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국립극단 70주년 빛낸 천승세 작·심재찬 연출 '만선'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국립극단 70주년 빛낸 천승세 작·심재찬 연출 '만선'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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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얼리즘 연극 '만선', 한편의 영상처럼 돋보인 미장센
국립극단 '만선' 콘셉트 컷./사진=국립극단
국립극단 '만선' 콘셉트 컷./사진=국립극단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이것이 국립극단 연극.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9월 3~18일) 중인 천승세 작, 심재찬 연출의 '만선'은 우리의 고전이 현재에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고, 리얼리즘이 연극이 어떻게 새로워져야 하느냐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국립극단은 한 국가의 연극을 대표하는 기관이고 국고로 운영된다. 따라서 그리스 국립극단이 희랍비극에 정통하듯 대한민국 국립극단은 우리 정서와 토속 언어의 창작극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중국 작품을 대표작으로 내세우서나 번역극의 비중이 더 많았다.

'만선'은 지난해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으로 제작되어 공연하려다 코로나로 미뤄졌다가 명동예술극장에 올려졌다. 이 작품을 '국립다운' 작품으로 꼽는 이유는 국립 위상에 걸맞기 때문이다. 1964년 국립극장 공모 당선작이자 전형적인 사실주의 작품을 오늘의 국립극단 위상에 맞게 재조명하고, 오늘의 관객에게 맞게 재창조해냈기 때문에 '국립답다'는 것이다.

'만선'은 최현민 연출, 김성옥 백성희 주연으로 1964년 초연된 이후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따라서  70주년 기념작으로 선보이는 이번 '만선'은 그것들과 어떻게 차별화 되느냐가 관건이었는데 심재찬 연출의 '만선'은 첫 인상부터가 강렬했다.

연극 '만선' 공연장면./사진=국립극단

난파선 같은 대각선 구도의 거대한 경사면 세트, 그 너머엔 바닷물이 출렁일 것 같은데 방파제 밑에 함석으로 지붕을 덮은 집이 웅크린 모습으로 자리했다. 암전 상태에서 조명이 비추면 방파제 한켠의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 작은 움직임이 무대를 깨우고 관객의 의식을 흔들었다. 살아있는 무대에서 인간이 삶이 꿈들거릴 것같은 예감이 밀려왔다.

이 연극의 장점이자 아쉬움은 무대 테크닉이 너무 그로테스크하고 리얼해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를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불안감을 예고하는 대각선의 강렬한 구도 속에 인물이 작아지고, 조명과 음향이 빚어내는 사운드 속에 배우들의 대사가 잦아드는 느낌은 필자만의 느낌일는지도 모른다.

중간과 라스트의 폭풍 속 몰아치는 파도의 굉음, 특히 라스트의 무대 중앙으로 튀어오르는 물보라는 극예술의  장관이었다. 이야말로 무대기술과 조명과 음향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어우러져 관객에 실재감을 안겨준 것으로, 국립아니면  시도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만선'을 몇 차레 보았지만 심재찬 연출의 '만선'은 전체적인 전개가 전작들과 달랐다. 무엇보다 템포가 빨랐다. 디테일을 살리면 2시간이 넘을 런닝타임을 커튼콜 빼고 1시간 40분에 달렸다. 전작들이 암전으로 상상의 여백을 주었다면 심재찬 연출은 장면과 장면을 오버랩시키지 않고 뛰어넘었다. 중간에 있던 무당 장면을 앞으로 끌어내 흡인력을 높인 것도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전개시키기 위해서였다. 100분 공연에 암전은 두 번 뿐이었다. 하나의 장면이 끝나면 바로 다음 상황이 전개되는 연출이 매끄로웠다.

국립극단 '만선'/사진=국립극단
연극 '만선' 공연장면./사진=국립극단

다음은 작품의 해석이다. 전작들은 땅 끝에서 바다를 터전삼아 살아가는 벳사람들의 가파른 삶과 자식을 바다에 묻어야하는 에미의 한에 비중을 두었다.

