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5) 오사카성은 日 통일의 아성이자, 조선 침략의 본거지였다
[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5) 오사카성은 日 통일의 아성이자, 조선 침략의 본거지였다
  • 장시정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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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오사카를 가다
오사카성 텐슈카쿠天守閣
일본 오사카성의 본채인 텐슈카쿠(천수각·天守閣)/사진=장시정

(4) 도다이지(東大寺)의 위용은 대체 어디서 온 건가?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여행 3일차 오전에 나라에서 도다이지를 보고 오후에 오사카로 넘어왔다. 점심 후 바로 오사카성으로 갔다. 지금 오사카성의 자리에는 원래 이시야마 혼간지라는 큰 절이 있었지만 이 절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많은 악행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1580년 오다 노부나가가 권력을 잡으면서 이 절을 쫓아내었고 3년 후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의 야망을 품고 이 자리에 성을 축성하였다.

조선 침략의 본거지이자, 도요토미家의 영욕史 오사카성

오사카성을 에워싼 외부 해자(폭 75m, 수심 6m의 인공 수로. 동서 1㎞, 남북 1㎞)와 (사진 아래)내부 해자/사진=장시정

히데요시는 두 겹의 해자를 갖추고 가파르고 높은 성벽을 쌓아 난공불락의 성을 만든 후 이곳을 일본 통일 원정의 아성으로 삼았다. 성의 본채인 텐슈카쿠(천수각·天守閣)는 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교토의 천황궁보다 더 크게 짓고 기와까지 금박을 입혔다.

하지만 이 성은 결국 도요토미家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그의 사후에는 아들인 히데요리가 도쿠가와家와의 여름 전투에서 이곳에서 패한 후 자결하여 멸문하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측실이며 히데요리의 모친인 요도도노도 이곳에서 함께 자결하였다.

사쿠라몬, 뒤로 천수각이 보인다.
텐슈카쿠(천수각·天守閣)로 들어가는 입구인 사쿠라몬. 뒤로 텐슈카쿠가 보인다./사진=장시정

​일본 통일의 마지막 승자가 된 도쿠가와家의 히데타다는 1620년 도요토미의 텐슈카쿠를 해체, 땅에 묻어 버리고 그 옆자리에 더 높은 텐슈카쿠를 새로 지었다. 도쿠가와의 텐슈카쿠는 8층에 58m이며, 도요토미의 텐슈카쿠보다 19m를 더 높였다. 해자 쪽 방벽도 24m로 높였는데, 이 방벽은 수직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기울어진 설계로 그 견고함을 더하여 40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오사카성 내부에 전시된 도쿠가와 텐슈카쿠와 도요토미 텐슈카쿠의 비교도. 전자가 19m 더 높다./사진=장시정

실용적인 일본인들이라지만 적이 미운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멀쩡한 성을 없애고 새로 성을 짓다니 말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중앙청을 없애버린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는지, 그래도 도쿠가와는 똑같은 성을 새로 지었다. 역사의 자취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건 아니었다. 중앙청이 아직 있다면 경복궁과 중앙청의 대비가 빚어내는 중세와 근대를 아우르는 멋진 대비(contrast)의 향연이 수도 서울을 더욱 빛냈을 것이다.

오사카성의 본채 텐슈카쿠(천수각·天守閣)

성 내부에 전시된 축성용 거석 운반도. 바위의 채굴 및 절단, 해안으로 옮겨서 선적 후 해상 운송, 다시 육상으로 끌어올려 운반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슈라(修羅)라는 특수 목제 운반용 썰매가 사용되었다./사진=장시정

도쿠가와家는 오사카성 축성에 전국의 다이묘들을 동원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국가적 사업을 일으켜 통일 막부의 세력을 결집하고 다이묘들의 재산을 소모케 하여 그들의 힘을 억누르는 방편으로 활용했던 듯하다. 하긴 중앙집권 국가로서 지방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없는 조선도 한양도성 축성 시 지방의 관민을 차출하여 한 구역씩 맡긴 걸 보더라도 성을 짓는다는 게 당시로서는 엄청난 토목, 건축 공사였다.

