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3년간 치열한 준비...다큐영화 '우키시마호' 김진홍 감독
[인터뷰365] 3년간 치열한 준비...다큐영화 '우키시마호' 김진홍 감독
  • 김리선 기자
  • 승인 201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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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감독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외면받고 있는 아픈 역사"
-74년이 흐른 현재, 생존자는 두명 뿐
-3년간의 준비 끝에 생존자 영상 입수...한-일 오가며 1945년 귀국선 1호 '우키시마호' 참사 재현해내
'우키시마호'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 다큐 영화 '우키시마호'의 김진홍 감독. 김 감독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한국 정부와 국민조차 외면받고 있는 우리의 아픈 역사"라며 "역사적 실체를 알리고 싶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목소리엔 비장함이 묻어났다./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리선 기자] "(배에서) 손을 흔들고 같이 좋아했는데 갑자기 '뻥'하더니 배가 하늘로 올라가더니 툭 떨어졌다."(영화 '우키시마호' 영상 속 우키시마호 참사 생존자의 말)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경제 보복 조치로 한국과 일본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 가운데 우키시마호 참사를 다룬 김진홍 감독(1962~)의 영화 '우키시마호'가 주목받고 있다. 

3년간의 준비 끝에 19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영화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 징용자와 가족 등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제1호 귀국선 '우키시마호'의 폭파 침몰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다큐멘터리다. 

1945년 8월 25일 부산항에 도착했어야 할 제1호 귀국선 우키시마호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해 24일 일본 중부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 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수면 아래 침몰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오려던 수많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은 고향 땅을 밟지 못한채 수장됐다. 현재 이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상규명이나 희생자에 대한 사과나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우리 정부도 2015년 이후 관련 조사를 멈췄다.

지난 3년간 치열하게 자료수집을 해온 김 감독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의 영상을 입수해 당시 사건을 깊이 파고든다. 74년이 흐른 현재, 남아있는 생존자는 단 2명 뿐. 지난 70여 년간 생존자와 유족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위해 발 벗고 나섰지만, 국민과 정부의 무관심 속에 진상규명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있다.  

김 감독은 <인터뷰365>와의 인터뷰에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한국 정부와 국민조차 외면 받고 있는 우리의 아픈 역사다. 역사적 실체를 알리고 싶었다"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화 '우키시마호'의 김진홍 감독.

◆준비기간 3년..."역사적 실체를 알려야 겠다는 생각에 영화 제작"

-영화 준비기간이 3년이라고 들었다. 최근 한일간 갈등이 깊어지면서 이 영화가 주목받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예측해서 제작했던 건 아니다. 2016년에 지인을 통해 우연히 우키시마호 사건을 알게 되었다. 부산에서 포럼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진상규명위원회, 유족위원회, 후키시마 폭침 희생 추모위원회 등 3개의 시민 단체가 있다. 74년 전 사건이다 보니 이 모임의 활동도 뜸해진데다,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열심히 뛰었지만 개인이나 시민단체가 나서서 하기엔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 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의 역사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겠다는 취지로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배우 안재모 씨가 영화의 나레이션으로 참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다큐영화 연출은 처음인가.

30여 년 전부터 영화 제작에 관여 해오다가 2004년 본격적으로 '여고생 시집가기'에 제작으로 나섰고, 이후 영화 '회초리'(2011)에서는 제작겸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2015년 여성인권영화 '위선자들'이 감독 데뷔작이다. 다큐 영화는 이 작품이 처음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준비하게 됐나. 

원래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료 조사를 하고 공부를 하다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더라.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에 대해 현 상황에서 볼 때 일본 정부는 속이기에 급급하고, 한국 정부는 모른 척 한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과 한국이 진상 규명 자체도 안하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나.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었다. 역사적 실체를 알려야 겠다는 생각에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74년 전 의문의 폭발로 희생된 조선인 강제 징용자 '우키시마호 폭침'사건...현재 생존자는 단 두 명만 남아  

영화 '우키시마호'의 김진홍 감독.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한 내용을 설명해 달라.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부산항으로 귀국시켜 주겠다며 우키시마호에 1만여 명의 강제징용자와 가족등을 태우고 22일 일본 북동부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출발했다. 부산 항으로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일본인들은 뱃머리를 부산 항으로 틀지 않고, 일본 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항로를 택했다. 그리고 교토부 마이즈루 항에 도착한 24일 오후 5시 20분에 배가 폭침됐다.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자, 단일 해양 사건으로 가장 큰 사건이다. 8000여명이 죽었다. 

- 우키시마호의 목적지는 애초부터 부산항이 아니었다고 보는 건가.