이에 비해 심재찬 연출은 부자와 빈자의 양극화로 작품을 몰아갔고,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도 희망의 여지를 남겼다. 갑질은 횡행하고, 불합리한 사회지만 극의 주인공 곰치처럼 우직하나 신념을 가진 사람이 잘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메세지를 강조했다.

심 연출은 정형화된 리얼리즘 연극의 형식을 바꿔보려 했지만 '만선'에서 사실주의를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그의 장점은 회화를 방불케 하는 미장셴이다. 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대각선 구도를 무대에 실현시켜 그 사선에 배치되거나 움직이는 배우들의 동선 자체가 한편의 영상이자 미술작품 같았다.

연극 '만선' 공연장면./사진=국립극단

다음은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어떠했을까. 

징소리 울리며 부서떼 가득 싣고 돌아온 곰치네 가족은 팔자 좀 고치나 했는데... 배를 빌린 값에 터무니 없는 이자까지 더해져 선주에게 모조리 빼앗긴다. 이대로 포기할 곰치가 아니다. 다시 한번 만선을 염원하며 거칠어진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린다. 비바람의 검은 바다... 배 한척이 돌아오지 않았다. 

곰치는 파죽음이 되어 동료 선원에게 업혀왔으나 아들 도삼과 딸 슬슬이의 연인 연철은 돌아오지 오지 못했다. 넷째 아들마저 잃고 울부짖는 곰치 아내 구포댁은 절규하다가 간난 아들을 배에 실어 뭍으로 보낸다.

뱃사람 곰치는 대작에서 큰 역을 해왔던 김명수가 맡았다. 굉장히 고기를 잘 잡는 강인한 뱃놈 곰치는 “뱃놈은 그렇게 살아사 쓰는 것이여”라는 신념의 사나이다. 김명수 배우는 이같은 고집스럽고 우직한 캐릭터를 선 굵게 형상화했다. 최고의 어부란 자부심으로 배 한척 사고야 말겠다는 염원이 좌절되는 라스트의 짐승같은 포효가 처연한 인상을 남겼다.

국립극단 '만선'/사진=국립극단
국립극단의 연극 '만선' 공연장면./사진=국립극단

오랜만에 무대에서 만난 구포댁 정경순은 초반 우스개도 섞어가며 여유를 보이다가 아들 도삼이 또다시 바다귀신이 되자 넋나간 연기를 펼쳤다. 그가 온몸을 던져 풀어낸 실성한 에미의 울부짖음은 너무도 절절했다. 

그럼에도 이 연극에서 배우들이 커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대적 요인도 있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의 앙상블이 덜 강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배우 각자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냈지만 배우간에 또는 집단에서 조화가 약해 극의 아우라를 정점으로 끌어올리는 힘이 응축되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만선'의 무대를 안정되게 받쳐준 두 기둥은 국립극단 출신의 선주 임제순 역의 정상철, 범쇠 역 김재건 배우였다. 정상철은 한복이 어울리는 노숙한 풍채로 인정사정 보지 않는 선주 역을 칼칼하게 해냈다. 곰치의 딸 슬슬이를 넘보다 겁탈하는 범쇠 역 김재건은 얄미운 캐릭터를 개성 넘치는 연기로 잘 소화해 냈다.

국립극단의 '만선' 공연 후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개인적으로는 경기도립 출신의 김종칠이 어부 성삼 역을 감칠맛 나게 해내 '만선'의 분위기를 살려냈다고 본다. 마을어부 역 정나진도 중요한 대목을 또렷한 화술로 펼쳐냈다. 치매 노인 등 개성 연기를 펼쳐온 조주경은  첫 장면 무당 역을 통해 뱃사람들의 앞날을 토속성 짙게 펼쳐냈다. 곰치 아들 도삼 역 이상홍, 슬슬이 역 김예림, 연철 역 송석근 등은 자신들의 캐릭터를 똑부러지게 해내 연기파 배우로서의 장래가 기대되었다.

'만선'을 계기로 국립극단은 우리의 창작 고전을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무대 기술로 재조명, 재창작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극단으로서의 성격과 권위를 구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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