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승 역 맡아 지옥과 연옥 순례...단테 역 한윤춘 배우와 찰떡 '케미'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연기예술의 장인(匠人)’ 정동환 배우(76)가 무대 인생 55주년 기념 공연 '단테 신곡'에서 초절정의 연기로 기념비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명징한 화술, 울림이 있는 목소리, 원숙미가 흐르는 중후한 연기로 무대 위에서 명인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이다.
9월 19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한 극단 피악 나진환 연출의 '단테 신곡'에서 정동환 배우는 단테의 스승이자 지성의 상징인 베르길리우스 역을 맡아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인도하며 영혼의 깊은 심연에서 길어올린 지혜로 삶의 길을 밝혀주는 ‘인생의 등대’같은 빛나는 연기를 펼쳤다.
한 배우가 55년이나 무대를 지키며 연기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정동환이 걸어온 길은 험난했다.
중동고 연극반 출신인 그는 노경식 작 '동이 틀 때'로 대한민국 학생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동랑 유친진의 서울연극학교에서 유덕형 연출에게 연기를 배웠다.
재학 중 월남전에 참전했던 정동환은 1969년 '낯선 사나이'로 데뷔한 이후에도 일본에서 노동을 하며 무대에 섰으며, 1980년대에는 미국 뉴욕의 리스트라스버그 연기학교에서 연기력을 다지기도 했다. 동아방송 성우로도 뽑혀 활동하면서 매체 연기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필자가 정동환 배우를 무대에서 처음 본 작품은 1975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유덕형 연출의 '마의 태자'에서 였다. 태자 역을 맡은 정동환 배우는 무대에서 빛이나 보였다. 조명의 역할이 컸던 작품이기도 하지만 조명을 받은 정동환은 신인다운 풋풋함과 매력적인 무대 연기로 강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필자는 그때부터 정동환 배우의 팬이 되어 그의 작품과 연기를 지켜봐왔다.
'레이디 맥베스'의 맥베스,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 '고곤의 선물' 에드워드 담슨 역으로 빼어난 연기를 펼친 그는 2000년대 이후 나진환 연출의 '단테의 신곡',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대심판관 파우스트' 등에서 수도승 같은 자세로 고난도의 연기를 지속해왔다.
정동환 연기인생 55주년 기념으로 나진환 연출이 다시 다듬은 '단테 신곡'은 극단 피악이 추구해온 ‘인문학 성찰’ 시리즈의 결정판이라고 할만하다.
배우 정동환이 자신의 열정과 기량을 쏟아낼 수 있도록 배우예술에 초점을 두면서도 나진환 연출이 지난 10여 년간 고전 작품의 현대적 해석을 위해 실험해 온 요소들을 응축해서 보여주었다.
최장 7시간, 평균 3시간 넘던 러닝타임이 2시간(인터미션 15분 제외)으로 줄어 날씬해진 느낌을 주었다. 배우들도 연기하기가 편해졌고, 관객들도 부담이 줄어 좋았다. 2막 천당 편은 너무 빨리 끝난 것 같다고 할 만큼 연출의 군더더기가 없어지고, 전반적으로 안정되고 세련된 무대를 보여주었다.
나진환 연출의 이번 공연에서 가장 괄목할 점은 배우 용병술이었다.
특히 극단 피악에서 정동환과 호흡을 맞춰온 한윤춘 배우가 베르길리우스의 제자인 단테 역을 맡아 최상의 명연으로 최고의 배우 정동환과 환상의 듀엣 연기를 펼쳤다. 한윤춘 배우는 필자가 오랫동안 주목해온 연기파인데 이번에 그의 진면목을 다시 발견했다고 할 만큼 정동환과 함께 무대 연기의 정수를 해내면서 찰떡같은 케미의 2중주를 보여주었다.
이번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는 모두 10명이다.
나진환 연출은 정동환 한윤춘을 뺀 8명의 배우를 고전극의 코러스처럼 활용, 무대에 다양한 변화를 주면서 마치 수십 명의 배우가 등퇴장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특히 지옥을 보여줄 때는 배우들이 상체를 드러낸 반나(半裸)로 형벌의 고통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등 몸 연기로 고통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현대적인 의상도 극을 드라마틱하게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진환 연출의 특징인 오브제 활용도 지옥과 연옥과 천국 등 극의 공간적 아우라를 입체화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됐다.
특히 배우들이 끌고 미는 덧마루의 다양한 변주는 이 극의 백미였다. 사각의 덧마루가 섬이 되기도 하고 배가 되기도 하면서 무대 변화를 이끌었고, 사각의 거울 또한 죄지은 인간의 일그러진 행색을 적나라하게 구현해 주었다. 파악 특유의 형광봉도 불과 무기를 상징하는 등 다용도로 활용되어 역동감을 안겨주었다.
또한, 무대 중앙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실시간으로 촬영, 확대 영상으로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현실감도 지옥도라는 상상의 이미지를 극대화해 주었다.
'단테 신곡'에서 조명의 역할은 특기할 만하다. 넓은 무대가 지옥의 영혼 들이 허우적대는 피바다가 되기도 하고, 불처럼 타오르면서 인간의 일그러진 고통을 더 실감 나게 해주었다.
여기에 현대적인 음악도 극의 무게와 압박을 한결 가볍게 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코러스들의 앙상블이 순례의 3단계, 특히 지옥의 층별로 달라지는 죄인들의 형벌을 여러 형태로 형상화해냈다. 영혼의 정화 과정을 보여주는 연옥편,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오르는 천국편도 배우들의 연기와 몸짓으로 체험케 해주었다.
코러스들이 하나 이상의 역할을 맡아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항변하는 연기도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지옥의 심판관 마노스 역의 문경희, 지옥의 문지기 치아코 역의 안성채, 오디세우스 주인서, 카치아네미코 이용성, 보니파키우스 이창호, 우르바노 2세 장진욱, 베아트리체 신수민, 켄타로우스 이정민 등은 고행의 몸연기 뿐 아니라 캐릭터 연기도 잘 해냈다. 필자는 안성채 배우의 극한 상황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혼신 연기가 특히 좋았다.
최근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방영한 단테의 신곡 편 시청이 이번 공연을 관람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요즘의 혼탁과 혼란상이 700년전 단테가 그려낸 지옥도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공연을 보면서 그 실감의 도가 몇배나 더 강했다.
무엇보다 증오와 폭력, 위선과 혐오, 실의와 절망, 사기와 배반 등이 14세기 단테의 시대보다 더 만연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예술의 경지에 오른 정동환 배우는 이 무대에서 “인간을 구원할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지옥에서라도 반드시 돌려받는다”는 메시지를 울림이 크게 설파했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단테의 신곡'이 이번에 더 명료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은 종교적 의미 이상으로 죄와 벌에 대한 이 같은 역사적 교훈이 오늘에 시사하는 점이 강하기 때문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10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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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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