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처럼 투 톱으로 전개되는 롤 플레이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12월 7일까지 씨어터 쿰에서 공연하는 극단 이구아구의 국민성 작, 정재호 연출 ‘인형의 가(家)’는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이 중심인물이지만 전기극(傳記劇)의 틀을 깨고 희곡과 연출에서 독자적인 메소드로 서사를 풀어나가 재미를 살렸다.
이 작품의 매력은 신작의 신선한 아우라가 풍긴다는 것이다.
실제 조현동 작가의 한국화 작품을 건 전시장에서 연극이 공연되어 화가의 이야기에 실감을 더했고, 2중 구조의 무대에서 따로 또 같이 펼쳐지는 극의 전개 방식도 흥미를 갖게 했다.
여기에 양쪽 무대의 주역들인 나혜석 역 임은연 배우와 장민호 역 주호성 배우의 연기가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이겨내려는 몸부림, 미치광이처럼 보일 만큼 상처가 깊은 내적 연기를 두 배우가 혼신을 다해 뿜어내 극장 안을 뜨겁게 달구었다.
나혜석을 다룬 연극을 본 적이 있는데 일대기를 따라가는 전기극 형식이었고, 행려병자로 죽을 정도의 비참한 말년에 비중을 두어 의미는 컸지만 재미는 적었다.
필자도 화가 천경자의 삶과 예술을 그린 ‘슬픈 전설의 화가’ 희곡을 썼지만, 전기극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강영걸 연출이 마당극 형식으로 풀어내 멋지게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인형의 가’는 국민성 작가가 나혜석 일대기에 매이지 않고 극성(劇性)을 살려내 희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한 인물의 생을 다른 인물의 상처(트라우마)를 통해 조명하는 형식을 취해 무엇보다 신작다운 선도가 높았다.
정재호 연출 또한 “새 술은 새 부대에”에 맞게 신작에 어울리는 형식과 함께 투 톱 전술을 구사했다. 두 개의 무대, 장민호와 나혜석의 무대를 운영하면서 주호성과 임은연 배우의 연기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전법을 쓴 것이다.
나혜석을 조명하기 위해 남편 김우영과 오빠 나경석, 애인 최승구 최린, 일엽 스님, 목사 등 주변 인물들을 끈끈하게 엮었다. 장민호가 주축인 무대에는 제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상인이 받쳐주었다. 연출은 두 진영 인물들이 서로 연계되게 동선을 구축, 두 개의 서사를 하나로 조화시켰다.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로 꼽히는 나혜석은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일제 강점기에 파리 유학을 다녀왔을 만큼 신여성이었고, 시인이자 화가로 자신의 주관이 또렷했으나 세상은 그를 ‘연애대장’ 이니 ‘이혼 고백장’이니 하면서 밀어냈다.
이 역사의 인물 나혜석이 언제 태어나 누구와 결혼했고 어떤 여정을 걸었는지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 극으로서는 흥미를 끌기 어렵다. 그런데 작가와 연출은 장민호라는 가상의 인물을 세워 그를 통해 나혜석을 되비추는 방식을 택했다.
장민호는 미치광이 소리를 듣는 대학교수로 나혜석 연극의 연출을 맡으며 정공법으로 희곡을 쓰려는 이상인과 부딪친다. 장민호는 나혜석처럼 화가이며 유학을 다녀온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더욱이 동시대 인물도 아닌데 19세 청년으로 돌아가 나혜석을 인터뷰하는가 하면 나혜석을 현실로 불러내는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
이처럼 ‘인형의 가’는 현대의 남자(장민호)가 역사 속에서 버림받았던 나혜석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린 연극이다. 그가 보여주려는 극 속에 나혜석의 꿈과 사랑, 신여성으로서의 좌절과 고통이 투영되면서 관객은 한자리에서 두 사람의 캐릭터를 보게 되는 것이다.
왜 제목이 ‘인형의 가’일까.
시대를 앞서간 여성 나혜석과 장민호의 엄마는 근대극의 효시로 불리는 헨릭 입센의 대표작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처럼 구습을 타파하는 용기 있는 여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혜석을 재조명하기 위해 장민호라는 가상 인물을 등장시킨 만큼 두 역할을 맡은 배우의 플레이가 절묘해야만 작가와 연출의 의도를 구현할 수 있다. 이들을 서포트하는 여러 인물들의 캐릭터 연기와 앙상블 역시 이 연극의 핵심인데, 모든 배역들이 제 몫을 해냈다.
괴팍한 대학교수이자 나혜석에 광적으로 빠져있는 장민호 역은 개성파 연기자가 아니면 해내기 어렵다. 무대 경력 50년이 넘는 데다 성우에서 출발해 배우로 활동하며 캐릭터 연기의 달인으로 꼽히는 주호성의 캐스팅은 절묘했다.
신경질적인 교수에서 출발해 과거로 돌아가 나혜석을 만나기도 하는 이 기행의 남자, 내면에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장민호 캐릭터를 주호성 배우는 온몸을 던져 해냈다.
클라이맥스에서는 몸부림치다가 실신까지 하는 장민호를 열연했다. 필자는 주호성만의 화술 연기를 여러 작품에서 보아왔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듯한 강렬한 눈빛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나혜석 역 임은연 배우를 정재호 연출의 ‘변신’에서부터 보아온 필자는 그의 무대에 임하는 열의를 익히 알고 있는데 이번 신작에서 자신의 연기 최고치를 끌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할에 몰입해 시대적 야망과 좌절을 동시에 지닌 한 예술가의 초상을 당당하면서도 연민이 가게 열연을 펼친 것이다.
이상인 역 배찬태 배우는 정공법으로 모범적 연기를 보였는데 조금 풀어진다면 주호성 배우와 더 끈끈한 케미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극 중 잠시 나오는 일엽 스님 역을 위해 삭발을 단행한 김용선 배우의 열정과 연기자로의 태도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나혜석과 염문을 뿌렸던 최승구 최린 역의 손선근 배우, 남편 김우영과 오빠 나경석을 해낸 윤상현 배우는 중심인물을 돕는 배역임에도 개개 인물의 캐릭터를 개성 연기로 보여주었다.
목사 역 김진태 배우는 아마에서 프로 무대까지 진출해 짧지만 강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예술가를 기리는 연극이 많지 않다.
극적인 인물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전기적 요소가 짙어 재미가 덜했기 때문이다.
‘인형의 가’는 화가 나혜석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해 신작의 신선함과 함께 관객을 몰입시키는 극적 재미도 주었다는 점에서 올해의 주목할만한 연극으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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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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