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나가사키에서 맛본 나가사키 짬뽕과 카스테라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일본에 도착한지 11일차, 3월 28일이다. 사츠마와 함께 메이지혁명을 이끌었던 조슈(야마구치)로 향했다.
가고시마에서 아침 9시 17분 신칸센으로 출발, 신야마구치(新山口)에 11시 20분 도착했다. 일본 도시 이름 앞에 신(新)이 붙은 역은 신칸센 정차를 위하여 새로 만든 역이다. 신칸센은 커브를 줄이고 최대한 직선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도심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 지역에 새 역을 만들었다. 신오사카(新大阪), 신야마구치, 신시모노세키(新下關), 신토스(新鳥栖)가 그렇다. 도쿄나 교토, 나고야에는 신역(新驛)이 없다.
일본 여행을 할 때는 신칸센을 타든지 아니면 도심에서 메트로를 탈 때 한자 지명을 잘 알아야 한다. 지명이나 인명의 한자 발음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발음되는 이름만 알아서는 노선 안내도를 보고도 역이름을 알기 어렵다. 한자 이름만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자 이름을 보고 인식하는 게 빠르다. 내가 이 글에서도 지명이나 인명에 한자를 병기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야마구치는 메이지혁명 전에는 조슈한(長州藩)이었다. 혁명 후 폐번치현으로 조슈한이 야마구치현(山口縣)으로 변경되었다. 신야마구치역 인근의 호텔에 가방을 맡기고 조슈번의 수도였던 하기(萩)로 넘어갔다. 메이지혁명 지사들을 배출한 쇼카손주쿠(松下村宿)부터 보기 위해서였다.
하기는 야마구치현의 북단, 동해 쪽에 있다. 신야마구치에서 JR 지역열차를 타고 야마구치역으로 가서 다시 JR 버스로 1시간 여 꼬불꼬불 산을 넘어서 하기로 갔다. JR 버스는 JR 열차간 연결되지 않는 구간을 버스로 연결해 주는데 JR 패스로 탈 수 있다. 독일에도 똑같은 사정으로 연방철도에서 운영하는 도이체반DB 버스가 있다. 하기에는 오후에 도착하여 쇼카손주쿠와 하기城의 조카마치(城下町)를 둘러보니 어느덧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존왕양이가 존왕토막으로
1853년 7월 페리제독의 내항 이후 1858년 막부는 천황의 칙명을 어기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류큐, 시모노세키, 나가사키 등 이미 열린 항구를 갖고 있는 사츠마나 조슈, 도사 같은 일본 서남부 번들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일대 사건 이었다. 막부가 개국을 하게 되면 이들이 누렸던 기존의 통상 이익이 사라져 버릴 참이었다. 이들에게는 쇄국이 이익이었다. 이에 존왕양이란 슬로건을 앞세우고 막부에 저항한다. 메이지 혁명의 발단이다. 메이지혁명은 하늘과 땅을 뒤바꾸었다 한다. 하늘이었던 쇼군이 사라지고, 땅이었던 천황이 올라섰다.
조슈는 1862년 나마무기(生麥) 사건 이후 양이(攘夷)정책의 강화에 따라 서양 함대의 포격에 취약한 항구 도시인 하기로부터 내륙인 야마구치로 수도를 옮겼다. 서양 세력에 대한 저항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조슈는 1864년 8월 서양 4개국 연합군과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패하면서, 서양세력에 대한 도전의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정은 사츠마도 마찬가지였다. 사츠마는 1863년 7월 영국과의 전쟁(사츠에이 전쟁)에서 패배 후 영국에 협조적으로 돌아섰다.
1866년 조슈와 사츠마간 삿초동맹이 성립할 즈음에는 종전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슬로건이 존왕토막(尊王討幕)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양이 대신 개국(開國)으로 돌아서, 도쿠가와 막부를 넘어뜨리고(도막 倒幕) 토벌하겠다는(토막 討幕) 기치를 높게 든 것이다.
메이지 일본의 설계자,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田松陰, 1830~1859)은 존왕파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 메이지 일본의 설계도를 그렸다. 그는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고 했다. 특히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해 일본의 제국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서구의 신문물을 직접 체험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인재의 해외 파견을 제안하였고, 그 자신 1854년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神奈川조약) 체결 후 개항한 시모다(下田)항에 정박 중인 미 군함에 승선하여 밀항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투옥된다. 14개월간 감옥에서 쓴 '유수록(幽囚錄)'을 남겼다. 출옥 후 그가 1855년부터 1858까지 3년간 쇼카손주쿠에서 교육한 조슈의 젊은 인재들은 혁명의 주역을 담당하게 된다.
