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숨 멎게 한 긴장감...올해의 창작 수작(秀作) 연극 ‘엔드월’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숨 멎게 한 긴장감...올해의 창작 수작(秀作) 연극 ‘엔드월’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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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과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 '3박자' 갖춰
- 사회적 주제를 문제 그너머 인간 존엄과 희망으로 풀어 연극으로 승화
연극 ‘엔드월’ 공연 장면./사진= 대학로극장 쿼드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9월 24일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관람한 극단 즉각반응의 하수민 작 연출 ‘엔드월(END WALL) 저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는 우리 사회의 숨 막히는 벽들과 내면의 벽까지 그 안팎을 심도 있게 조명한, 극적 구성과 마임을 활용한 연출, 개인과 집단의 연기 조화가 뛰어난 2025년의 문제작으로 추천하고 싶다.

즉각반응의 하수민 작가 연출의 ‘새들의 무덤’은 2020년과 2021년 우수 작품으로 꼽혔으며, 2024년 서울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새섬, 새들을 주제로 아픔을 넘어 희망을 보여준 이 집단연극의 감흥을 필자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엔드월’은 2024년 제2회 서울희곡상 수상작으로, 주제가 명료하고 대사가 시적(詩的)이며 구조가 탄탄하다. 극적 구성이 뛰어나고 인물들의 캐릭터가 살아 숨쉬는 듯 생생하다.

‘새들의 무덤’과 맥을 같이하는 한국 현대사 시리즈로, 동시대성을 지녔다는 특징도 상통한다.

필자는 ‘엔드월’을 보면서 작가이자 연출인 하수민의 모나지 않고 치우치지 않은 작가적 시각, 고발과 응징보다는 한 젊은 영혼을 감싸 안아 진혼하려는 휴머니즘과 극성(劇性)에 주목했다.

2021년 평택항에서 컨테이너 벽이 무너지는 사고로 20대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작가는 이를 모티브로 노조 관계자들도 취재하고,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환경이나 고질적 병폐도 알아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의 진원과 누적된 병폐의 해부와 더불어 사회 구조 속에서 꿈을 잃어버린 젊은이의 초상을 아리게 그려냈다.

정부의 강력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산재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를 사회 문제로 다루면 극이 되기보다 고발이나 외침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작가는 벽 그 이전에 있는 것들, 벽 그 너머에 있는 것들에서 갈등과 질타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생명과 희망을 말하고자 했다.

이처럼 구심점이 잡혀있어 대사가 날것 그대로의 구호가 아니라 온정이 담겨있고, 노동극이 아니라 격조 있는 서사극으로 관객의 가슴에 울림을 안겨주었다.

연극 ‘엔드월’ 공연 장면./사진= 대학로극장 쿼드

벽, 바다, 바람, 공기, 숨, 생명이란 시어(詩語)들이 황량한 부두의 작업장에 희망의 빛을 비춰 주었다.

생명을 잃은 두 명의 젊은이는 원망이나 복수보다도 죽음 앞에서 떠오른 즐거운 추억들, 벽 그 너머 가보고 싶었던 미지의 세계를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 나간 무대는 을씨년스럽기보다 음악과 춤이 흐르는 축제장처럼 떠들썩하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생명을 잃은 아성(마광현)은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아빠에게 효도하려는 아들이었고, 쓰레기 처리장에서 죽은 무명(홍철희)은 엄마의 빈 마음을 채워주려는 시인이었다.

하수민 연출은 ‘새들의 무덤’에서 배우들을 오브제로 활용해 다양한 미장셴을 보였는데 이번 ‘엔드월’에서는 벽, 바다, 공기, 새, 빈자리 같은 상징을 통해 상상의 지평을 넓혔다.

특히 마임과 움직임, 뮤지컬 장면 같은 코러스 등장, 장면의 반복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관객을 시종 몰입시켰다.

연극 ‘엔드월’ 공연 장면./사진= 대학로극장 쿼드

11명의 배우들은 개인 연기도 뛰어났지만 앙상블 연기로 외적인 상황과 심리적 변화를 표출해냈다. 즉각반응의 장점인 집단 연기와 함께 허전할 수도 있는 1인 주역을 투 톱으로 세운 듀엣 연기로 배우들의 연기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노동 현장에서 사고로 인생이 꺾인 아성 역의 마광현은 작가이자 연출인 하수민의 의도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아성이란 캐릭터를 진정성 있게 연기했다.

강렬한 눈빛, 막힘 없는 대사와 감정의 구사, 자유자재로 무대를 누비며 한 젊은이의 초상을 온몸으로 연기해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아성 역이 20대라고 해서 20대 연기자가 했다면, 이만한 폭과 깊이, 무엇보다도 죽음의 앞과 뒤를 오가는 감성 연기를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40대의 마광현 배우는 그동안 무대에서 쌓은 커리어로 이 시대 유의미한 인물상을 보여주었다.

아성과 호흡을 맞추는 무명 역 홍철희 배우는 삭발한 젊은 노동자 캐릭터를 슬픔을 머금은 해맑은 표정으로 연기해 연민을 안겨주었다. 특히 죽음의 자리에서 시간을 멈춘 아성의 질문에 기억을 떠올려 만나게 하는 연기를 안정적으로 해냈다.

아성과 무명의 소박한 꿈이 깨져 버린 상황에서도 각자의 꿈을 찾으려는 두 배우의 앙상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이 작품에 우리 작업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등장시켜 인격적 차별과 구조적 문제도 조명하고 있다.

연극 ‘엔드월’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러시아 사할린에서 온 한인 고래 역을 맡은 이창현 배우는 어설픈 우리말 말투와 고집스러운 캐릭터 구사로 객석의 주목을 모았다. 특히 신참 알바생 아성과의 쫀득한 케미를 개성있게 보여줘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엔드월’은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희생당한 두 젊은이가 주역이지만 40~50대 중견 배우들의 받침이 없었다면 이만한 설득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새들의 무덤’에서 진중한 연기를 펼쳤던 손성호 장재호 배우는 이번 무대에서 원청기사와 재상 역을 맡아 극의 무게감을 더해주었다.

필자는 손성호 배우를 주목해 왔는데 그는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집단 연기에 앙상블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존재감 넘치게 살려냈다. 원청기사로 마임 연기뿐 아니라 러시아 노동자 고래에게 호통치는 반복 연기로 카리스마 넘치는 중후한 연기로 극의 중추 역할을 해냈다.

무명의 엄마 역을 맡은 김영선, 아성의 아버지 역의 황규환 배우도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리얼 연기를 펼쳤다.

집반장 역 심민섭 배우를 비롯해 아성의 동창인 코러스 팀의 이경우 엄태호 윤희지 배우도 우울할 수 있는 연극에 활력을 주는 춤과 마임 연기를 멋지게 해냈다.

즉각반응 하수민 연출의 ‘엔드월’은 산재 사고의 구조적 문제와 열악한 환경을 주제로 다룬 사회성 짙은 연극이지만 준엄한 비판이나 교과서적인 교훈을 주기보다는 인간 그 본연의 모습과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우는 동시대적 연극으로 승화시켜 주목할만한 올해의 작품이 될 것이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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