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오랜만에 보는 리얼리즘 연극 '소작지', 후배들에게 장 펼쳐준 주호성의 미덕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오랜만에 보는 리얼리즘 연극 '소작지', 후배들에게 장 펼쳐준 주호성의 미덕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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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경식 작, 장봉태 연출의 극단 원 8회 공연
노경식 작, 장봉태 연출의 '소작지' 콘셉트 컷/사진=극단 원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대학로 공간아울에서 공연하는 노경식 작, 장봉태 연출의 '소작지'(8월12일~16일)는 통상적 소극장 공연 같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요즘 연극동네에서 흔치 않은 미덕과 의도가 담겨있다.

극단 원(대표 장성원)의 8회 작품인 '소작지'는 1979년 극단 고향이 박용기 연출로 공연했고, 이때 극단 원의 후원자인 주호성 배우가 지주의 마름인 사주사 역을 빼어나게 해내 화제를 모았다. 이어 1983년 제1회 전국지방연극제에서 광주시민극단이 '소작지'로 참가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소작지'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이제 먹고 살만큼 되어 일제 폭압에 시달린 우리 농민들의 서글픈 자화상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겠지만, 젊은 연극인들이 이같은 사실주의 연극을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필자를 포함해 연극계 원로 몇 사람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 좌장격인 노경식 극작가와 주호성 배우도 있었다. 노 작가가 주호성 배우가 했던 사주사 역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자, 주 배우가 “그럼 '소작지' 다시 올리고 사주사 역 제가 할께요”했고, 장남수 공간 아울 대표와 허성윤 동방인쇄공사 사장이 맞장구를 쳐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필자는 극단 원이 '소작지'를 공연한다면 악덕 마름 사주사 역은 당연히 주호성 배우가 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캐스팅을 보니 주인공 공차동 부부를 비롯해 사주사와 삼동 역 등 주요 배역은 극단의 중견들이 맡았고, 주역급인 권혁풍 손선근 박기산 주호성은 단역을 맡았다. 이같은 일은 연극계에서 흔치 않은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극단의 후원자인 주호성 배우는 '소작지'가 “일제의 탄압과 가난 속에서도 끝내 땅을 지켜낸 우리 민족의 굳은 의지를 극화해 젊은 세대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배우들에게 체험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의도를 밝혔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극의 험로를 걸으려는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연기력이 뛰어난 시니어 배우들은 2선으로 물러나는 ‘아름다운 배려의 미덕’을 보여준 것이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리얼리즘 연극을 제대로 구현한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적잖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민병구 무대미술가가 1900년대 산골의 초가집과 대나무 숲을 정성 들여 재현해 냈다. 초가 지붕 위에 박덩이들이 뒹글고 빨간 고추가 널려있다. 장독대와 목화 송이 등 소품들도 모형을 쓰지 않았다. 배우들이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기 위해 사투리 코치에게 지도를 맡겼고, 아역들을 캐스팅해 한 가족의 면모를 리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연극 '소작지'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 극단 원의 후원자이자 과거 '소작지'에서 지주 마름인 사주사 역을 맡아 열연했던 주호성 배우(사진 맨왼쪽)는 후배에게 역을 내어주고 단역을 맡았다. 주역급인 권혁풍 손선근 박기산 배우 역시 2선으로 물러나는 ‘아름다운 배려의 미덕’을 보였다. 이같은 일은 연극계에서 흔치 않은 파격이 아닐 수 없다./사진=정중헌

그래서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아스라한 농촌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활자로만 남아있던 당시 민초들의 삶이 배우들에 의해 무대 위에서 실제처럼 재현되는 사실감은 연극의 마력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정서적 아우라를 통해 무뎌있던 당시를 살지 않은 관객들은 감정 이입이 되고, 화도 치밀고 울컥하는 감성을 체험케 해준다. 젊은 세대들에게 외면받아온 리얼리즘 연극을 젊은 연극인들이 되살려 냈다는 점이 '소작지'의 강점이다.

이런 두 가지 특징을 지닌 '소작지'를 12일 관람하고 페이스북에 올린 필자의 리뷰 일부를 옮겨 본다. 

지주의 수탈, 마름의 만행, 땅을 지켜낸 농민...

노경식 작, 장봉태 연출의 '소작지' 콘셉트 컷/사진=극단 원

극단 원의 '소작지'는 타임머신을 타고 일제 말기로 간 듯 모든 게 리얼했다. 민병구의 무대는 그 시대 농가를 옮겨놓은 듯 사실적이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민초들의 이야기는 더 진솔해 실감 있게 와닿았다.

장봉태 연출은 중견임에도 리얼리즘 연극을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요소마다 감정선을 끌어올려 폭압에 당하는 민초들의 한과 인고를 아프고 저리게 그려내 리얼리즘 연극의 맛을 살려냈다.

땅은 일구는 사람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갖은 굴욕을 참아내는 공차동 역 주현우, 마름에게 능욕당해 목숨을 끊으려다 이를 악물고 가족을 지키는 아내 역 박수아가 극을 야멸차게 이끌었다. 다만, 톤을 높여 연기를 하다 보니 대사의 내용전달이 좀 덜 되는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

여기에 사주사 역 정우석이 교활하고 얄미운 캐릭터를 무던하게 살려냈고, 삼동 역 송용기가 울분을 삭이는 패기 넘치는 신선 연기를 펼쳤다. 일본인 지주의 몸종으로 팔려간 점순 역 강연경은 나어린 처녀 역을 어색치 않게 해냈다. 노래까지 부르며 막내딸 역을 똑부러지게 연기해 낸 정하빈, 지붕 위에 올라 목격자 역할을 한 동식 역 이주영도 때묻지 않은 연기를 펼쳤다.

장봉태 연출 '소작지'에서 단역들의 감초 연기가 없었다면 농촌극의 아우라가 반감되었을 것이다. 지금 한창 무대에서 연기력이 무르익은 시니어 연기자인 주호성 박기산 손선근 권혁풍과 심마리 신비경이 동네 노인, 노파, 이웃과 순사 역을 약방의 감초처럼 맛깔나게 해내 단역들의 파워와 매력을 물씬하게 발산했다.

연극 '소작지'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  

지금 우리 연극계에서는 역사 연극도, 시대극도 사라지는 추세며, 사실주의 연극도 정통성을 찾기 어렵다.

이런 와중에 사실적인 무대에서 사실적인 연기를 펼친 '소작지'는 복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뛸만한 장을 펴놓고 자신들은 뒤로 물러서는 주호성의 배려와 시니어 배우들의 미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코로나 확산으로 긴장이 감도는 현실에서 만석을 이룬 '소작지' 첫날, 이순재 대배우, 대학로 연극인광장(대연장)의 노경식 회장, 전세권 정일성 이승옥 권병길 장남수 최창주 유태균 복진오 이태훈 등 원로와 중진들이 단체 관람을 해 '소작지' 공연의 의도와 리얼리즘 연극에 대한 원로들의 관심을 보여준 점도 특기할만 하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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