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통일신라의 주역 훈제부인(訓帝夫人) 문명왕후(文明王后) 김문희 이어서
아해 시절의 보희寶姬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지난 이야기에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이자 태종무열왕의 정비 문명황후 훈제부인 김문희를 만나 보았다.
김유신의 처음 계획대로 첫째 여동생 보희가 춘추의 떨어진 옷고름을 꿰매어 맺어졌더라면 우리는 통일신라의 첫 왕 태종 무열왕의 정비로 동생 김문희가 아니라 김보희를 역사의 일부로 배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비운의 여인으로 생을 마쳤거나 역사의 한 줄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생각할 김문희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여동생 문희가 아명이 ‘아지’일 적에 보희는 ‘아해’라는 이름으로 삼국유사에 남아있다. 아명부터 우리에게 국어 어원을 상기시키는 삼국유사 속 두 자매 중 언니 보희를 만나 보자.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김유신’조와 ‘태종 춘추공’조 두 이야기에 전한다.
영창부인 보희의 노래
어느 날
서라벌 서형산 위에 올라
온 나라를 홍수에 빠뜨릴
오줌을 누는
어마어마한 꿈을 꾸었지
나는야 요조숙녀 아가씨
가야왕자와 신라공주의 딸 김보희
어릴 적 나의 이름은 아해였다네
오빠 김유신
여동생 아지 문희
남동생 흠순
우리는 정다운 사남매
가야와 신라의 핏줄로 태어나
삼국통일 대업의 역사적 사명을 함께 이루었지
오빠의 야심찬 첫번째 프로젝트는
나와 춘추를 혼사로 인연맺는 것
난 서라벌을 흥건히 적시는 꿈도 꾸었겠다
오빠 유신도 춘추만큼 배포가 맞는 상대는 다시 없노라
우리 프로젝트 한 배에 태울 첫 단추는 바로 나!
그러나 춘추는 유부남에 고타소라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바보였네
내 어머니 신라공주 만명
내 아버지 가야왕자 서현이었건만
둘의 사랑 야합이라고
우리 가족 오빠가 열다섯이 되도록 백제 변방에 살아야했네
맏딸인 나의 상대가
하필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에다
유부남인 춘추와 또다시 야합한다면
내 여동생 문희의 혼사길은 어찌 되려나
그렇다면 차라리
귀염받고 자라 활달한 막내딸 문희에게
짐짓 꿈을 파는 척 양보해
신라 가문부터 통일할까
드디어 거삿날
오빠 유신이 집앞에서 축구 하다 짐짓 춘추의 옷고름 밟네
집안으로 불러들여 나에게 바느질을 하라시네
백옥같은 귀공자
줄곧 사모하던 문희야
내가 하필 달거리 중이니 네가 가서 꿰매드리렴
언니의 꿈도 비단치마 주고 샀겠다
신이 난 문희는 더이상 아기가 아니었네
사랑은 쟁취하는 것
옷고름 꿰매는 척 만리장성 쌓고
열렬한 사랑 끝에 임신을 하네
우유부단 유부남 춘추를 문희 남편으로 만들 유신의 결정적 한방
문희는 화형식을 감내한 뒤
선덕여왕의 명으로 공식 부부가 되지
나의 살신성인 또는 선공후사라 할까
동생을 위한 양보를 가문을 위한 대의를
문희라고 모르리
춘추라고 모르리
이제 춘추만한 배필은 신라에 없으니
보희는 홀로 늙어야할까
춘추의 제3 부인이 되어야할까
춘추의 첫부인 보라궁주 둘째를 출산하다 세상을 하직하니
문희가 정실이 되고 왕위에 오르니 문명왕후가 되었네
보희 춘추의 계비에 오르네
영창부인이 되어 요석공주와 수레공을 낳았네
원효를 사위삼아 손자 설총을 얻고
수레공을 낳아 수릿날의 어원을 퉁겨주네
동생 문희에게 왕비자리 뺏기고 회한 속에 살다가 후궁이 되었노랴
저자거리에 말들이 떠돌지만
하늘알고 땅이 알고
나 알고 저 알면
그뿐
오빠는 춘추와 혼맥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세웠고
문희는 딸 지소로 오빠와 겹사돈을 맺었으며
막내 동생 흠순도 백제와 고구려 정복을 이룩한 장수였느니
나의 거국적인 결단으로
가야는 신라를 통일했고
그 신라 삼국을 통일하였네
길이길이 창성하였네
서라벌을 홍수로 만든 꿈의 주인공의 나이 추정
먼저 이들의 출생연도를 통해 터울을 알아보자. 물론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김유신이 595년에 태어났으니 보희와 문희는 그 이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김춘추는 602년이나 603년에 태어났다. 보희와 문희의 출생연도는 알 길이 없지만 그들의 남동생 김흠순이 599년에 태어났으니 596년~598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말은 춘추와 나이는 비슷하지만 둘 다 연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문희가 춘추와의 사이에서 김법민(문무왕)을 출생한 것이 626년이다. 둘 다 연년생 정도로 추정되는 20대 중반 어느 날에 언니가 꿈을 꾸고 동생이 꿈을 산다. 서악(서형산)에 올라 보희가 오줌을 누자 서라벌이 홍수로 가득 찬 꿈이었다. 동생 문희는 그 꿈을 듣고 비단 치마를 주고 산다. 열흘 뒤에 오빠 유신은 춘추를 집 앞에 데리고 와 축구를 하다가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린다.
