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덕, 진덕, 진성이여 내 뒤를 따르라
▶(7)선덕여왕이 모란을 품은 뜻은 에 이어서
지소태후를 아는가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우리에게 알려진 두 명의 ‘지소’가 있다. 한 사람은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지소태후(520?~574?)이고 또 하나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딸로 김유신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지소부인(627?~미상)이다. 이 둘을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오래전부터 지소태후(只召太后)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만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만천하에 이름을 알린 신라 여걸 미실을 쥐락펴락하는 태후였기에 삼국유사 속에 이러한 여인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소박한 마음으로 지소태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소태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라의 성골, 진골 순혈주의 유지 방편인 지소의 근친혼과 개방적인 태도에 대한 현대인의 반감 내지 부정적인 의식이다. 지소의 남자로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사람만 일곱이다.
다른 하나는 지소태후에 대한 중심 텍스트인 ‘화랑세기’가 여전히 위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해 지소태후의 이야기를 미루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진흥왕은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과 불교국가로서의 발전을 이룩한 왕인만큼 사료에 대한 다양성 차원에서 그리고 부족한 자료에 허덕이는 고대 시대를 들여다볼 또 다른 거울의 역할로서라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충실히 보필하는 화랑세기를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신라의 실질적 첫 여왕 지소태후
선덕이 여왕이 되기까지
나 지소태후의 역할이 컸음을 그 누가 알아주런가
신라에 불교를 공인한 아버지 법흥대왕
그 불교를 진흥시킨 나의 아들 진흥왕
나를 그저 법흥의 딸이자 진흥의 어머니이기만 했으리라 생각하시려나
아버지 법흥대왕 아들없이 돌아가시자
나의 남편이자 삼촌인 입종과 결혼하여 생긴 아들
진흥이 왕위에 오르네
겨우 일곱살
천지분간 없이 뛰어놀 어린 왕을 위하여
내가 왕노릇을 하였네
최초 모자가 왕이 된 첫 해
죄인을 사면하고 신하들 벼슬을 올려주고
화백회의 소관이던 군사통수권 남편 이사부에게 맡겼네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시키네
아버지 법흥대왕의 절 흥륜사를 완공하고 중국 양나라에서 진신사리 봉안하네
원화제도 폐지하고 화랑도를 창설했지
나의 남편은 일곱
나의 숙부 입종과 결혼, 성골 아들 진흥과 숙흘종을 낳고
고모 보현공주 아들, 영실각간에게서 영화 송화 두 딸을 낳았네
풍월주 이화랑에게서 얻은 만호부인
때로 입종의 딸이라 말들 하지만 나의 딸임에 틀림없으니
태종 이사부와 세종전군 숙명궁주를 낳고
침전 신하 구진과 보명궁주를 낳았네
풍월주 미진부, 모랑도 나의 남자들이었네
그리하여 신라가 통일신라가 되기까지 걸출한 나의 후손들
외손자 진평왕은 딸 만호태후의 아들
진평은 증손녀 선덕여왕과 선화공주를 낳았네
만호의 딸, 외손녀 만명은 김유신을 낳고
외손자 원광법사는 송화궁주의 아들
입종공 숙부와의 결혼은 성골 왕자를 위한 일이었고
영실 사촌과의 결혼도 그러하였네
태종 이사부는 정치적 동반자이자 나를 보필하는 의지처였다
그러니 어떠한가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불국토를 이룩한 역사에 이들의 이름이 길이 빛나지 않았던들
지금 그대들이 있었겠는가
이만하면 신라 한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않게 풍미하였다 하리
역사 기록마다 다른 지소태후
정작 삼국유사, 삼국사기 어디에도 지소태후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잡히질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왕력편에 ‘지소 또는 식도(只召 一作 息道)’라고 이름 한 번 나오고, 기이편 진흥왕조에 진흥왕 대신 어머니인 ‘태후(太后)가 섭정했다’라고만 쓰여 있을 뿐 더 이상의 정보가 없다.
심지어 삼국사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김유신의 부인인 동명이인 지소(智炤) 이름만 등장하고 진흥왕의 어머니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만 ‘임금이 어렸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王幼少 王太后攝政)’고만 쓰여 있다.
웬지 삼국유사, 삼국사기는 지소의 이름조차 밝히기 꺼려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일까 물음표 씨앗 하나를 마음에 심고 출발해 보기로 한다.
