가 된다. 라스트에서 역사적 인물로 분장한 배우들이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은 연극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사실 같은 연출이 아닐 수 없다.

2시간 동안 공연을 보면서 23명에 이르는 배우들이 연습을 참 많이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십 개로 이뤄진 장면들을 한 치의 허점이나 오차 없이 맞춰내기란 쉽지 않은데 이들은 일사불란한 앙상블로 당시의 현장을 살려냈다. 오히려 진행이 너무 매끄러워 졸음이 올 정도였다.

한 세기 역사를 다룬 창작 초연에서 주인공을 맡은 김동현 오민석 이갑선 트리오는 연기 호흡도 잘 맞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캐릭터를 개성 넘치는 인물로 소화해냈다. 특히 친일파의 아들과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오민석 이갑선을 병치시킨 것은 재밌는 설정이었다.

민초 박덕배로 역사적 현장을 누빈 김동현 배우의 역사의 질곡을 헤치는 연기는 유연했고, 표정과 연기가 민초의 모습을 잘 살려냈다.

젊은 세대들이 만들어낸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세기의 사나이'는 당국의 지원금이 모처럼 효과를 발휘한 케이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만든 배우와 스탭들은 상을 받을만 하다. 또한 이 작품은 한 번 지원으로 막을 내릴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관객 특히 젊은 세대들이 볼 수 있도록 장기 재공연을 제안하고 싶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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