보희가 춘추를 만나지 않은 까닭
보희는 어떤 사정에서였는지 오빠 유신의 야심 찬 혼인동맹 계획에 동참하지 않는다. 결국 여동생 문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화장까지 하고 김춘추를 맞이하여 옷고름을 꿰매게 된다.
두 가지 추론을 상정해볼 수 있다.
첫째 문희는 이러한 야합이 성격에 맞지 않았을 수 있다. 이미 가야계 아버지 김서현과 신라 왕손 어머니 만명부인의 결혼이 얼마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하게 됐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김서현은 가야왕의 후예이지만 신라 진골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머니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자 진평왕의 누이동생이었다. 만명의 어머니 만호부인 또한 진평왕의 어머니기도 해서 아버지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까지 하며 결사반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험한 사랑과 결혼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건은 두 사람의 결혼이 문희가 화형 직전까지 가고서야 어렵게 혼인을 하게 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둘째 보희는 춘추의 등장이 꿈 해몽에 걸맞는 사건임을 미리 알고 여동생 문희에게 꿈값을 받았으니 통 크게 양보한 것일 수도 있다. 신라 당시 둘은 20대 노처였다.
아마도 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염두에 둔 보희가 춘추를 만나지 않게 한 이유가 컸을 것이다.
유신과 춘추가 축구한 그날 624년 또는 625년
이들은 대략 20대 중반 어느 해인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춘추가 문희에게 드나든 지 1년 후 임신을 하고 춘추의 아내 보라궁주가 둘째를 낳다가 죽은 후에야 정실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선덕여왕(공주)의 불호령으로 바로 혼례를 올린 것으로 되어있다. 두 책이 1년 정도 기록의 차이가 있어 이때를 624년이나 625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희가 아들 김법민(문무왕)을 낳은 것이 626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신과 두 여동생이 춘추를 만난 날은 624년이나 625년 정월 보름임을 알 수 있다.
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 그날 정월 대보름과 보희의 꿈 섣달 스무날
더 정확한 날짜를 찾아보자. 삼국유사 춘추공 조에는 정월 오기일로 기록되어 있다. 오기일은 정월 대보름 음력 1월 15일로 상원(上元) 또는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모든 일을 삼가하고 조심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날이라 부르는 데서 유래했다. 이 유래는 삼국유사 ‘사금갑’조에 신라 21대 왕이었던 비처왕(毗處王, 또는 소지왕(炤智王)이라고도 한다)이 시해의 음모를 꾸미던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宫主)를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기 때문이다.
어쨌든 보희가 서라벌을 홍수를 이룬 그 꿈은 정월 대보름 열흘 전이었다니 보희 운명의 갈림길이 된 그날은 정확히 섣달 스무날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텍스트로는 결코 풀기 쉽지 않은 이러한 퍼즐 맞추기가 삼국유사, 화랑세기 읽기가 주는 가외의 즐거움이다.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보희의 성격
보희는 냉철하고 이지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유신에게 ‘어찌 그러한 사소한 일로 가벼이 귀공자 춘추를 가까이 상대할 수 있으리오 하고 사양했다는 것이다(豈以細事, 輕近貴公子乎. 因辭. 古本云, 因病不進). 이 정도면 거의 오빠에게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화랑세기에 의거하면 김춘추는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춘추의 부인이었던 미실의 손녀 보라궁주는 이미 고타소라는 딸을 두고 있었고 춘추와도 사이가 각별하다고 화랑세기에 적혀 있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기로서니 처음 보는 남자와 단둘이 앉아 남자의 저고리를 꿰매는 일은 21세기에도 탐탁지 않은 일이다. 유신은 그 자리를 피하였다는 대목도 나온다. 부인이 있는 남자와 야합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올곧은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꽃다운 처녀가 속이 훤히 보이는 이러한 야합이나 비정상적인 사실혼 관계는 원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보희는 맏딸이었다.
여기서 문희와 보희의 성격이 극명히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문희는 보희보다 한 두 살 어렸을 것으로 보이는데 미모와 지략을 겸비한 성격으로 오빠 유신의 계획에 의기투합하여 담대하게 가담하였던 것이다.
