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외 판잣집에 사는 4대 여성 이야기
- 매끄러운 연출과 배우들의 맛깔스런 연기 앙상블에 몰입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 이 연극을 오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발전소301을 이끄는 정범철 작가, 연출의 올해 신작 ‘피어 날다’였다.
페이스북에서 포스터도 보고 후기도 읽으면서 일상에 쫓겨 예매를 못 했는데 오늘 확 ‘땡긴’ 것이다. 찾아보니 11월 9일, 오늘이 '막공'이었다.
다행히 성수아트홀에서 마지막 무대를 볼 수 있었다. 놓쳤으면 후회막급할 뻔한, 스토리 좋고, 연출 매끄롭고, 배우들이 모두가 자기 옷 입고 자기 얘기하듯 역할이 맞았고, 연기 앙상블은 쫀득쫀득하게 맛깔스러웠다. 과다한 칭찬이 아깝지 않은 창작 수작이었다.
정범철 작가는 현재 대학로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연출가 중 ‘베스트’라고 필자는 꼽고 싶다. 창작열이 대단해 좋은 작품을 많이 쓰고 연출했지만, 극단 이름처럼 쉬지 않고 에너지를 투입해 생산적인 희곡과 무대와 배우들을 배출해냈기 때문이다.
생활연극을 하던 시절 정범철 작가의 ‘경식아 사랑해’를 강영걸 연출로 무대에 올리면서 “세상을 알고 사람에 대한 정감이 있는” 멋진 작가로 각인되어 있다.
이번 작품이 유독 땡긴 이유도 ‘피어 날다’라는 희망적 제목이 가슴에 꽂혔고,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출연한 데도 있지만, 극단 레퍼토리로 할만한 작품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보기 시작했는데 며느리(조주경)을 중심으로 시어머니(전국향)와 시할머니(김화영)가 등장하고 딸 다혜(박솔지)까지 여인 4대가 갈대밭 있는 한적한 교외의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이웃 장복래(유안) 아줌마가 물 길어와 수다를 떨고, 올케(류진현)까지 커다란 케리어를 끌고 와 눌러살 기미를 보이며 여인 천하가 된다.
남자 셋을 한 명씩 등장한다. 다혜의 애인 양형규(오현근)에 이어 토지과 공무원(박수연)이 4대가 반세기나 살던 집이 무허가라며 철거를 독촉한다. 빚쟁이 등쌀에 형식적으로 이혼하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보상받기 위해 따로 살던 남편(성노진)이 집으로 오면서 무대는 완전체를 이룬다.
이 집안 여자들은 세월의 무게만큼 사연도 각각이다.
시할머니는 6.25 전쟁 때 실종된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다 치매 노인이 되고 말았다.
갈대발을 엮어 온 시어머니는 삼청교육대 다녀온 남편이 익사한 아픔을 멍에로 달고 살아가고, 청소 일을 전전하는 며느리는 정략 이혼한 남편을 기다린다.
작가는 세월의 씨줄에 국가 폭력과 세대마다의 트라우마를 날줄로 얽으면서 한 집안의 고통과 기다림을 이야기하듯 그려냈다.
치매 노인을 위한 기저귀가 마를 날이 없는 집안은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퀘퀘한 냄새가 날 것 같다. 기다림을 유산처럼 대물림하는 여인 3대의 기억, 상처들은 끝간줄을 모른다.
이 작품에서 ‘공무원’은 환영받지 못한 존재를 넘어 상종을 못 할 원수처럼 그려진다.
시할머니는 공무원이라면 얼씬을 못 하게 하고, 시어머니에게는 혼인 상대로 절대 금물이 공무원이다. 국민을 위해 복무해야 할 공무원들이 실종된 남편을 찾아주지 못하고, 삼청교육대에 끌고 가 병신을 만들더니 누대로 살아온 집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것이 이들의 뼛속에 사무쳐 있는 것이다.
‘피어 날다’가 공감을 안겨주는 가장 큰 덕목은 국가의 횡포와 독선을 날카롭게 지적하되 이야기 속에 따듯하게 녹여냈다는 점이다. 정범철 작가의 이념이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이 때로 불편하게 여겨진적도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공무원 기피증 묘사가 속 시원한 공감을 안겨주었다.
