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여기는 터키 카이세리이다. 이제 2021년부터 햇수로 4년 동안 머물던 정든 이곳에서 노래하는 삼국유사를 시작했는데 오늘 쓰는 열다섯 번째 이야기는 의상과 선묘의 노래이다. 열여섯 번째 이야기부터는 서울로 옮겨가서 쓰게 될 것이다. 감회가 인다. 이곳은 아름다운 천국 같기도 하고 필설을 함께 나눌 동무 없는 유배지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발 4천 미터의 에르지예스산이 아버지처럼 나를 보우하고 앞산 아리산이 나를 매일 아침 상냥하게 맞아주었다. 눈뜨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머니 가슴 같은 아리산. 내가 2000년도부터 만들고 25년 동안 공들인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의 놀라운 발전에 함께 해서 좋았다. 2000년도부터 3년 동안은 학과 인프라를 구축했다면 20년 뒤 복귀해서는 소프트웨어 구축에 힘썼다. 앞으로 한류학과로 나아가야 할 것임을 체득하고 배운 것을 귀국해 남은 힘을 쏟을 작정이다. 터키의 학생들, 이웃들을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2주에 한 번씩 만나는 나의 글동무들 '노래하는 삼국유사'의 독자들께도 감사를 전한다.
오늘은 그리하여 승속을 초월한 의상과 선묘의 부석사 사랑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의상의 생애와 부석사 창건에 중요 인물인 선묘에 대하여 송고승전과 참고자료를 재해석한 선묘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묘의 사랑 이야기
제가 한 사나이 대장부를 사랑했지요
수려한 외모에 훤칠한 왕족 스님
오랜 배 멀미에 창백해지셔서는
중국 양주의 우두머리인 울 아버지를
찾아왔더랬지요
그를 극진히 간호하며
병이 낫기를 기도하다
마침내 제게 찾아온 사랑
그는 그윽한 눈매로
바라보기만 합니다.
부처의 자애로운 눈빛으로
저를 움직입니다
저의 목숨같은 사모에도 그리하시니
제가 세간의 사랑을 접습니다
출세간의 사랑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이생에 만났으니 됐습니다
세세생생 만나기를 서원할 수 있어
사무칩니다
이생에 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하겠습니다
다음 생, 이 인연으로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을 지극히 사모하는 일
지복이자 지옥이겠습니다.
10년 동안 그대가 수행하는 곳에
정성으로 보시하는 기쁨
저의 지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날이 왔습니다.
그가 떠나갑니다.
마지막 준비한 보시라서 너무 정성을 쏟았을까요
배 닿은 곳에 가니
아차 배가 벌써 떠나갑니다
눈에 잡힐 듯
손에 잡힐 듯
가로막는 바다여 바다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부디 이 손으로 지은 옷이
의상스님께
가.기.를.
애오라지 빌었습니다.
그때 하늘도 해도 바람도
천지자연이
저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바람이 제 보따리를 낚아채
의상 그대에게 건넨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옷이 그에게 닿은 순간
저의 혼신은 함께 그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옆에서 지키고 싶었습니다.
스님을 힘들게 했던 바다여
제가 바다의 신이 되어지이다
용이 되어지이다.
저와 천지신명이 또 한 번 혼연일체
저는 이미 용이 되어
의상스님의 배를 제 등에 싣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신라에 도착했습니다
당나라에 가는데 10년
신라로 오는데 10년
이제 그 어렵사리 배운 가르침을
펼쳐야 할 곳을 찾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요충지
전쟁이 많을수록 그의 가르침이 필요한 곳
영주 봉황산 경치 수려한 명당자리
부석사가 된 그 자리
그러나 이미 오백이나 되는 이들이 터를 잡은 곳
그저 지극한 마음으로 도와드리고 싶었지요
그랬더니 그곳의 큰 신이 커다란 바위로 변해
그들 위에 떠서 혼비백산 달아나게 하였지요
이처럼 천지와 신명은 언제나 저의 편
의상스님은 그곳에서 화엄을 펼쳐
해동화엄의 첫 스승이 되었습니다
삼천의 제자를 두었습니다.
긴 세월 스님의 가르침을 들은 저였지만
십대 제자에 이름을 둘 수 없습니다.
용의 모습으로 스님 곁을 지키는 것이
이생의 서원이었으니
세간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불러도
스님은 알고 계십니다
저 없이 스님 없고
스님 없이 저 또한 없다는 것을
저는 죽어서도 부석사 금당 아래 묻혀
스님의 첫 전법지를 지키며
세세생생 제자의 약속을 이어갑니다.