그렇다. 그동안 준비하고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마이즈루 항의 폭침은 군사적 조치로 보고 있다. 일본은 해방 전 패배를 직감하고, 아오모리 현 시모키타반도를 요새화를 하는 작업을 했다. 만여 명의 한국인 강제노동자들이 오미나토 지역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이 패망 한 후 가까운 지역에 있던 소련군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생각하기에 소련이 오미나토 쪽으로 내려오면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 징용자들이 소련군과 합세할 수 있다고 보고 징용자들을 적으로 간주한 거다. 일본 입장에서는 위협적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들이 한국 땅에 돌아갔을 때 손해배상 등 복잡한 문제 등도 있으니 없애버릴 생각이었을 거다. 당시 일본은 강제징용자들과 한국인들을 부산항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면서 오키시마호에 타지 않으면 식량배급을 중지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렸다고 한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고국에 돌아간다는 꿈을 가졌을 것이고, 모든 세간살이를 싸서 그 배에 탄거다. 

김진홍 감독의 영화 '우키시마호'의 생존자 증언 영상

 -이 우키시마호 사건은 지난 70여 년간 크게 조명되지 않았다. 많은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건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들면서 우키시마호 폭침의 진상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중요했고, 우선이었다. 이맘때가 되면 늘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역사책에는 한 줄도 안 나온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은 한국의 역사이지 않나. 그런데 너무 모른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대한민국 조선팔도 열 곳의 도시를 찾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아십니까, 난징사건을 아십니까" 이 두 개의 질문을 펼쳐놓고 표시를 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난징 사건은 어느 정도 알지만, 우키시마호 사건을 너무 모르더라. '모른다'는 대답이 무려 94%였다. 10명중에 94명이 모르는 사건이다. 중국의 역사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른다는 건 문제 아닌가. 역사의 실체를 알려야 겠다는 마음이 컸다. 

- 오래전 사건이다 보니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았을 텐데. 

74년 전 일이다보니 자료가 없었다. 증언위주로 영화를 전개했다.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 규명회 전재진 회장으로부터 1985년부터 80여명의 생존자를 인터뷰한 영상을 확보했다. 실질적으로 폭침됐을 당시 그 배에 탔던 생존자 분들의 증언영상이 큰 힘이 됐다. 또 자료를 찾기 위해 일본을 두 번 찾았다. 우키시마호가 출발한 일본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갔었고, 폭침된 마이즈루 항에 갔었다. 당시에 배에 폭침 장면을 보거나 얘기를 들었다는 일본 어촌의 어민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 생존자 장영도 할아버지, "진상규명, 정부가 모른 척 말고 나서줬으면"

-현재 생존자가 계신가.

그 사건을 당하셨던 분들은 거의 세상을 다 떠나셨다. 장영도(87)할아버지와 최석준(98)할아버지 두 분만 살아계신다. 

장영도 어르신은 폭침 당시 13세였다.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 누나와 형, 여동생 총 6명이 귀국선을 탔는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버지와 형 그리고 자신뿐이었다더라.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과 함께 선실에 있다가 육지가 보인다는 말을 듣고 궁금한 마음에 선실 밖으로 나왔는데, 같이 따라 나오려는 여동생을 어머니가 잡았다더라. 그리고 나선 10분 후 배가 폭발했다고 말씀하셨다. 선실에 머물렀던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배가 폭발했을 당시 내부 선실에 탔던 사람들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했다더라. 

최석준 할아버지는 당시 24세로, 징용으로 끌려가셨다가 귀국선을 타신 분이시다. 당시 가바야마 비행장에서 일하면서 자살특공대(가미가제) 교육을 받았다고 하셨다. 교육 3개월째 들어가던 날 해방이 되서 오키시마호를 타고 돌아오시던 중 그 사건을 겪었다. 

-이분들과 만나봤나. 

최석준 할아버지는 사실 연세가 많으셔서 기억력이 흐렷해지셨을까봐 걱정을 좀 했다. 그런데 뚜렷하게는 아니더라도 그 사건만큼은 폭침 당시 어디에 탔는지 기억하고 얘기 해주셨다. 

장영도 할아버지는 광주의 한 고등학교 교장 출신이신데, 진상규명을 위해 온 힘을 쏟으신 분이시다. 처음엔 인터뷰를 안 하시겠다고 했다. 사건이 일어난 8월 중순이 되면 매년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는데, 다시 잊었던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도 이 영화를 볼 수 있고, 이 영화를 통해 태평양전쟁침략으로 고통 받은 17개 국가들이 힘을 합쳐 일본을 상대하자는 제 생각에 동의하시고 마음의 문을 열고 응해주셨다.