또 하나는 대물림되어온 상처의 기억들과 피해의식을 18세 여고생으로 하여금 과감히 끊어냈다는 점이다. 이 소녀는 남 탓이던 구습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나서 열어간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움츠러들지 않고 피어난 것이다.
필자는 많은 작품을 섭렵하는 편인데 재미없거나 취향에 맞지 않으면 하품을 하거나 조는 등 몸이 반응해왔다. ‘피어 날다’는 그런 반응이 전혀 오지 않았고 몰입했고 재미를 느꼈다.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끌어간 연출도 매끄러웠지만 배우들이 극 중 인물로 빙의되어 실생활에서 자기 얘기하듯 풀어낸 자연스러운 연기에 빨려든 것이다.
필자는 연극 리뷰를 쓰면서 앙상블이란 단어를 자주 쓰고 있는데, 무대에서 배우들의 주고 받는 대사나 동선의 어우러짐이 맞아떨어져 멋진 미장셴을 보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 이 공연을 보면서 9명의 배우 어느 한쪽의 처짐이나 지나침이 없이 고르게 앙상블을 이뤄내 이야기 전달은 물론 연극에서만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극적 아우라를 체험케 했다.
무대에서 자주 봐 익숙한 배우도 있고, 처음 접하는 배우도 있지만 주어진 캐릭터를 실감 나게 살려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특히 익숙한 배우들이 이제껏 보아오던 연기와 다른, 서민적인 정서와 감정이 배어 나오는 또 다른 연기의 폭과 변신을 보여줘 개인적으로 더 재미를 느꼈다.
필자가 줄거리를 소개할 때 며느리를 중심으로 했는데 4대가 한 지붕 아래 사는 이 집안의 중심이기 때문이었다. 그 역을 맡은 조주경 배우는 도시적인 연기를 주로 보았는데, 시어머니 시할머니 모시며 똑 부러진 딸까지 아우르는 집안의 기둥 역할을 수더분하게 보여주었다.
시어머니 수발에 며느리의 아픔까지 껴안으며 변화를 외치는 손녀에게 집안의 내력을 일러주며 감싸는 할머니 역에 전국향 배우가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자상하면서도 꿋꿋한 우리네 여인상을 표나지 않게 보여주었다.
중진 김화영 배우는 적역을 맡았다. 전쟁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70년이나 기다리며 민들레 꽃씨를 심는 치매 할머니의 한을 온몸과 표정, 간헐적 대사로 아프게 그려냈다. 방문을 반쯤 열고 밖을 내다보는 표정 연기만으로 세월의 아픔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고교생 다혜 역을 맡은 박솔지 배우는 집안의 대물림 어둠과 고통을 걷어내는 똑소리 나는 캐릭터를 햇살처럼 밝고 싱그럽게 해냈다. 작가가 희망의 아이콘으로 내세운 피어 나는 주인공을 당차면서도 밉지 않게 보여주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버지 역 성노진 배우는 나라와 맞서 투쟁하면서도 딸의 일탈까지 품는 아버지 캐릭터를 과묵하지만 뚝심있고 정감가게 연기해 냈다.
공무원 역 박수연 배우는 집안 4대 여인들의 공적으로 힐난 받으면서도 업무를 수행하는 낯두꺼운 캐릭터를 해냈다.
올케 역 류진현 배우와 이웃 아줌마 역 유안 배우는 어둡고 무거운 4세대 집안에 햇빛 같은 따사로움과 한여름 소나기 같은 후련한 연기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깨알 재미도 안겨주었다.
다혜 애인 송형규 역 오현근 배우는 젊음의 매력으로 달덩이처럼 환한 연기로 무대를 밝혀주었다.
막공에서 집을 부수기 위해 들이닥친 철거반 인부로 잠깐 출연한 남편들 신현종(전국향)과 심영민(조주경) 등의 카메오 연기도 극에 재미를 더해주었다.
한해가 기우는 11월, 올해도 많은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는데 극발전소301 정범철 작 연출의 신작 ‘피어 날다’는 기억에 남을 좋은 작품으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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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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