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기(狂氣)로 풀어낸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궁중의 여인들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극단 독립극장이 11월 2일까지 대학로 지구인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유진월 작, 박툴 연출의 ‘사도, 인더박스’는 초연임에도 개성이 뚜렷한 무대였다.
역사 속의 인물들을 다룬 퓨전극이지만 요즘 우리 세태와 맞물려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유진월의 극본이 구조나 대사가 탄탄했고, 사극 형식인데도 문학적 향취가 짙게 배어 나왔다.
박툴의 연출은 나무 블록을 이용한 동선과 장면의 연결이 극적이면서 배우들의 앙상블로 구성되는 미장셴이 돋보였다.
지원금 없이 제작한 소극장 공연임에도 무대(경우진), 조명(홍주희), 음악(김예나), 분장(최진영)이 극의 주제를 살렸고, 특히 중간 색조를 대비시킨 의상(임예진)이 독창적이면서 퓨전 사극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여섯 명의 배우가 조선시대 유명한 8일간의 뒤주 사건을 역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영조와 사도세자의 대립과 긴장이 주를 이루면서 세자빈 혜경궁과 사도의 친모인 선희궁의 생존 전략을 선명한 캐릭터로 살려냈다.
창작 초연인 만큼 허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단점이 있다고 해도 민간 극단이 이만한 창작극을 만들어 낸 성과에 주목하고 싶다. 스태프와 배우가 작품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바탕으로 단합된 호흡을 이뤄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105분의 공연을 보면서 희곡의 격이 느껴졌다.
작가는 ‘광기(狂氣)’를 화두로 잡았다. “광기에 사로잡혀 서로를 고통으로 몰아간 인물들의 난장 같은 인생”이라고 작가 노트에 밝혔다.
필자의 얼핏 든 생각이지만 영화 ‘왕의 남자’를 보고 김태웅의 희곡을 무대에 올린 연극 ‘이(爾)’가 연상됐다. 희랍 비극, 셰익스피어 사극 같은 느낌도 조금 받았다.
‘맨발의 사극’
‘사도, 인더박스’는 제목에서 보듯 정통 사극이 아니고 퓨전 사극이다. 왕도 세자도 사극 의상은 입었지만 모두 맨발인 상황은 무엇일까. 박제된 인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의미 아닐까.
'우리들의 광기를 멈추게 하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작가는 뒤주 사건에 머물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 그를 둘러싼 궁중 여인들의 내면에 도사린 욕망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지금 우리 현실과 연결시켰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 정의와 불의가 한없이 뒤섞인 혼돈의 시대, 누가 미쳤는지 누가 미치지 않았는지 분별하기도 어려운 시대, 어쩌면 세상은 언제나 광기의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작가 유진월의 글 중에서)
연출가 박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연출한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본 기억이 있다.
연출 노트를 보면 그는 사도세자의 뒤주 속 8일간의 이야기를 박스 속 8장면과 박스 밖 2장면으로 분석했다. 매 장마다 주제어를 두어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의 심리와 상황을 정리한시놉시스를 만들었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이런 장면을 구분 짓거나 끊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통으로 그려냈다. 박스 형 블록들을 배우들이 직접 움직여 퍼즐을 맞추듯 펼쳐나가는 형식도 좋았지만, 캐릭터들의 위태위태한 인생 항로를 섬돌을 밟고 건너뛰듯 한 연출 형식도 특이했다.
사도세자 스토리는 영화나 드라마로도 제작되었지만, 박툴 연출은 연극적인 특징을 살려 무대특유의 아우라를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었다.
타이틀롤인 사도를 맡은 고형우 배우가 복잡한 심리와 얽히고설킨 대인관계의 연기를 긴장도를 유지하며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아버지 영조 역 김재건 배우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상반된 캐릭터를 앙상블 연기로 해내 연민을 느끼게 했다. 선희궁 원영애, 혜경궁 민정아, 빙애 민채민 세 여인과의 심리 연기도 잘 살려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사도이지만 아버지 영조가 없다면 사도의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영조 역을 국립극단 출신의 김재건 배우가 맡아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수모를 겪으며 왕좌를 지켜낸 권력자의 독선과 광기’를 노배우 특유의 표정과 명징한 화술로 보여주었다.
다만 80을 바라보는 김재건 배우는 대사 암기에 다소의 문제를 드러냈지만, ‘책을 든 왕’이라는 연출의 설정으로 이를 극복해냈다. 영조라는 다층적인 캐릭터에 아들을 끝내 죽음으로 모는 비정한 부정을 김재건 배우는 핸디캡을 딛고 노련한 관록으로 구축해 낸 것이다.
연극 ‘사도...’는 사도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첫사랑인 선희궁의 비중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이 배역을 극단 독립극장 대표로 독립운동사 연극을 해 온 원영애 배우가 맡아 궁중 여인의 비애를 심도 있게 연기해 공감을 안겨 주었다.
“나는 한쪽 가슴으로는 아들이 그리워 울고, 한쪽 가슴으로는 지아비가 불쌍해 운다”는 선희궁, 원영애 배우는 라스트에서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절절한 독백으로 풀어내 뭉클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국립극단 공연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왔던 김정우 배우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역과 멀티 역을 해내며 연기파 배우다운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냈다.
혜경궁 역 민경아 배우도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비극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여인의 외골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능동적 연기로 보여주었다.
사도의 유일한 위로임에도 사도의 칼에 죽고 마는 비련의 궁녀 빙애 역은 연극 ‘비목’에서 발랄한 연기를 보였던 민채민 배우가 맡아 애절한 이미지 연기로 연민을 자아냈다.
올해의 신작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유진월의 희곡 ‘사도, 인더박스’는 국공립 단체에서 확대 버전으로 공연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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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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