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人] 별과 빛을 따라 산 연기 인생 54년 권병길
[김두호가 만난 人] 별과 빛을 따라 산 연기 인생 54년 권병길
  • 김두호 인터뷰어
  • 승인 202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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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예술사의 증언, 몸으로 쓴 회고록
-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 출간
연기 인생 54년째를 맞이한 배우 권병길. 무대에서 반백년의 인생을 보낸 그는 공연무대의 실록과 같은 회고록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을 펴냈다.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연극을 비롯해 영화와 TV드라마에서 연기활동을 해온지 반세기를 넘어 2022년으로 54년째를 맞이한 권병길(1946∼ ) 배우는 뼛속까지 연기혼이 스며 있는 ‘연기예술인’이다.

1968년 차범석 작 연극 <불모지>로 출발해 긴 세월을 한눈팔지 않고 연기활동을 해왔지만 그의 이름과 얼굴은 주로 연극계에서만 알려져 있다. 연극 <따라지 향연> <돈키호테> <햄릿> <대머리가수> 등 130여 편,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살인의 추억> 등 30여 편, TV드라마 '공룡선생', '종이학' 등 지금까지 수백편의 작품에 출연해오는 동안 굳이 주연배역을 탐하지도 않았고, 애써 매스콤의 카메라 따위도 의식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그렇게 천의 얼굴로 재주를 피우고 변신하며 사는 배우답지 않게 자신을 스타로 밀어 올리는 데는 재주가 없었지만 대한민국연극제, 동아연극상을 포함한 각종 연극, 영화상 시상식에서 우수 연기상을 받을 기회는 꾸준히 맞이했다. 또 배우인생에서 그가 즐기면서 누려왔다는 보람으로 틈틈이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지로 이동하며 세계 연극제에 참가해 문화사절의 역할을 해온 시간들을 떠올렸다.

130여 편의 연극을 비롯,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평생을 배우로 살아온 권병길은 "후회 없이 살았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비슷한 행로의 친근한 또래 오영수 배우는 근래 <오징어게임> 드라마 한편으로 글로벌 스타덤에 올랐지만 권병길 배우의 무대 인생에는 화제가 될 만한 큰 변화가 없다.

좀 특별했던 때도 있었다. 2020년 자신이 직접 쓴 희곡으로 모노뮤직극 <별의 노래>를 무대에 올려 화제를 모았을 때였다. 시차를 두고 앵콜 공연까지 한 그의 모노드라마는 일제 강점기 유랑 가극단에서 동양극장의 화려했던 여성국극, 변사의 구성진 목소리에 무성영화가 돌아가던 시절부터 1960년대 눈부시게 피어올랐던 충무로 전성기 은막의 스타들까지 추억의 연극 영화 풍물 이야기를 엮어낸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 유랑 극단을 보고 자라서 1960년대에 배우가 되어 충무로시대를 겪고 지켜 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관객을 울리고 웃겨주는 광대들의 무대인 별과 빛들의 세상에서 반백년의 인생을 보내고 이윽고 무대 공연의 비화를 공개하듯이 미공개 이야기를 모아 공연무대의 실록과 같은 회고록을 펴냈다. 수록된 내용 가운데 흥미를 느끼게 하는 부문에 초점을 맞추어 저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 표지

- 책머리에서 김정옥 원로연출가는 “권 배우는 평범하지 않고 튀는 연기자다. 그러나 튀면서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는 배우”라고 인물평을 했다. 또 유민영 원로 평론가는 “120여년 공연사를 통해 어느 배우도 자신의 연극행로를 소상하게 기록으로 내놓지 않아서 희귀하고 소중한 공연사의 자료될 것 같다”고 <배우 권병길 / 빛을 따라간 소년>의 추천 글을 썼다. 그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듣고 싶다.

"평생을 배우로 산 내 인생에는 흔적만큼 다채로운 추억들이 쌓여 있다. 후회 없이 살았고 행복했다. 한 줄기 빛을 보고 따라 간 곳이 극장이었고 그 빛 속에서 춤추고 절규하고 노래하는 광대들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그들 속으로 빠져든 것이 내 인생의 시발점이다. 그 맑은 영혼이 점차 혼탁한 물질의 공해 시대로 접어들면서 빛이 되어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초심의 순수한 꿈을 잃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 문득 고달픈 시대를 함께 살아온 관객들과 추억을 나누고 싶어서 회고록을 생각했다." 

- 회고록 내용의 첫 제목이 ‘나팔소리 들린다’이다. 극장을 운영하는 형 덕분에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시기에 악극단 공연과 영화를 보며 꿈을 키웠다는데.