댁에 찾아갔더니 고이 간직해온 어머니 모습이 담긴 흑백 흐린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놓으셨더라. 그 사진을 쓰다듬으며 장영도 어르신이 하시는 말이 "지금 제가 1세대인데, 내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이 진상규명자체가 더 희박해지겠죠. 그 누가 나처럼 나서서 우리 어머니의, 우리 아버지의 일을 해결해줄까요"라고 하시더라.

손해배상을 따지자는 게 아니고, 왜 그들이 죽었어야만 했는가 정부가 모른 척 하지 말고 나서줬으면 하는 거다. 아직까지도 그 차디찬 마이즈로 항 바다 밑에 수천 명의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이번 영화 제작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던가. 

장영도 어르신이 인터뷰를 하기 전에 꼭 가야할 곳이 있다고 하셨다. 순천에 위치한 어머니 묘소였다. 아버지 묘소 옆에 가묘가 세워져 있었다. 가묘 앞에서 하시는 "말씀이, 어머니 저도 아흔의 나이를 바라보는 늙은이가 됐습니다. 이제 어머니 곁으로 가야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을 것 같은데,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 진상규명조차 못해서 너무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 용서해주십시요"라고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 모습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이 영화가 이를 해결해줄 수 있겠냐만은 유족들의 아픔을 쓰담듬어 주고, 정부가 그분들의 아픔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74년 전 사건, 남아있는 사진은 배 사진 1장 

<인터뷰365>와의 인터뷰 자리에는 영화 '우키시마호'의 김진홍 감독과 제작사 메이플러스 백지희 대표(사진 오른쪽)도 함께했다. 영화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겠다는 김 감독의 취지에 공감해 영화 제작에 뛰어든 백 대표는 영화 '우키시마호' 촬영 당시 일본어 통역을 도맡기도 했다./사진=인터뷰365 

- 기존 다큐멘터리와 차이점이 있다면.

일반 다큐는 팩트 내지는 남아있는 현재 자료들을 기반으로 제작하지만, 이 사건은 74년 전 이야기고, 남아있는 배 사진은 1장뿐이다. 자료가 없다보니 '당시 이랬을 것이다'고 생각해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폭침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못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부푼 마음으로 배에 오르던 그분들을 떠올리며 찍었다. 물에 빠져 가라앉은 순간까지도 고향을 생각했을 그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촬영 내내 마음이 아팠다.  

- 역사적 사건을 재현해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폭파신 장면 등은 어떻게 구현 했는가. 

CG(컴퓨터그래픽)활용을 많이 했다. 증언자들의 얘기를 듣고 CG로 폭침장면을 구현해냈다. 배가 폭침된 후 많은 강제징용자들이나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바다에 빠지는 모습은 대역 분들과 함께 실사로 찍었다. 파주에서 7m수조를 빌려 촬영했는데,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 

◆ 숨어서 찍어야 했던 일본 현지 촬영..."희생자 추모비 세우고파"

영화 '우키시마호'의 김진홍 감독.

- 영화를 위해 한국 전역과 일본 현장 취재를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촬영을 위해 당시 사건이 일어났던 일본 마이즈루 항 지역을 찾았다. 가보니 지금은 일본 해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74년 전 사건 당시 시신을 불태운 장소가 군부대 앞마당이 됐더라. 부대에서는 촬영을 못하게 할 것 같아 숨어서 했는데, 촬영 카메라에 일본 경비군의 눈과 딱 마주친 거다. 카메라를 빼앗길까봐 도망쳤다. 도망치고 10분 후 사이렌이 울리더라. 조용해질 때까지 몇 시간을 숨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또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에 대한 설문조사를 일본에서도 진행했는데, 일본인들이 굉장히 그 부분에 대해 예민해 하더라. 바로 일본 경찰이 찾아와 설문조사를 못하게 했다. 더 이상 진행은 못하고 접어야 했다.  

-지난 8월 24일 부산에서 개최된 제8회 우키시마호폭침 희생자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에도 참석했다고 알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바라는 바가 있다면. 

마이즈로 항에 폭침된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에 희생자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마이즈로 항 근처 한 중학교 교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서 만든 추모비다. 물론 희생자를 위해 추모비를 세운 건 좋지만, 그 추모비에는 '순난(殉難)의 비'라고 쓰여 있다. 순난은 자의적으로 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는 의미다. 한국인 징용자들이 일본을 위해 돌아가신 게 아니지 않나. 유족위원회에서 몇 번에 걸쳐서 추모비 위원회 측에 '희생의 비'라고 바꿔달라고 요청했는데 일본 측에서 거절했다. 하물며 한국에는 이마저도 없다. 만약 이 영화로 수익이 생긴다면 제가 추모비 세우는데 앞장서겠다고 추모위원회와 유족위원회 측에 공표했다. 고국 땅에 돌아오지 못한 영혼을 위한 비를 세우고 싶다.  

 

 

김리선 기자
김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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