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안톤 체홉의 생애 마지막 희곡인 ‘벚꽃동산‘은 아마 국내 대학과 연극 동네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다. 대학 연극과에서는 기말 또는 졸업 작품으로 매년 올려지고, 대학로에서는 연출가들이 저마다의 해석으로 체홉의 희비극을 재창작해 빈번히 공연한다.
프로와 아마가 공존하는 제3의 길을 모색하며 예술공동체 길을 창단한 최영환 연출은 '갈매기'에 이어 '벚꽃동산'을 잇달아 무대화하며 자신의 언어로 체홉을 해석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그 하나는 ‘연극적(theatrical)’이며, 다른 하나는 ‘웃픈 인간상’을 배우들을 통해 그려내는 재미다.
최 연출은 체홉 작품의 내면에 깔려 있는 ‘비극같지만 희극 같은 상황’에 주목,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최대한 밝고 경쾌하고 희극적인 분위기로 보여주겠다”고 의도를 밝혔다.
5일 대학로 열린극장에서 개막한 ‘벚꽃동산’(~8일까지)은 첫 장면 하녀 두나샤(김세정) 등장부터 경쾌했다. 영주 라네브스카야의 오빠인 가예프(신황철)는 당구 얘기를 중얼거리며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희극적 연기를 펼쳤다.
샤를로따(이효숙)는 마술로 즐거움을 선사한다. 영주의 딸 아냐(장채원)와 러브라인을 펼치는 빼쨔(윤준호)는 캐릭터를 연출의도에 딱 맞게 설정해 만년 대학생이지만 주눅들지 않고 경쾌한 코믹 연기를 했다.
실패한 이웃 농장주 삐쉭(최만수)도 알약을 사탕 먹듯이 입안에 털어넣고 틈만 나면 돈타령을 한다. 2막에 두나샤와 야사(이지후)와 에삐히도프(나준연)의 삼각 데이트도 상당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다고 최영환의 ‘벚꽃동산’이 희극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영주 역에 관록의 배우 이주화를 캐스팅했고, 연기파 배우면 한번쯤 탐내는 고령의 하인 피르스 역을 40여년 경력의 고인배 배우가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여기에 노비의 아들로 벚꽃동산을 경매에서 사들인 로빠한(변형범)과 영주의 수양딸 바라(임소영)가 극의 핵심을 진지한 연기로 펼쳐내 조화를 꾀했다. 필자는 로빠한 역 변형범의 노력하는 연기에 박수를 보냈다. 가장 많은 양의 대사를 가장 유려하게 펼쳐내면서 핸디캡이 있음에도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렇게 등장인물과 연기자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배우 각자가 자신의 연기를 역동적으로 해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최영환 연출은 배우들에게 방향을 설정해주고 최대한 개인의 역량을 끌어내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맨투맨 연기를 하다보면 팀웍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이번 ‘벚꽃동산’을 보면서 첫공이라 긴장된 점도 있었겠지만 개인기는 괜찮았는데 앙상블이 상대적으로 덜 이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체홉은 자신의 인생관이 담긴 따듯한 눈으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인간의 선함, 진실함, 사랑과 회한의 감정이 배어있다고 본다. 이러한 인간의 심오한 개성은 개인기만으로 어려우며, 서로 치고 받쳐줄 때 자연스레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보는데 이 점이 좀 아쉬웠다.
그러나 이 역시 필자의 좁은 소견일 수도 있다. 시대가 변했고 배우들도 젊어지면서 안톤 체홉에 대한 해석도 예전과는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체홉의 무대는 사실적이고 거창했다. 배우들도 원숙했고 묵직한 연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관객들은 체홉 작품에 녹아든 인간성에도 매료됐지만 무대에 흐르는 기류, 러시아 연극이 뿜어내는 허무주의 같은 독특한 아우라에 매혹되었다. 특히 이 작품의 라스트에 관객들은 객석을 떠나지 못하고 숙연했다.
밪꽃나무가 퍽 퍽 베어지는 소리 속에 집사 피루스는 자신의 인생을 마감한다.
“산 것 같지도 않은데 한 평생이 다갔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뼈 속까지 배어드는 독백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었지만 “연극적 아우라”란 마술에 넋을 빼앗기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어려운 여건에서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체홉 공연에 이런 아우라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최영환의 ‘벚꽃동산‘은 작품의 내용에 충실하면서 연출의 해석과 의도, 즉 비극적이지만은 않은 인간사의 복잡한 관계를 배우들을 통해 구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고, 무엇보다 체홉을 처음 접한 관객들에게 고전 명작의 재미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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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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