잘 생기고 풍채 좋은 외교관 김춘추
화랑세기에 춘추를 묘사하기를 ‘얼굴이 백옥과 같이 희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였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김춘추에 대해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美姿顔善談笑)”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당태종도 춘추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神聖之人)"이라 부르며 그를 붙잡아두어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한편 대식가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한 끼 식사로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으며, 백제를 멸망시킨 경신년(660년) 이후로 점심은 먹지 않고 아침과 저녁만 먹게 되었는데, 그러고도 하루에 먹는 양은 쌀 여섯 말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였다고 한다.
그러한 외교 활동의 성과는 신라를 넘어 통일신라의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무열왕 김춘추는 654년 52세 늦은 나이에 즉위하여 661년 59세까지 7년 정도 왕 노릇을 하게 된다.
김춘추의 세 번째 또는 계비가 된 영창부인 보희
그렇다면 그 후 보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 궁금할 것이다. 이 또한 화랑세기에 자세하다. 이 책에는 처음에 보희가 병이 나서 문희에게 바느질을 맡겼다고 되어 있다(庾信欲命宝姬而 因病不得 文姬乃進奉針 庾信避不見 公乃幸之). 다분히 핑계처럼 보이지만 월경 중이어서 피치 못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필자는 이것을 맏이의 책임감과 양보로 읽었다.
그리고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춘추가 보희를 소실로 삼았다는 것이다.
과연 보희의 복심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여동생이 정실부인이고 자신이 소실이 되는 그림을 쉽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춘추의 또 다른 부인이 되는 선택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보희는 춘추의 부인이 된다. 그리고 슬하에 아들 다섯(또는 셋)과 딸 요석공주 남매를 두었다. 문희는 6남 1녀를 두었다. 그 시간 차이가 얼마인지도 지금은 알 수 없다.
통일 신라의 인재가 된 보희의 자식들 요석공주, 거득공(수레공)
보희에게 제일 유명한 자식은 원효와 결혼한 요석공주일 것이다. 요석은 남편 김흠운이 655년 백제 전투에서 죽어 과부가 되었고 당시 두 딸이 있었다고 한다. 617년생인 원효와는 십수 년의 나이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것은 문희의 아들 김법민이 626년생이고 보희는 그 이후 얼마가 지난 뒤 결혼하고 개지문과 지원 두 아들을 낳은 후에야 요석을 낳았기 때문이다. 설총의 출생을 658년정도로 보고 있어서 원효는 마흔 이후에 요석을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661년 당나라 유학을 가다 일체유심조를 외치기 전이 되는 셈이다.
또 보희의 아들인 거득공(車得公)은 문희 아들 법민이 춘추를 이어 문무왕이 된 후 재상으로 삼아 암행어사의 역할을 하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거득공의 이름이 ‘수레공’이라 불렸을 것임을 추정하는 ‘단오’ 곧 ‘수릿날’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수로왕, 수로부인, 수릿날’을 같은 어원의 음사로 보았을 때 문무왕이 나라를 태평하게 할 만큼의 수리공 또한 대단한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의를 위한 선공후사 우바이 왕비 영창부인 김문희
‘길이길이 창성한다’는 뜻의 영창부인, 김보희. 과연 그가 젊은 날 한순간의 실수로 꿈을 팔아 치워 운명이 뒤바뀐 것일까. 아니면 유신과 문희 남매의 야심 찬 전략을 알고 자기보다 적격인 문희를 위해 물러선 것일까. 우리는 조선시대 세종이 왕이 되도록 물러난 두 형을 알고 있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른 이와 결혼을 하지 않은 데서 후자의 결기가 느껴진다.
그녀의 인생 결론은 문희에 못지않게 훌륭한 후사를 두었다. 우리는 그녀의 딸 요석공주를 통해 신라 십현이자 원효의 아들 유학자 설총을 기억하고 문무왕을 보필한 암행어사 재상 아들 수리공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오빠 김유신의 야심을 성공시킬 문희에게 양보하고 순리대로 자신의 결혼 뜻을 관철한 보희가 있었기에 가야와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더욱 공고한 겹사돈의 혼인 관계로 더 이상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통일신라의 왕손과 인재들을 길러낸 형식이 아닌 실질을 중시한 대승적인 우바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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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원 칼럼니스트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교수,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튀르키예(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와 헝가리 ELTE대학교에서 한국학과 교수, 서울대 규장각과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교수를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여 년간 해외 한국학 학회 발표와 특강, 외국 학생들과 한국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로 홍익대 문학박사를 받은 국어학자이자 동국대에서 삼국유사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다. 현재 월인석보와 삼국유사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국내와 유럽을 중심으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 <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대장경의 길을 열다>,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자장과 선덕여왕의 신라불국토 프로젝트>, <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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