스님 또한 신라의 걸출한 화엄스승으로
세세생생 가르침을 펼치고 계시지요
이것이 우리의 출세간 천년의 사랑법입니다
의상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의상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누구라도 의상(義相)에게 가 닿기만 하면 의상에게 걸맞은 대단한 사람이 된다. 의상의 10대 제자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여기서 살펴 볼 특별한 첫 제자 선묘는 더욱 대단하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에 관련된 내용이 자주 나오는 편이다. 주로 원효와 바늘과 실처럼 신라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등장한다. 문무왕 시대 의상이 유학 중 김인문에게 당나라 침략 계획을 알려 명랑법사에게 사천왕사를 세워 막게 하는 이야기, 흥륜사에 금당 십성이 모셔져 있는데 그 중 의상이 아도 염촉과 함께 동쪽에 안치된 이야기, ‘전후소장사리’ 조에 중국 화엄 2조 지상사 지엄선사와 함께 도선율사에게 공양을 받는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낙산에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짓는 유래가 담긴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이야기와 원효와 당나라 유학을 떠나던 이야기가 담긴 ‘의상전교’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추동기’의 저자 지통의 이야기가 나오는 ‘낭지승운 보현수’와 ‘진정사 효선쌍미’의 주인공 진정에 대한 십대 제자 이야기는 걸출한 제자를 둔 스님의 학문 세계를 대변해 준다.
부석사 창건 설화의 선묘와 의상
부석사 창건의 유래가 된 선묘낭자의 의상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불심 또한 십대제자의 훌륭함을 뛰어넘는 스토리텔링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하지 않고 ‘송고승전’에 전한다.
또 일본 교토 고산사에도 전해져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듯한 의상과 선묘의 진영과 조각이 일본에서 국보로 대우받고 있다. 일본 교토 고산사에는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라는 일본 국보가 있는데 그 안에 의상과 선묘, 원효에 대한 기록과 그림이 있고 이를 명신(明神)으로 모시고 있다. 명신이란 훌륭한 사람을 부처처럼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한다. 13세기 가마쿠라시대 도가노산에 있는 고산사를 명혜(明惠)가 화엄종 사찰로 중흥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 중국, 일본에 공히 그 명성이 자자한 의상,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우리나라의 진영을 모본으로 하여 그려졌을 것이라 추측하는 고산사의 의상 진영은 흰 얼굴의 후덕한 모습이다. 조선 영조 때 그려졌다는 우리나라 범어사의 진영도 얼굴이 흰 편이다.
이 모습 어디에서 사람들은 그토록 감화를 받은 것일까. 부처님의 후신이자 성인으로 추앙받고 그의 제자들도 아성(亞聖)으로 칭송될 만큼 그의 감화는 측량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그러한 그에게 십대 제자보다 제일 먼저 제자가 된 선묘 아가씨. 그녀가 있어 그의 인생과 수행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자칫 일방적인 짝사랑 연정이나 선덕여왕을 사랑하다 불귀신이 되고만 지귀와 같이 비극적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세간의 이야기가 의상의 투철한 불심과 감화로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승화된 사랑이야기로 전한다.
의상의 출가와 당나라 유학 그리고 선묘
의상(625-702)은 화엄종의 교조이다. ‘삼국유사’에 아버지는 김한신(金韓信)이고 29세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다고 전하지만 ‘부석사비’에 전하는 19세 출가설이 정황상 더 설득력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650년 25세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 불교 유학차 요동으로 떠난다. 그러나 국경에서 첩자로 몰려 수십 일 만에 풀려난 후 11년 만인 661년 36세에 드디어 유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의상은 이와 같이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이루어내는 투철한 성격이었다.
이렇게 중국 당나라에 어렵사리 첫발을 딛자마자 주인공 선묘 낭자가 등장한다. 양주의 주장(州長)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도착해 머물게 되는데 그의 딸 선묘 낭자 또한 절세가인이었다. 선묘는 한눈에 의상을 흠모하게 된다. 그러나 의상은 출가한 승려, 더욱이 얼마나 오랜 세월 어렵게 기다려 온 유학인가. 파도가 아무리 몰아쳐도 뭍처럼 꿈쩍 않는 의상의 큰 뜻을 알게 된 그녀는 마침내 더 큰 사랑을 결심한다.
