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시대의 영원한 ‘미쓰 박’, 배우 박정자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시대의 영원한 ‘미쓰 박’, 배우 박정자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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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준상 감독 제작 예술영화 ‘미쓰 박’ 시사회
- 연기자가 노배우에게 헌정한 ‘예술가의 초상’
- 연기 활동 기록이 아닌 인간적 면모와 배우의 고독과 고뇌 담다
영화 ‘미쓰 박’ 시사회에서 박정자 대배우와 유준상 감독./사진=정중헌
영화 ‘미쓰 박’ 시사회에서 박정자 대배우와 유준상 감독./사진=정중헌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연기자인 유준상 감독이 박정자 배우의 인간과 작품세계를 영상으로 그린 예술영화 '미쓰 박(Miss Park)' 시사회가 10월 30일 서울 충무아트홀 시네마소극장에서 열렸다. 

촬영과 후반 작업 완성 후 처음 가지는 비공식 시사회로 영화에 관계된 인사들과 박정자 배우의 지인 등 소수가 참석했다. 

필자는 박정자 배우의 초대로 영화를 본 후 유준상 감독과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이 영화에 출연한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이 영화를 만들게 했다는 박용재 시인과도 인사를 나눴다.

영화를 보기 전 '청명과 곡우 사이'로 알았던 영화 제목이 '미쓰 박(Miss Park)'으로 바뀐 이유가 궁금했다.

왜냐하면 지난 5월 강릉 순포해변에서 촬영한 박정자 배우의 생전 장례식에 필자도 참석했는데 그때까지는 영화 제목이 태양과 비를 상징하는 '청명과 곡우 사이'였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참석자들과 환담하는 박정자 배우에게 물었더니 “글쎄요... 영화를 보면 왜 '미쓰 박'인지 알게 될 거예요”라고 했다.

영화 ‘미쓰 박’의 박정자 배우

인터넷을 뒤져도 '미쓰 박'이라는 영화는 아직 올라있지 않았다. 시사회라고 했지만 아무 자료도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리뷰는 필자의 기억에 의한 인상기가 될 수도 있다.

러닝타임이 1시간 40분인 이 장편은 배우 박정자의 63년 배우 인생을 추적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평생을 무대에 서고 매체에서 활동했던 한 예술과의 고뇌와 죽음을 그린 예술영화다.

예술가를 다룬 전기(傳記)영화는 본 적이 있으나 한 배우를 모티브로 그의 내면과 미래의 죽음까지 그려낸 예술영화는 드물었다. 그래서 대중성은 적을지 모르나 의의는 크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대배우 박정자가 더 커 보였고, 같은 배우로서 예술가의 초상을 영상으로 그려낸 유준상 감독의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K팝을 위시한 K컬처가 대세인데, 유준상 감독의 '미쓰 박(Miss Park)'은 세계 유수의 예술영화제에 출품해도 손색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 '미쓰 박(Miss Park)'은 필자의 선입관과는 많이 달랐다.

배우 박정자를 위한 박정자의 궤적을 그린 박정자의 인생과 작품을 담은 다큐성이 짙은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2년 연극무대에 데뷔해 63년간 수많은 작품에서 천의 얼굴과 목소리를 연기한 당대 배우의 험난하고도 영광스런 여정일 것이라고.

하지만 영화 '미쓰 박(Miss Park)'은 유준상 감독이 연출한 ‘배우의 내면과 현실을 추적한 예술영화’였다. 

박정자 대배우의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유준상 감독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배우의 내적 세계’를 영상의 특성을 살려 그려낸 것이다. 그래서 연극적인 요소보다도 영상적인 접근과 표현이 짙게 표출되어 있다.

어쨌든 이 영화의 주인공은 83세의 현역 박정자 대배우다.

첫 장면에서 백발의 이 노배우는 실례일지 모르나 ‘예뻤다’. 나이를 뛰어넘은 기(氣)와 예(藝)의 아우라가 풍만했다.

황혼기에 접어든 박정자 배우는 자신의 걸어온 길에 남겨진 흔적들(메인 자료는 전문 기관에 보냈다)을 정리하는 장면부터 보여주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은 연극인 또는 배우들이기 보다 그의 팬클럽 회원들 같았다.    
강릉 해변에 펄럭이던 만장에 적힌 연극 제목만 '위기의 여자', '19 그리고 80',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 등 200편이 넘지만 무대에서의 연기 장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영화에서 배우 박정자가 던진 첫 번째 화두는 ‘쥐’였다.

“내 몸 안에 쥐가 들어있나 봐요...” 

연기하는 배우가 몸속에 쥐가 들어있는 것 같다니... 이 무슨 해괴한 얘기인가. 이 말은 김기영 감독이 한 말로 전해졌다. 

'하녀', '충녀' 등 충격적인 영화를 남긴 김기영 감독은 배우에게 ‘“쥐가 몸 안에 들어있다고 상상하고 연기하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 '하녀'와 '충녀'에 쥐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를 위해 쥐를 길렀다는 얘기도 있다.

예술영화 ‘미쓰 박’을 연출한 유준상 감독./사진=정중헌

필자는 유준상 감독에 대해 잘 모른다.