지소의 이름과 성에 대하여
먼저 이름에 관한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지소태후 이름에 대한 이야기도 화랑세기에 자세하다. 일찍이 화랑세기 전문학자 이종욱은 삼국유사 왕력 진흥왕편에 유일한 기록으로 등장하는 ‘지소 일작 식도(只召 一作 息道)’의 예를 가지고 화랑세기가 삼국유사보다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였다.
화랑세기에는 ‘지소의 초명(初名)은 식도(息道)’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반면, 삼국유사에서 두루뭉술하게 지소라고도 부르고 식도라고도 부른다고 표현해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식도는 물론 우리의 주인공 지소태후의 어릴 적 이름이다.
지소태후의 이름은 뜻밖에 1970년 울주 천전리 각석과 1988년 발굴된 울진봉평 신라비에 등장한다. 지소(只召)를 지몰시혜(只沒尸兮)로 기록하고 있는데 첫 글자의 지(只)가 상통하고 있다. 구체적인 상관성은 아직 알기 어렵지만 앞으로 또 하나의 다빈치 코드로 신라식 우리 말과 표기연구에 지대한 역할을 할 것임은 분명하다.
지소는 이름뿐 아니라 성도 박씨, 김씨 등 분분하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박씨로 모량리 영실각간의 딸’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진흥왕의 부인 사도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의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라고 하였다(母, 夫人金氏, 法興王之女)’.
화랑세기에 영실각간은 지소의 남편으로 나온다. 둘 사이에서 황화, 송화 두 딸이 태어난다. 영실은 법흥왕의 누이 보현공주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지소는 아버지 법흥의 유명으로 영실을 계부로 맞았으나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보아 지소태후의 성은 김씨라야 할 것이다.
중국의 측천대제 능가하는 지소태후
지소태후는 신라의 측천무후(측천대제라야 정확)라고도 불린다. 어린 진흥이 즉위한 후 11년동안 섭정을 하는 실질적인 여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측천이 네 아들을 거세하고 자기가 왕이 되고 당나라를 주나라로 바꾸어 15년간 공포정치로 통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소에게는 무려 일곱 명의 남편 또는 정인이 등장한다. 입종공, 태종공(이사부), 미진부, 영실, 모랑, 이화랑, 구진이 그들이다. 그 사이에서 아들 진흥왕을 비롯한 숙명공주, 세종, 황화공주, 송화공주, 만호낭주, 보명궁주 등 일곱 명의 아들딸과 손자 원광법사 등 삼국유사에 길이 이름을 떨치는 인물들을 줄줄이 낳는다. 미실도 울고 갈 스케일이다. 어쩌면 미실은 지소의 발뒷꿈치에도 미치지 못할 인물일지도 모른다. 지소가 낳은 역사적 인물들이 삼국유사를 누비는 활약상도 꼭 한 번 다루어 봄직한 주제이다.
아들 진흥왕에 대하여
540년 진흥왕이 즉위할 때의 진흥의 나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서는 15살이었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7살이었다는 삼국사기 쪽이 사실에 가깝다. 진흥왕은 즉위 초반기에는 어린 나이 때문에 직접 통치를 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즉위년조에 "(진흥)왕이 어리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편 진흥왕조에서도 "진흥왕이 즉위할 때 15살이므로 태후가 섭정했다"고 했다.
수렴청정(垂簾聽政), 주렴 뒤에서 정사를 듣고 간접적으로 코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섭정(攝政), 정치를 모두 쥐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첫 여왕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진흥과 지소태후의 왕노릇
진흥은 어떤 왕인가.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기 시작한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라고 한다. 법흥왕의 동생 입종 갈문왕의 아들로 534년 태어났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지소이다. 입종은 곧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것인데, 같은 신분끼리 결혼해야 후손이 그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골품제도 속 당시에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540년 법흥왕이 정비 보도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죽자, 일곱 살의 외손자이자(딸 지소의 아들) 친조카(동생 입종의 아들)가 되는 삼맥종이 왕위에 올랐다. 게다가 입종은 형 법흥보다 더 일찍 죽은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법흥왕은 자신의 외손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딸에게 실질적인 정치를 맡긴 것이다.
천전리 서석골 바위에 남아있는 539년 기록에 지몰시혜(지소태후)는 어린 아들과 어머니 보도부인을 대동하고 남편 입종으로 추정되는 사부지갈문왕의 525년 기록 옆에 다녀간 사실을 적고 있다. 남편이 537년에 죽어 꽤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 아들 진흥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행차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왕태후 지소의 왕노릇을 살펴보자. 진흥왕 즉위 첫해에 죄수들을 사면하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등급씩 올려준다. 그리고 이듬해 이사부를 병부령, 지금의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여 국가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맡긴다. 귀족들의 협의체인 화백 제도를 통해 정책을 결정해왔던 신라에서 병권을 전담하는 벼슬이 생기고, 왕이 이 벼슬을 임명했다는 것은 왕의 중앙집권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그 병부령 이사부가 누구인가. 태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지소태후의 또 다른 남편이다.