"1950년대 지방의 소도시에는 악극단 공연이 인기를 끌었다. 나는 극성 관객으로 광대들의 공연무대에 넋이 빠졌다. 그들은 어린 소년의 눈에 꿈을 주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 황홀한 별들이었다. 악극의 1부는 연극이다. 망치소리가 울리면서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징소리와 함께 막이 오르면 콧날을 세우고 짙게 화장한 배우들이 과장된 목소리로 대사를 읊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 객석은 훌쩍거리는 소리로 눈물바다가 된다."

-대충 느낌이 온다. 어떤 작품들이 기억에 남아 있는가?

"악극의 제목들은 기억에 없지만 잊을 수 없는 흑백영화로 신상옥 감독의 <젊은 그들>,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 권영순 감독의 <옥단춘>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그리고 <단종애사> <오부자> <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이 줄줄이 떠오른다. 배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짜릿하고 행복하다."

배우 권병길

- 그 무렵 외국영화도 많이 들어왔다.

"조금 철이 들 무렵에 충남 청양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뒤 시내 극장을 돌며 윌리엄 와일러의 <애정>을 비롯해 <벤허> <자이언트> <하이눈> <노틀담의 꼽추> <닥터 지바고> 등 가리지 않고 보았다. 입장료를 벌기 위해 잉크냄새가 나는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종로통을 뛰어다니며 신문팔이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던 날은 단성사 극장 앞에서 단숨에 100장도 넘게 팔아치워 잊을 수가 없다.

그 무렵에 겪은 코미디 같은 일화가 있다. 인기 액션배우 황해의 동생이라며 황해와 비슷하게 생긴 고객을 알게 되어 신문팔이로 모은 돈을 빌려주었는데 사라진 뒤 알고 보니 가짜 사기꾼이었다. 배우라는 이름만 나와도 마냥 우러러보이던 때에 겪은 실화다."

- 연기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게 된 때는 언제인가?

"성장기에 결핵약을 먹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시기가 길었다. 서라벌고등학교 연극부에서 백전교 방송연출가를 만나 전국 고교 드라마 경연대회에 출전했고 이어서 지용환 연출가 선배를 만나 연극에 매료되었으나 다시 병고의 고난기로 접어들어 죽음의 유혹을 벗어나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 ‘그리운 어머니’ 이야기도 책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머니는 1913년 충청도 보령에서 3.1운동 때 옥살이를 하신 외조부모님의 귀여움을 받으며 성장하셨다. 이문구 소설가의 <관촌수필>의 배경이 된 곳도 외가댁 부근이다. 불행하게도 이념의 칼바람에 휘말려 가족 중 많은 분들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어머니의 일생은 한을 삭이시며 사시다가 15년 전 떠나셨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 권병길.

- 빛을 따라가다가 이윽고 연극무대로 올라가 첫 출연료를 받은 이야기가 재미있다.

"연극을 시작한 지 6년쯤 지난 뒤 첫 출연료를 받았다. 극단 신협의 지방공연을 끝내고 박암 선생이 여관 마루에 걸터앉아 배우들 이름을 부르며 “어이 수고 했어”라면서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받은 5천원 봉투는 지금 가치로 50만 원쯤 된다. 두 번째는 극단 자유에서 <파우스트>를 끝내고 1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극단 성좌의 <봄날> 공연 때였다. 권오일 대표가 오현경 주연배우가 사정이 생겨 대신 배역을 맡아달라면서 만 원짜리가 두툼하게 들어 있는 봉투를 건네준 때였다."

- 처음 영화에 출연하면서 겪은 일화도 재미있게 읽었다.

"영화는 50대가 되어 출연 요청이 왔다. 강우석 감독이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에 나를 캐스팅했는데 내 연기가 살아났던 덕분에 그로부터 영화배우로 겸업 활동이 이어졌다. 잊을 수 없는 작품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그때 그 사람들> <돈의 맛>을 꼽고 싶다."

- 책 속에는 수많은 연극 연출가와 배우들의 이야기가 수북하다. 김정옥 원로 연출가이며 중앙대 명예교수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이해랑 선생의 <햄릿>과 김정옥 선생의 <햄릿>에 모두 참여했다. 김정옥 선생의 <햄릿>에서는 유인촌이 타이틀 롤, 한영애가 오필리어엔, 내가 클로디오스왕, 김금지가 왕비, 박웅 선배가 포르니오스 역을 맡았다. 그 공연은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 순회를 하고 프랑스와 독일공연까지 이어졌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독일 본에서 공연 중 유인촌 배우가 부친 타계 비보를 듣고도 약속된 무대를 떠나지 못해 마음 아파하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른 배우들이 하지 못한 섹스피어의 <햄릿>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모두 공연할 수 있었던 기회가 주어진 것도 행운이었다."

