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3월 중순 2주간 일정으로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일본이다.
나는 2019년 가을 홋카이도대학 초청 방문 학자(visiting scholar)로 삿포로에 100여 일을 머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홋카이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대학 도서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을지 모른다. 철들자 망령이라고 느지막하게 불붙은 향학열 탓이었을까?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일본을 떠났고, 이후 해외여행을 갈만한 특별한 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참, 우리 집에는 개가 두 마리 있다. 당연히 여행에 제약이 많다. 하지만 이제 벌써 3년이 넘었다. 답답해질 때가 되었나 보다, 불현듯 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본 여행을 결정했다.
나는 외교관 현직 시절 독일과 오스트리아만 5번에 걸쳐 13년을 근무한 소위 독일통이다. 독일통의 일본 기행문이라니, 왠지 헛웃음부터 나온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다소 거창하게 이름하여 "일본 역사기행"으로 명명하였다.
일본의 옛 수도인 나라, 교토, 그리고 현 수도인 도쿄 외에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추동했던 삿초동맹의 사쓰마(현 가고시마)와 죠슈(현 야마구치),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 260년 동안 대외창구를 담당했던 나가사키를 목적지로 올려놓았다.
3박 4일은 아내와 함께 패키지여행으로, 나머지 10박 10일은 나홀로 자유여행으로 계획했다. 여행 계획을 세운 뒤 JR 패스부터 구입했다. 이 주간 쓸 수 있는 그린석(1등석) 패스를 호기 있게 샀다. 비행기는 1등석을 못타지만 기차는 탈만하다.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소 예약을 마쳤다.
첫 출발지는 3대 항구 도시 고베...'일본 속의 유럽' 이진칸
드디어 출발, 비행시간 1시간 10여 분 만에 간사이공항에 도착하니 공항 바깥에서 여행사의 대형버스가 대기해 있다. 안락함은 확실히 패키지여행의 장점이다. 공항에서 고베(神戶)로 직행, 첫날 반나절 고베를 둘러보았다.
로코산(六甲山)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고베 항만의 정경을 즐긴 후 메이지 시대 개항장을 무대로 통상에 종사한 서양의 무역상들이 살았던 키타노(北野) 지역의 이진칸(異人館) 거리, 그리고 하버랜드를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역시 여행은 즐거운 것인가 보다. 이날 2만 보 가까이 걸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고베는 헤이안 시대 천황의 사절이 중국으로 떠나던 항구였다. 1180년 겐페이전쟁(源平合戰)의 와중에서 2살짜리 안토쿠(安德) 천황이 그의 외조부이자 셋칸(섭정)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손에 이끌려 피신 차 5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니까 고베는 일본 역사에서 17번째 황궁의 소재지였던 궁도(宮都) 후쿠하라쿄(福原京)였다.
5년 후 안토쿠 천황은 겐페이 전쟁을 종결지었던 시모노세키의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외조모인 니이노아마의 품에 안겨 바다로 뛰어들어 생을 마쳤다. 이때 니이모아마는 손자인 안토쿠 천황에게 "바다에도 왕궁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고베는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는 막부의 직할 도시였고 메이지 유신 직전 막부에 의해서 오사카의 사카이항과 함께 1868년 1월 서양에 문을 연 개항장이었다. 지금도 일본의 3대 항구다.
기타노 지역에는 1904년 지어진 고트프리트 토마스(Gottfried Thomas)라는 독일의 무역상이 살았던 집 등 서양 상인의 집들이 수 십여 채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 이진칸 거리는 국내외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이날도 여기에서 많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1995년 대지진 상흔의 아픔 간직한 곳
1995년 진도 6.9의 대지진이 이 도시를 덮쳤다. 당시 고베 총영사관에서 근무했던 동료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잠을 자던 중 침대에서 튕겨나가듯 떨어졌다고 했다. 운이 좋아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 6,400여 명이 당시 이 한신 대지진으로 사망했다. 항만의 하버랜드에서 당시 무너져 내린 철근콘크리트 더미를 볼 수 있었다.
나도 자카르타 근무 시 두어 번 지진을 경험했다. 인도네시아도 일본과 함께 환태평양 '불의 고리'에 속하는 지역이다. 지진의 공포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은 아파트에서 식탁 위 전등이 뎅그렁거리며 흔들렸고, 또 한 번은 호텔에서였는데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계단이며 복도로 몰려나왔다. 그럴 때는 말 그대로 혼이 나간다.
한국도 이젠 지진으로부터 안전지대가 아니라 한다. 20여 년 전부터 우리 건물들도 내진 설계를 하도록 하였다는데 실제 건축 시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지, 또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궁금하다. 일본의 건물들을 보노라면 상당히 육중한 감이 들 정도로 단단한 느낌이 드는데, 건축비만도 우리 건물들보다는 최소한 1.5 배 이상 더 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우리 건물들은 내진 설계가 의무화된 이후에 지어진 것들도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전의 건물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만약 진도 4~ 5도 정도의 지진이라도 온다면 한국의 건물들은 왠지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은근한 의구심이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이란 나라는 언제 가봐도 질서정연하다. 공항 입국장에서 줄 세우는 것부터, 심지어는 스타벅스에 가서도 바닥에 표시해 놓은 발자국에 줄을 선다. 그래서 특히 일본 여행에는 인내심과 체력이 필수다.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다.
대개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절이나 신사가 주위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건 말할 것도 없지만, 도시 공공시설물이나 건물들도 왠지 단단해 보이고 미학적인 면에서도 도시의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파트나 맨션이라는 집들도 내가 좋아하는 베란다는 꼭 갖추고 있는데 아마도 건축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나 보다. 한 나라의 국격은 건축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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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정 칼럼니스트
장시정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다. 지난 36년 간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며 외교 일선에 몸담았다. 수차에 걸친 독일어권 근무 중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에 걸쳐 나타나는 모델적 제도와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했고 2017년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했다. 동 저서는 2018년 상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 사회과학 분야에 선정됐다. 퇴직 후에는 2019년 홋카이도 대학 방문학자로 일본에 머물렀고, 2023년 1월과 3월에 외교안보, 정치, 경제, 사회 에세이집인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레트로 대한민국>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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