그가 TV드라마 50여 편, 영화 40여 편, 뮤지컬 30여 편에 출연한 왕성한 활력을 지닌 연기자로 매사에 열정을 쏟는 동안(童顏) 배우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번에 자료를 찾아보니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했고, 명지대 대학원에서 영화뮤지컬 석사학위를 하나 더 받고 강단에도 서온 학구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아노와 기타 연주 실력이 수준급이고, 스스로 작사 작곡 노래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로 음반을 냈고 영화와 OTT 주제곡에도 참여했다. 에세이 두 권에 저서도 여럿 펴낸 유준상은 영화감독으로 데뷔, '깃털처럼 가볍게' 등 단편영화를 발표했다. 영화 '미쓰 박'에 나오는 음악도 대다수 자작곡들이다.         

하지만 그가 왜 '청명과 곡우 사이'라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지 잘 모른다. 필자의 언론계 후배인 강릉의 박용재 시인이 유준상의 계획을 듣고 바로 박정자 대배우를 소개해 이 영화가 성사되었다는 것도 이번 시사회에서 알았다.

유준상 감독의 제작 의도가 이번 영화의 핵심일텐데, 그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리뷰를 한다는 것이 좀 걸리기도 한다.

유준상 감독의 영화 '미쓰 박(Miss Park)'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김기영 감독으로 돌아가야 한다. 

배우 박정자는 1977년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이어도'에서 무당 역을 맡았다. 제주 올 로케의 이 영화에서 초년 배우 박정자는 무녀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김 감독에게 물었다고 한다.

“신과 섹스한다고 생각하고 연기해 보라”는 대답을 듣고 박정자는 미친 듯 춤을 춰댔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충격적이던 그 말이 평생 연기의 나침판이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시사회에서 박정자 배우./사진=정중헌

영화의 중심부는 무대에서 코러스들과 함께 하는 배우 박정자를 집중 조명하는 장면들로 채워졌다. 

수십 명의 젊은 배우지망생들로 이루어진 코러스들과 자신의 분신인 젊은 여배우와 한데 어우러지는 박정자는 일상의 자신이 아닌 캐릭터로 변신하는 과정의 어려움, 어떻게 하면 연출이나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 무대에서 보여주었다.

영화는 무대 뿐 아니라 일상에서 배우가 직면하는 외로움과 초조와 불안감도 집중 조명한다.

무대에서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한없이 고독하고 작아지는 인간적인 고뇌를 박정자 배우의 의식과 사생활 속에서 클로즈업 해낸 것이다.  

이 예술영화의 압권은 죽음을 예행 연습하기 위해 박정자 배우가 관속에 들어가 눕는 장면, 그리고 바로 강릉 바닷가로 이동해 공개적으로 촬영한 생전 장례식 몹신이다.   

필자도 참석한 이 로케이션에서 박정자는 죽음을 초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5월의 바닷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발로 모래밭을 휘저으며 자신의 상여를 따라가는 모습에 처절하고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당시의 분위기를 한 신문은 이렇게 묘사했다.
“잔치 같은 장례였다. 눈물과 회한 대신 유쾌한 웃음이 넘쳤다. 한평생 인연으로 모인 150여 명 ‘문상객’을 향해 ‘고인’ 자리에 선 주인공은 “죽어서는 이 얼굴들 못 보지 않냐”며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5월 해변에서 망자의 의식을 행하는 박정자 배우의 모습. 당시 필자도 로케이션에 참석해 촬영을 지켜봤다. 
지난 5월 해변에서 망자의 의식을 행하는 박정자 배우의 모습. 당시 필자도 로케이션에 참석해 촬영을 지켜봤다. 

많은 지인들이 한마음으로 동참해 준 강릉 순포해변의 장례식 장면은 영상미도 뛰어났지만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인 ‘죽음’을 광활한 바다 배경의 제례(祭禮)로 승화시켜 가슴에 진하게 와닿았다. 

한 예술가, 한 배우가 어릴 적 배우의 꿈을 이뤄 한평생 예인으로 살다가 생전에 지인들과 행복하게 이별하는 장면은 해외에서도 주목받을 소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는 김동호 위원장, 정지영 감독이 출연했고, 젊은 배우 박정자에게 강렬한 충격을 안겨준 김기영 감독에 대한 일화가 들어있다. 

필자가 아는 박정자 대배우는 ’연극계 대모‘인데, 그를 모티브로 한 영화 '미쓰 박'에서는 은사인 김기영 감독이 촬영장에서 외쳤던 "미쓰 박!"의 음성을 강조했다. 라스트신도 '미쓰 박'을 부르는 음성으로 여운을 안겼다.
  
감독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필자가 짚어낸 키워드는 "박정자 하면 뭐가 남을까" 였다. 평생 혼신을 다해 무대에 섰고 천의 캐릭터를 보여주었지만, 뭐가 남을까는 박정자 뿐 아니라 모든 배우가 숙명처럼 짊어진 멍에 아닐까.

유준상 감독은 박정자라는 우리 시대의 명배우를 통해 배우의 숙명, 고독과 고뇌, 그리고 배우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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