- <별의 노래> 공연 때 객석을 차지해 당신의 모노드라마를 인상 깊게 보았다. 보고 느낀 대중문화 유래를 온 몸의 연기로 보여 준 공연이었다.

"인생은 외롭다. 사랑의 숨결이 살아있는 옛 추억은 그 외로움을 채워준다. 무대 위의 배우를 통해 객석의 추억을 되살려주려는 것이 그 작품이었다. 명동 국립극장에서 김동원 장민호 배우의 <오셀로>를 보며 감동했던 일, 낙엽이 흩어지는 거리에서 스피커를 통해 듣던 <꿈은 사라지고> 노래, 뮤직홀에서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 테마곡을 관객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 이청준, 김명곤의 만남도 두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영화 <서편제>의 작가와 주인공 배우 이청준 김명곤 씨를 만나면서 연극 <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에 출연하게 되었다. 덕분에 서울연극제 심사위원 24명중 23명이 나에게 주연상의 찬성표를 던졌다."

 - 이진수, 권성덕, 백성희, 최명수, 심우성, 노경식, 추송웅, 이혜영, 박인환, 공호석, 조상건, 정상철, 김재건, 이문수, 조환희, 원영애, 박팔영, 장남수, 기국서, 구희서, 정중헌, 장두이, 박완서, 이상우, 백전교, 최현민, 박찬석, 고학찬, 이윤영, 최치림, 김영렬, 배해일, 권오일, 강유정, 조민, 손성목, 김하세, 패드릭 터커(영국), 아젠 코트(프랑스), 문고헌, 정일성, 김석만, 윤우영, 최용훈, 전훈, 박근형, 이성렬, 안경모, 이상춘, 전세권, 윤현식, 김성노, 이해재, 채승훈 등 연극 인생을 함께한 연출가와 선후배 배우들의 이야기가 망라되어 있다. 기억력도 뛰어나고 추억에 대한 집착도 남다른 데가 있는 것 같다.

"연극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닌가? 그 무대 안팎에서 만나 인연이 된 사람들을 어찌 잊고 살겠는가. 언제나 만나고 싶고 그리워하며 산다.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분도 많다."

 - 낭만이 넘쳐나던 시대 명동의 예술인들 이야기도 시선을 모으게 한다.

"60년대 명동에 카페 떼아뜨르가 있었다. 문화 예술계 명사들의 아지트였다. 극단 자유 이병복 대표가 운영했던 그곳에서 연극, 시낭송, 국악 등 다양한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 시대 연극무대를 이끌었던 이병복 김정옥 선생이 바로 오늘날 나를 배우로 남게 해준 구루였다."

- 속칭 ‘쫑파티’라는 말이 있다. 공연을 끝내고 기념 회식을 하는 자리인데 연극 쪽에서 그런 흥겨운 모임이 많았던 것 같다.

"내가 100편이 넘는 연극 작품에 출연했으니 ‘쫑 파티“도 100번 넘게 치루었다. 연극인의 쫑파티는 조촐하지만 격려와 위로를 나누는 아름다운 파티이다. 잠시 온몸을 던져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마무리하는 사랑과 우정의 자리와 같다."

- 북으로 간 명배우 황철을 생각하며 쓴 고백도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은 근대 연극사에서 눈부시게 남아있다. 1948년 북으로 떠나 그곳 연극 예술계의 대부가 되었지만 이곳에 두고 간 활동 흔적도 전설과 같다. 나와 한 고향이라는 데서 일찍이 그의 이름과 행적을 유심히 기억하게 되었고 그의 인생을 소상하게 알고 있다. 그도 지방의 유랑극단을 만나 연극에 빠져들었고 남과 북에서 정상의 인기를 누린 배우였다는 점에서 동경심을 버리지 못했다."

- 못다 쓴 글, 못다 한 말이 있다면?

"2021년을 기점으로 내가 연극을 할 수 있는 시간은 10년쯤 될 것이다. 은퇴를 생각하지만 구순에 가까운 이순재 선배의 모습을 보면 15년쯤 좀 더 길게 잡고 있다. 또 박정자 이호재 권성덕 전무송 박웅 손숙 오영수 선배님들도 건재하시니 은퇴란 말을 끄집어내기가 조심스럽다. 남은 시간에 몸이 성한 한, 더 깊이 있고 원숙하고 사려 깊은 배우의 길을 가려고 한다."

사진 제공=권병길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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