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2) 아름다움과 역사를 찾아가는 교토여행
[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2) 아름다움과 역사를 찾아가는 교토여행
  • 장시정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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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고도의 역사 도시, 교토를 가다
기요미즈데라(청수사)의 부타이(무대舞臺)를 밑에서 받치고 있는 약 5층 높이(12m)의 목구조물은 녹부식 방지를 위하여 못을 사용하지 않고 78개의 느티나무 기둥을 가로, 세로로 엮어 사용한 가케즈쿠리(현조懸造) 양식이다./사진=장시정

▶(1) 이진칸 거리가 인상적인 고베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일본 여행 이틀차다. 교토를 방문했다.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아라시야마의 노노미야신사(野宮神社)와 덴류지(天龍寺) 그리고 도게츠교(渡月橋)를 둘러보았다. 니조성을 포함한 교토 시내는 전혀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보면 변두리만 돈 셈이다.

패키지 단체여행 일정이어서 제약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교토를 처음 가보는 여행자라면 최소한 니조성(二条城)이 있는 교토 시내는 둘러봐야 하지 않나 싶다. 여기에 금각사나 은각사를 추가하면 좋겠다. 나는 어차피 자유여행으로 교토를 다시 올 계획이어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오사카로 넘어갔다.

1200년 역사 도시 교토

/사진=장시정
기요미즈데라(청수사) 정문, 인왕문(仁王門). 가마쿠라 시대 작품이다./사진=장시정

헤이안쿄(平安京)으로 불렸던 교토는 1,2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다. 교토는 서기 794년부터 1867년 대정봉환과 보신(戊辰)전쟁을 거쳐 1869년 천황이 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천 년 이상 천황의 궁도(宮都)이자 일본의 수도였다.

천황의 첫 궁도는 서기 630년 제34대 조메이 천황의 궁도였던 아스카(飛鳥)였다. 이때부터 160여 년간 일본 천황은 아스카, 후지와라쿄(藤源京), 헤이조쿄(平城京, 나라奈良), 나가오카쿄(長岡京) 등을 거쳐 마침내 794년 교토로 옮겨 왔다. 이들 궁도는 나라로부터 대략 30~50㎞ 반경에 들어가는 기나이(畿內) 중심 지역에 위치하는데, 서울 정도의 면적을 가진 지역에서 천 년이상 궁도를 옮겨다닌 셈이다.

제50대 간무(桓武) 천황이 교토로 궁도를 옮길 때는 불과 10년 전에 나라의 헤이조쿄를 폐하고 교토 인근의 나가오카쿄로 궁도를 옮긴 후였다. 그런데 다시 10년 만에 교토로 궁도를 옮겼다.

교토는 천황의 16번째 궁도(宮都)다. 간무천황이 나라를 떠난 것은 비대해진 불교 권력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새 도읍인 나가오카쿄의 건설 책임자가 피살되면서 여기에 연루된 자신의 친동생인 사와라(早良) 친왕을 유배 보냈는데, 이에 격분한 사와라가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단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간무천황은 사와라의 저주를 피하기 위하여 재차 교토로 천도했다. 당시 사람들은 저주를 믿었다고 한다.

일본 천황의 첫 궁도로 아스카(飛鳥)가 기록된 건 제34대 죠메이 천황 때인 서기 630년이었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의 제1대 진무천황부터 약 800년 동안 천황은 어디에 소재하였던가? 천황이란 존재가 있기나 한것이었나?

일본 최초의 역사서는 제43대 겐메이(元明) 천황의 명으로 기록된 712년 고사기로부터 시작한다. 제44대 겐쇼(元正) 천황 때인 720년에는 일본서기가 완성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보다 앞선 대략 서기 4~5세기까지 약 500~600년 간의 일본 황통의 역사는 불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역사에서는 교토를 차지한 자가 권력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토는 각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바로 교토의 천황을 후광으로 업어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185년 겐페이전쟁에서 승리한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면서 쇼군이 실질적인 통치자로 부상한 무사정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 전국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에 이르러 정권이 안정되기 전까지 교토는 전쟁터였다. 이 과정에서 패하여 도망가는 쪽에서 전쟁 목적상 궁이나 절을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교토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피해를 입곤했다.

신도시 같은 반듯한 구획 도시 

/사진=장시정
기요미즈데라(청수사) 절로 올라가는 비탈길인 기요미즈자카(淸水坂) 초입.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사진=장시정

694년 지토(持統)천황 때의 궁도, 후지와라쿄(藤原京)나 그후의 궁도인 헤이조쿄(나라), 헤이안쿄(교토)는 중국의 장안(長安)을 모방하여 만든 바둑판 구획을 가진 도시다. 사실 나도 교토를 다니면서 저윽이 놀란 건 천년전 건설된 이 도시가 흡사 현대의 신도시 같은 반듯한 구획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으로 뻗친 주작대로를 가운데에 놓고 북쪽에서부터 1조로 시작되는 동서대로가 남쪽의 10조까지 펼쳐지는데 흡사 맨하탄의 거리 번호를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교토보다 500년 후에 건설된 서울의 도시 모습은 어떤가? 내가 네팔의 카트만두를 방문했을 때 제대로된 신작로 하나없이 도시 전체가 미로 같다는 느낌을 가졌는데,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대로를 만들지 않았다는 설명이 따라왔다. 교토와 서울, 그리고 카트만두,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고대 일본은 630년부터 250여 년 동안 15차례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총 250여 명이 네 척의 배에 나눠 타고갈 정도로 대규모였다. 견당사는 894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건의로 중단될 때까지 일본의 국가 제도와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694년 천도한 후지와라쿄나 그후의 궁도였던 나라와 교토가 당나라의 장안을 모방한 것도 견당사의 영향이리라.

