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들의 쓸쓸한 삶에 따뜻한 빛 비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극단 여인극장은 한국 여성 연출가 1호로 꼽히는 강유정(1932~2005) 선생이 1966년 창단한 59년 역사의 극단이다.
생전의 강유정 대표는 억척스러울 만큼 다양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공연했고, 대한민국연극제와 동아연극상 등에서 수상하는 등, 동인제 시대의 굴지의 극단이었고 연극사에 남을 업적을 남겼다.
2005년부터 극단 여인극장은 김경애 대표가 이끌어 왔다. 그간 청소년 뮤지컬로 전국 순회공연을 펼쳐오다가 이번에 김 대표의 3남인 이창호 작가가 쓰고 연출한 ‘실버 라이팅’으로 조촐하지만 속이 꽉 찬 성인극으로 대학로 연극동네에 신고를 한 것이다.
극단 여인극장의 이 같은 부활은 극단을 지켜온 터줏대감 같은 배우들이 힘을 합쳤기에 가능했다.
필자는 10월 25일 대학로연극인광장 회원들과 함께 ‘실버 라이팅’을 관람하며 강유정 대표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고, 어려운 여건에서 20년간 극단을 이끌어 온 김경애 대표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출연 배우들 면면이 낯이 익고 정경운 것은 그들이 강유정 대표 시절부터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 온 여인극장 식구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솔직히 대연장의 이 작품 단관에 필자는 명단을 올리지 않았다. 좀 생경한데다 제목도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열 번이면 열 번 다 “여인극장 대표, 탤런트 가수 김경애”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김경애 대표의 집요한(?) 청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큰 기대 없이 극장에 왔는데 예상했던 대로 초반부에 노인 대상으로 물건 파는 생쇼가 펼쳐져 공연장이 장터를 방불케 했다.
“이게 뭔 연극인가?” 하려고 했는데, 조금씩 진정성이 느껴지면서 극에 몰입하게 되었다.
바로 필자 같은 시니어세대들이 여차하면 당할 수 있는 사기 판매의 실상을 가족극 형태로 다룬 연극이었다. 극본이 관객들의 실생활에 밀착되어 실감을 줄 뿐 아니라, 왕년의 내로라 하던 배우들의 연기가 겉멋을 뺀 진솔한 속살을 보이면서 극에 빨려들었다.
세 명의 할머니(큰이 장희진, 작은이 김경애, 막둥이 조영화)는 김과장(오상원), 이과장(김정환), 우씨(문회원), 박부장(장두이)의 사기술에 당해 약이며 장판이며 침대까지 온갖 물품 구매도 모자라 연체 이자까지 무는 신세가 돼버렸다. 막둥이 딸 순이는 엄마와 이모들을 다그치고, 작은이 아들 철수(한상훈)도 엄마를 욱박지른다.
형사인 철수가 막판에 일당을 체포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소재가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생활 밀착형인데다 연출의 의도가 사기극보다는 노인들의 외로움과 소외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실버 세대들이 볼만한 가족드라마로 손색이 없었다.
이창호 연출은 “단순한 사기 피해를 넘어,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는 인간 본연의 외로움에 따듯한 빛을 비추고 싶었다”고 했다.
자식들이 사기극에 말려드는 엄마들을 몰아붙이자, 세 할머니는 “외로워서 그랬다”고 항변하는 대목에선 가슴이 찡하게 아팠다.
어찌 보면 드라마의 연극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같은 생활극을 시간(러닝 타임 105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본 것은 소재와 구성뿐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가 실생활처럼 친근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오래 무대에 선 배우들에게는 이상한 ‘쪼’나 ‘투’가 있는데, 이 공연에서는 배우들의 그런 구투나 겉멋을 거둬내 대사가 자연스러웠고 관극이 편했다.
이 연극의 핵심을 이루는 세 할머니의 연기 합이 잘 맞았고 사투리 구사까지 구수하게 와닿았다.
큰이 역을 맡은 장희진 배우는 대연장 회원으로 80대도 무대에서 건재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강원도가 고향이라는 장 배우는 전라도 사투리까지 자연스럽게 해내며, 미국에서 살다 온 점잖은 할머니 캐릭터를 맏언니답게 잘 해냈다.
작은이 역을 맡은 김경애 배우는 성질이 급해 좀 나대는 캐릭터를 설정해 냉온탕을 오가는 감정 연기를 펼쳐 트리오의 중심 역할을 해냈다.
막둥이 역 조영화 배우는 튀는 언니들이 나대는 것을 잡아주면서 앙상블을 이루게 하는 현실적 캐릭터를 막내답게 밉지 않게 보여주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눈길을 끈 배우는 박부장 역의 장두이 배우였다.
필자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그의 활동을 지켜보았는데 그는 세계적 배우로서 손색이 없는 재능과 열정을 지녔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귀국 후 여러 작품의 배역을 보면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이번 ‘실버 라이팅’의 사기꾼 역할 연기를 보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고 깔끔한 장두이의 진면목을 보았다. 극 속의 희비극적인 캐릭터를 조미료 없이 순수하게 해낸 것이다.
관록 있는 문회원 배우와 여장을 하고 나와 여인극장 전성기를 누렸던 진솔한 연기를 보여준 김정환 배우가 옛 추억을 소환해 주었다면 여인극장의 유망주들인 철수 역 한상훈 배우와 김과장 역 오상원 배우가 극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가장 젊은 이연우 배우는 요즘 세대를 상징하는 순이 역을 상큼하게 연기했다.
황혼 세대에게 한 줄기 빛을 던진 극단 여인극장의 ‘실버 라이팅’은 전국의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순회 공연해도 좋을 소재와 탄탄한 연기진을 갖춘 웰메이드 실버연극이었다.
-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