쇼카손주쿠에서 사숙한 이들은, 유신 3걸의 1인으로 메이지 정부의 대표적인 정한론자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조슈번 군사력의 핵심 지휘관이자 아베 총리가 존경한다는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晉作), 메이지 정부의 초대 총리로 메이지천황의 총애를 받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제3대 총리이자 메이지 정부의 군대를 움직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그리고 조선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이다.
이들은 막부 말기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뜻을 세우고 몸을 던져 혁명을 추동하였다. 놀라운 것은 당시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20대 중반에 불과했고 그의 제자들은 10대 중후반의 열혈 소년이자 청년들이었다.
기이한 군대, 기병대의 창설자, 다카스키 신사쿠
쇼카손주쿠를 둘러보고 조카 마치로 갔다. 여기에는 에도 시대의 지도를 그대로 쓸 정도로 당시 촌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손주쿠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방문한 하기의 조카마치는 고즈넉해 보였다. 몇 개 골목을 다녔고 다가스키 신사쿠가 태어나고 살았던 집을 보게되었다. 지금 사람은 살지 않지만 내방객들에게는 개방되어 있다. 당시 상급 무사의 집임에도 크지는 않았고 잘 가꿔진 정원이 돋보였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일본 집에는 크든 작든 정성들여 가꾼 예쁜 정원이 딸려있는 것 같다. 일본인들의 정원 사랑은 아마도 유럽에 못지 않을 것이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쇼인의 수제자로서 실제 조슈의 반막부 군사력을 지휘하여 혁명에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23세 때 막부 시찰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하이의 서양 조계지를 둘러보고, "서양인들은 길로 다니고,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길을 양보해야 한다" 라고 토로하면서 서양의 침략에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한다.
1864년 4개국 연합함대 가 시모노세키(下關)를 공격 후 조슈가 항복했을 때는 강화조약의 정사(正使)로 교섭에 임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통역으로 따라갔다.
그는 1863년 기헤이타이(奇兵隊, '기이한 군대'라는 의미)를 조직하여 조슈의 전군을 지휘하였고 1866년 2차 조슈정벌전쟁에서는 막부군의 함대 4척을 격침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외교관이자 군인이었다. 기헤이타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신분을 넘어선 사무라이와 평민의 혼성 군대로서 조슈의 핵심적인 군사 기반이 되어 막부 타도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도 신분을 넘어선 시민 의용군이었기에 무적 군대로서 유럽을 정복하지 않았나.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기 마련이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조슈 기헤이타이의 본진(本陣)이 있었던 시모노세키 요시다(吉田)에 묻혔다.
실전형 메이지 혁명 지도자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들은 대부분 실제 전투 경험을 쌓은, 비전과 행동을 겸비한 청년 지사들이었다. 공맹의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현실과 유리된채 묵거독좌(默居獨坐) 했던 조선의 선비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바뀌어 가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의 방향을 자각하면서 메이지유신이라는 혁명을 추동해 나갔다.
일본이 폐번치현을 통하여 봉건제를 일소하고 근대국가로 발돋움 한 1871년은 유럽에서 비스마르크가 독일제국의 통일을 완수한 해이며, 한 해 전에는 이탈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메이지혁명의 지도자들이 바로 이러한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873년 3월 이와쿠라 사절단이 독일을 방문 했을 때 그들은(이토 히로부미 포함)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인 몰트케를 만났다.
요시다 쇼인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많은 제자들을 끌어들일 정도로 스승으로서 매력이 넘쳤다고 한다. 이들은 서양을 배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는 쇼인의 가르침에 따라 서양의 조선, 무기 제조, 직조, 철도, 은행 등 모든 것을 받아들여 메이지혁명 성공 후에도 계속 근대 일본의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다. 쇼인의 위패는 야스쿠니 신사에 신위 제1호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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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정 칼럼니스트
장시정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다. 지난 36년 간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며 외교 일선에 몸담았다. 수차에 걸친 독일어권 근무 중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에 걸쳐 나타나는 모델적 제도와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했고 2017년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했다. 동 저서는 2018년 상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 사회과학 분야에 선정됐다. 퇴직 후에는 2019년 홋카이도 대학 방문학자로 일본에 머물렀고, 2023년 1월과 3월에 외교안보, 정치, 경제, 사회 에세이집인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레트로 대한민국>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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