그렇다면 서울의 도시 구획 모습이 후진적인 것은 왜일까? 조선이 그토록 떠받들었던 중국쪽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조선이 개국한 14세기 말 중국은 원, 명 교체기로서 조선이 모방할만한 중국의 수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당시 북경(北京)은 명나라가 천도하기 전 오랑캐 나라, 원(元)의 대도(大都)였다.

하야시야 다쓰사부로(林屋辰三郞) 교토대학 교수는 "교토의 '고도(古都)'라는 인상은 거리 구획으로 상징된다. 이 장대한 구획을 설계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성을 건설한 정치력과 경제력은 과연 어디에서 탄생한 것일까."라고 감탄했다.

서민 신앙의 중심지, 기요미즈데라(청수사) 

/사진=장시정
기요미즈데라(청수사) 전경. 본당과 부타이(舞臺)의 모습./사진=장시정

지금 교토에는 2,000 개소가 넘는 사찰과 신사가 있으며, 이 중 17개소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교토의 동쪽에 자리한 기요미즈데라(청수사·淸水寺)는 8세기말 헤이안시대 초창기에 창건된 절로서 지슈진자(地主神社)와 함께 고래로부터 서민 신앙의 중심지였다. 지금 건물은 도쿠가와의 3대 쇼군 이에미츠(德川家光) 때 지은 것이다. 2008년부터 시작한 대보수 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산세가 남향 건물을 짓기에 적절치 않아 땅바닥에 기둥을 박아세우고 그 위에 본당과 부타이(舞臺)로 불리는 테라스를 지었다.

부타이는 본당의 천수관음상에 바치는 예능을 공연하기 위한 장소라 한다. 녹물로 부식을 초래할 수 있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78개의 느티나무를 가로, 세로로 엮어서 부타이를 받치는 하부 구조물을 만들었다. 가케즈쿠리(현조·懸造) 양식이라는데, 흡사 갯펄에 기둥을 박아 건물을 지은 베네치아를 연상케 했다.

/사진=장시정
기요미즈데라(청수사) 본당./사진=장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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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앞 부타이(무대舞臺)는 약 60평 넓이다. 본당의 감추어진 비불(秘佛) 천수관음 개방시 이를 감상하기 위한 공간이다./사진=장시정

지붕은 기와 대신 노송인 히노키 껍질(檜皮)을 이어 얹었는데, 얼핏보면 마치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외관이다. 일본의 절에서는 평상 시에는 불상을 볼 수 없다. 신비감을 더하기 위하여 평소엔 숨겨놓는다고 한다. 기요미즈데라에서도 33년에 한번 비불(秘佛) 천수관음상을 공개한다고 한다.

일본은 4월에 개학을 하기 때문에 3월까지가 여행 피크 기간이다. 그래서인지 벚꽂이 만개하려면 아직 며칠이 남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을 포함한 일본인들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많은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었다. 일본의 절들은 신사와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본당 내부/사진=장시정
/사진=장시정
본당에서 많은 방문자들이 선채로 불공을 드린다./사진=장시정

기요미즈데라도 본당 뒷편에 지슈진자(地主神社)가 있고, 돌아서 내려오는 길에도 개를 가미(神)로 모시는 신사를 보았다. 지슈진자는 보수 중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절이나 신사를 찾아서 소원을 빈다고 하는데, 청수사에서도 소원을 비는 많은 일본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살아있는 불교"의 모습이다. 일본 스님들은 대처승들도 많고, 그들의 복장이나 두발도 자유롭다.

​일본 신도(神道)는 681년 덴무(天武) 천황의 명령으로 최초의 신사가 등장한 이래 민족 종교 차원으로 승화된 민속 신앙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신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기가 어렵다. 다른 종교처럼 창시자나 경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종교라기 보다는 문화관습이나 전통으로 봄이 적절해 보인다. 역사적으로 국가주의적 특성과 지방적, 민속적 특성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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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미즈데라(청수사) 본당 아래 길목에 자리한 개를 신(가미 神)로 모시는 신사./사진=장시정

애니미즘이나 한반도의 샤머니즘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도로 발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신도의 신앙 대상인 가미(神)도 인격신에서부터 동식물에 이르는 자연물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이런 측면에선 흰두교와도 통한다. 일본에서 신사는 8만 개소가 넘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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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미즈데라(청수사)를 돌아나오는 계단 아래에 보이는 샤머니즘의 관습을 모여주는 유적./사진=장시정
이런 게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모습인가?/사진= 장시정 

일본은 어딜 가나 참 조용한 나라, 조용한 사람들이다. 청수사에 그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몰렸지만 시끄럽다거나 혼란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국인이나 중국인들도 있었지만 일본인들이 다수였기에 일본의 문화가 작동한 걸로 보인다. 일본사람들이 주동적으로 그런 태도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수인 외국인 관광객들도 자연스레 그렇게 따라 갔을 것이다. 일본은 어딜가나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없다. Amazing Japan! 

장시정 칼럼니스트

장시정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다. 지난 36년 간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며 외교 일선에 몸담았다. 수차에 걸친 독일어권 근무 중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에 걸쳐 나타나는 모델적 제도와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했고 2017년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했다. 동 저서는 2018년 상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 사회과학 분야에 선정됐다. 퇴직 후에는 2019년 홋카이도 대학 방문학자로 일본에 머물렀고, 2023년 1월과 3월에 외교안보, 정치, 경제, 사회 에세이집인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레트로 대한민국>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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