이생에서 맺지 못할 남녀 간의 결합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세세생생 스님께 귀의해 대승을 배우고 불도를 이루겠다고 서원한다. 불제자로서 의상이 대업을 이루도록 공양을 올리고 공부와 교화, 불사를 성취하는 데 전심전력할 것을 발원한다. 의상의 교화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 대목은 ‘석보상절’의 ‘선혜’와 ‘구이’의 만남을 연상시킨다. 연등불을 맞이하기 위해 구이의 꽃을 얻으려 하던 선혜에게 구이는 세세생생 선혜의 부인이 되는 조건으로 꽃을 건네고 후생에 석가모니와 야수다라 부부의 연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의상은 그 후 화엄종 2조 지엄에게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는데, 이때 남산 율종의 개조인 도선율사와도 교유한다. 그리고 중국화엄의 3조인 현수법장과는 귀국 후에도 수십 년 동안 교유를 맺는다. 10년 후인 671년 의상이 신라로 돌아올 때 다시 그동안의 보시공덕에 사례하기 위해 양주의 주장이자 그의 딸이 있는 선묘의 집을 찾아간다. 그 지방 수장의 딸이자 꽃답게 아리따운 선묘 낭자에 대한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일까. 선묘의 조각상을 보면 당나라의 후덕한 양귀비를 연상시키는 미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의상은 선묘를 만나지 않았다. 선묘가 의상을 위해 준비한 옷과 집기들을 가지고 달려갔을 때 이미 배는 떠나가고 있었다. 그 간절함과 의상에 대한 귀명을 그녀는 일심으로 염원한다. ‘원컨대 제가 서원했던 대로 이 공양물이 저 배에 닿게 하여지이다’ 그러자 질풍이 불어 그것을 새털처럼 가볍게 배에 안착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 결과에 놀란 선묘는 자신감에 차 더욱 큰 발원을 한다. ‘원컨대 이 몸이 큰 용이 되어지이다’ 하고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이 되어 그 배를 이끌고 신라에 안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누군가를 이토록 절대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천지자연도 그에 감응한다는 놀라운 이적의 스토리텔링이다.
의상의 부석사 창건과 선묘의 활약
귀국한 의상은 화엄을 펼칠 터를 찾는데 하필 500명이나 무리 짓고 사는 이교도들의 거처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러자 용이 된 선묘가 의상을 호위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신이 큰 바위로 변해 그들 위에 떠서 겁을 주어 혼비백산시키고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공에 ‘뜬 바위 절, 부석사(浮石寺)’라 이름하였다. 의상이 여기서 화엄을 펼치자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그중에서 십대 제자를 두게 되었다.
의상의 십대제자는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이다.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은 제자들의 면면들도 이채롭다.
이 중에서 진정은 홀어머니를 두고 남은 쌀을 모두 주먹밥을 만들어 의상을 만나러 간다. 3년 후 필경 걸식을 하다 죽었을 어머니의 부음에 진정은 일주일 동안 그 슬픔을 선정에 드는 수행으로 다스린다. 그것을 들은 의상은 소백산 추동 (송곳골)으로 들어가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설했는데 그때 지통이 노트한 것이 추동기라는 것이다. 그 지통은 이량공의 종이었는데 7살에 낭지에게 출가했다고 전한다.
표훈은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에게 화엄을 가르치고, 오진은 안동 골암사에서 밤마다 팔을 뻗어 부석사의 등불을 켰다고 한다.
또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도신(道身) 또한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도신장’을 남긴 제자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근기대로 의상을 스승으로 빛낸 제자들은 이렇게만 보아도 최소 12명이다.
해동 화엄초조 의상과 선묘의 이적 자취
의상은 그 후 화엄십찰을 이루고 ‘화엄경’을 위시해 ‘법계도’, ‘백화도량발원문’ 등을 강설해 해동화엄의 초조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선묘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석등 사이에 석룡으로 화하여 묻혀있다. 이 전설 같은 선묘낭자의 이야기는 실제 2001년 탐사 결과 13미터의 석룡의 모습으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 이생에서 또 세간에서 둘이 마음이 맞아 결실을 이루는 일 또한 지난한 만큼 행복한 일이다. 한 사람을 바라보며 세세생생 만나기를 서원하고 출세간의 법을 향해 망설임 없이 투신하는 선묘 낭자의 큰 사랑은 속인으로서 가늠할 길 없다. 선묘 낭자는 의상의 가르침대로 오척(五尺)의 몸을 가진 오체불(五體佛)을 실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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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원 칼럼니스트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교수,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튀르키예(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와 헝가리 ELTE대학교에서 한국학과 교수, 서울대 규장각과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교수를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여 년간 해외 한국학 학회 발표와 특강, 외국 학생들과 한국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로 홍익대 문학박사를 받은 국어학자이자 동국대에서 삼국유사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다. 현재 월인석보와 삼국유사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국내와 유럽을 중심으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 <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대장경의 길을 열다>,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자장과 선덕여왕의 신라불국토 프로젝트>, <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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