그야말로 전왕 법흥의 딸이자 어린 현왕 진흥의 어머니가 군사력 통수권자를 남편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신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소태후가 섭정하던 시기는 대체로 진흥왕 12년(551년)까지로 여겨진다. 진흥이 18세가 된 551년에 진흥왕이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고치는데, 섭정을 끝내고 친정을 하게 되면서 연호를 고쳤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개국(開國)이란 진흥이 성년이 되어 새로 나라를 연다는 뜻이 아닌가.
그 후 진흥은 두 번 더 연호를 태창(泰昌)과 홍제(鴻濟)로 바꾸며 자신의 치세를 요약한다. 568년 크게 번창한다는 의미의 연호에서 보여주듯이 영토를 확장해 그 유명한 ‘진흥왕 순수비’를 세운다. 572년에는 크게 구제한다는 의미의 연호로 백성을 구제하고 황룡사 장육존상을 조성하는 등 불교적인 말년을 보낸다. 법운이라는 법명으로 불교에 귀의하는 모습으로 대미를 장식하며 백성을 하화중생하고 자신은 상구보리를 실천하고 있다.
다시 지소태후의 활약상으로 돌아가 보면 이사부, 거칠부 등의 보좌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면서, 545년에는 거칠부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한다. 또한 흥륜사를 완공하고 불사리를 양나라에서 받아들이는 등 불교의 중흥에도 힘쓴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 하에서 고구려와 몇 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진흥왕 11년(550년)까지의 승리의 전과는 지소태후의 섭정 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지소태후의 화랑도 창설
무엇보다 실제적인 통치자로서 지소가 남긴 행적으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화랑도 창설이다. 삼국사기라든가 삼국유사와 같은 기록에는 신라에 화랑도가 설치된 시점이 불명확하고 그 설치 주체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편찬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나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는 그 설치 시점이 진흥왕이 즉위한 해(540)이며, 화랑도의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고 불렀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나아가 이들 문헌은 화랑도를 설치하고 풍월주를 둔 주체가 진흥왕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는 이미 지소부인이 남모와 준정으로 대표되던 원화제도를 폐지하고 화랑도를 창설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화랑세기라는 자료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이다.
신라의 실질적 첫 여왕의 바탕이 된 지소태후
삼국유사도 삼국사기도 이름을 정확히 밝히지 않을 만큼 신라의 실질적인 첫 여왕의 노릇을 잘해 낸 지소태후. 진흥왕대에 이루어진 신라 발전을 모두 아들인 진흥의 공으로 돌리기 위해서일까. 남성 중심의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역사상 유래가 없던 일이라 여왕의 존재를 애써 감추고 축소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지소 이후에 신라의 세 여왕 선덕, 진덕, 진성으로 이어지는 여성 통치는 지소라는 밑바탕이 있었던 덕분이라는 것이다. 곧 신라의 본격적인 여왕제도 시행에는 지소태후의 섭정이라는 막강한 성공 배경이 뒷받침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지소는 신라의 왕과 여왕을 길러낸 명실상부한 신라의 어머니, 신라의 국모인 것이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있다. 물 위에 떠있는 빙산은 그야말로 일부분이고 그 아래는 91.7%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소태후가 드러낸 빙산의 일각만을 이제 막 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지소태후를 중심으로 전후좌우 연결 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 가리워져 있던 길이 보이고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신라의 역사를 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음표를 찍으면 찍을수록 지소태후는 그만큼씩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앞으로 지소태후는 우리 모두의 벅차고 뿌듯한 고마운 숙제이다.
-
정진원 칼럼니스트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교수,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튀르키예(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와 헝가리 ELTE대학교에서 한국학과 교수, 서울대 규장각과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교수를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여 년간 해외 한국학 학회 발표와 특강, 외국 학생들과 한국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로 홍익대 문학박사를 받은 국어학자이자 동국대에서 삼국유사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다. 현재 월인석보와 삼국유사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국내와 유럽을 중심으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 <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대장경의 길을 열다>,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자장과 선덕여왕의 신라불국토 프로젝트>, <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등이 있다.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