사용된 큰 돌 중 가장 큰 것이 다코이시(문어)돌인데 돌 하나에 130톤에 이른다. 내가 본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 돌들과도 견줄만하다.

돌 하나가 130톤인 오테구치마스가타의 거석巨石, 다코이시(문어)돌 1620년 오사카 성 재건 시 오사카 서쪽 약 200km 떨어진 이누시마섬犬島에서 가져왔다.
돌 하나가 130톤인 오테구치마스가타의 거석(巨石), 다코이시(문어)돌. 1620년 오사카 성 재건 시 오사카 서쪽 약 200km 떨어진 이누시마섬(犬島)에서 가져왔다./사진=장시정

​도쿠가와家에서 지은 텐슈카쿠는 몇 차례의 낙뢰로 소실되기도 했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와중에서 일어난 보신전쟁 때도 화재 피해를 입었다. 이후 1930년 대에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현대 건축공법으로 복원되었고 다시 2차 대전 시 미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된 것을 전후에 보수하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3대 텐슈카쿠다.

용마루의 금색 샤치가와라(鯱瓦)는 머리는 호랑이, 몸통과 꼬리는 물고기인 상상의 동물 형상을 한 기와로서 화재 시 물을 뿜어 불을 끈다고 한다. 금색의 샤치가와라는 히데요시를, 건물 흰색 외관은 도쿠가와 가문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일본의 봉건세력들은 각 가문의 문장과 상징색이 있다. 어쩜 그렇게 서양과 똑같은지 놀랄 뿐이다.

텐슈카쿠로 들어가는 입구인 사쿠라몬 인근에는 3월 말부터 벚꽃이 만개한다는데 방문 시기가 일주일 정도 빨라 만개한 벚꽃의 풍경은 볼 수 없었다. 8층 전망대에서는 오사카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텐슈카쿠 8층에서 내려다보이는 해자와 오사카 시내 전경. 용마루 끝에 황금색의 샤치가와라(鯱瓦)가 보인다./사진=장시정
샤치호코(鯱)와 호랑이/사진=장시정

임진왜란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각상. 쥐새끼처럼 생겼다는 조선 사신 김성일의 임진왜란 전 보고 와는 많이 다르다./사진=장시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계든 방계든 황공족들이었던 역대 쇼군들과 달리 유일하게 평민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천황으로부터 쇼군 칭호를 받지 못했고, 대신 관백이나 태정대신이라는 타이틀을 셀프로 달았다 한다.

성내에 전시된 특별전 게시물을 보니 그는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필리핀, 타이완, 오키나와 류큐왕국에도 사신을 보내 복속을 요구했다. 이것은 종전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세력에 대하여 일본이라는 해양세력의 첫 도전이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의 도공들을 끌고 갔기에 도자기전쟁이라고도 한다. 심수관이니, 이삼평이니 하는 조선의 도공들은 기술직을 천시하는 조선보다 일본에서 더 대우를 받았고 이들이 정착한 마을을 몇 백 년간 먹여살렸다. 조선의 도자기보다 도공을 끌고 간 일본인들의 꾀가 돋보인다고나 해야 할까. 이건 물고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원조사업의 원리와 똑같다.

임진왜란 소개글. 히데요시가 규슈에까지 가서 일본군의 조선 원정을 독려하였음을 소개하고 있다. 침략을 미화한 출병(出兵)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사진=장시정

한편 일본은 전쟁을 하면서 조선 사람들을 끌고 가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았다. 당시는 일본 사람도 노예로 팔았다는데, 19세기 말 프로이센의 외교관으로서 아시아 전문가였던 막시밀리안 폰 브란트(M. von Brandt) 대사는 그의 저서인 '동아시아 문제'에서 일본의 노예시장에 조선인 노예가 넘쳐났다면서, 교토에 남아있는 조선 사람들의 귀무덤과 함께 이것을 7년 전쟁의 유일한 성과라고 혹평하였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은 조선인들을 엄청나게 살륙한 잔인한 전쟁이었다. 적이 항복하지 않으면 전부 죽여도 좋다는 당시 일본의 전쟁 관습을 조선인들에게 고스란히 적용하였다. 히데요시는 첫 전쟁(임진왜란)에서 뜻대로 되지 않자 두 번째 전쟁(정유재란)을 일으켰고 자신의 의도가 좌절된 데 대한 보복으로 남부지역의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히데요시를 기리는 교토의 토요쿠니(豊國) 신사 인근에는 조선인 귀무덤(耳塚)이 있다.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일본 병사들이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낸 것을 묻은 곳이다. 폰 브란트 대사는 일본의 사료를 근거로 그 정확한 숫자를 증언하였는데, 185,738명의 조선인과 29,014명의 중국인의 귀와 코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히데요시는 조선의 원수가 되었다.

오사카성 공원 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호코쿠豊國신사 앞마당에 세워진 그의 동상
오사카성 공원 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호코쿠(豊國)신사 앞마당에 세워진 그의 동상./사진=장시정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명분 중 하나는 13세기 일본을 침공한 여몽연합군에 대한 복수였다. 당시 여몽 군사는 쓰시마섬과 이끼섬 등지에 상륙하여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세계제국이 된 몽골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고려가 40년간 몽골에 항거한 덕택임을 일본 중세 연구자인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가 밝히고 있다.(김시덕 저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참조)

아미노 요시히코는 쓰시마 일대의 민가에서 수합된 미발굴 고문서를 연구하는 작업에 간여하면서 쓰시마섬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일본의 고대 조몬 문화가 결코 일본 '고유'의 문화가 아닌 당시 한반도 동남부와 규슈 북부에 걸친 해상 집단 문화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고대 일본의 백제분국설이나 백제속국설 주장과 맥락이 닿는 관찰이다. 그는 거친 파도가 치는 현해탄을 넘어온 문화가 그보다 더 좁은 대한해협을 건너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오사카 밤 문화의 중심, 도톤보리 

에비스바시(戒橋) 다리가 보이는 도톤보리(道頓堀) 운하/사진=장시정

오사카성을 보고 난 후 시내로 들어오면서 기타하마 카페거리를 둘러보았다. 저녁 무렵에는 네온사인이 꺼지지 않는다는 오사카 밤 문화의 중심지인 도톤보리를 찾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사받은 토지를 개발하려고 운하를 파기 시작한 야스이 도톤(安井道頓)의 이름을 따왔다. 파리 세느강의 바토무슈와 같은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오르내렸다.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를 연결하는 에비스바시(戒橋) 다리, 글리코맨 전광판 앞에서 양 팔을 들어 올리고 글리코맨이 되어보았다.

도톤보리의 상징물인 글리코맨 전광판 앞에서 양 팔을 들어 올리고 글리코맨이 되어보았다./사진=장시정
도톤보리에서 신사이바시 쪽 아케이드 상가에 사람이 넘친다.
도톤보리에서 신사이바시 쪽 아케이드 상가에 사람이 넘친다./사진=장시정

에비스바시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신사이바시 쪽 아케이드 상가에는 정말 사람의 물결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인근 상점은 돈키호테 슈퍼에만 들어가 보았는데, 한국인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장시정 칼럼니스트

장시정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다. 지난 36년 간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며 외교 일선에 몸담았다. 수차에 걸친 독일어권 근무 중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에 걸쳐 나타나는 모델적 제도와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했고 2017년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했다. 동 저서는 2018년 상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 사회과학 분야에 선정됐다. 퇴직 후에는 2019년 홋카이도 대학 방문학자로 일본에 머물렀고, 2023년 1월과 3월에 외교안보, 정치, 경제, 사회 에세이집인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레트로 대한민국>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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