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충성(忠誠)인가 의리(義理)인가? 사츠마의 두 영웅, 사이고와 오쿠보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가고시마에서 나가사키를 가는 교통편이 같은 규슈섬이지만 꽤 번거로울 정도다. 아침에 신칸센으로 가고시마중앙역을 떠나 신토스(新鳥栖), 타케오온센(武雄溫泉) 두 곳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2시간 41분 후에야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관광안내소에 들러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시내 전차 1일 승차권과 함께 데지마(出島), 구라바엔(Glover Garden),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3곳의 통합 입장권을 샀다.
전차 1일 승차권이 600엔이니 우리 돈으로 6,000원이다. 이 돈으로 하루 종일 나가사키의 전차를 타고 다닐 수 있다. 좋은 조건이다. 우선 전차를 타고 나가사키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지마부터 찾았다.
일본 내 유럽의 한 조각, 인공섬 '데지마'
데지마는 길이 180m, 폭 60m 정도의 부채꼴 인공섬이다. 1636년 도쿠가와 막부가 천주교 포교를 막기 위하여 시내에 흩어져 살던 포르투갈인들을 한곳으로 모아 거주하도록 만들었다. 나가사키의 유력 상인 25명이 출자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일어난 천주교도들의 반란인 시마바라(島原)의 난으로 인하여 1639년부터 포르투갈인들의 내항이 금지되면서 1641년 히라도(平戶)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관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후 데지마는 1859년 통상조약으로 요코하마와 하코다테가 개항될 때까지 200여 년 동안 일본과 유럽 간의 유일한 무역 통로이자 난학(蘭學)의 전파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데지마는 '일본 내 유럽의 한 조각'이었다.
이렇듯 역사적인 곳이지만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서부터 주변 하천의 매립 등으로 점차 그 부채꼴 모양의 원형을 잃게 되었다. 지금 데지마의 모습은 1951년부터 시작된 복원 사업에 따른 것이다.
현재 카피탄(상관장 商館長) 주택, 제1번선 선장 주택, 취사실, 양곡 창고, 일본인 관리인 대기실 등 16채가 복원되어 19세기 초기 데지마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네덜란드 상인의 감옥, 데지마
일본인의 외국인을 다루는 솜씨는 가히 수준급이다. 외국인과 하인을 제일 잘 다룬다는 영국인을 뺨칠 정도다. 보초가 배치된 돌다리 하나가 데지마와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네덜란드인들은 특별 허가 없이는 이 다리를 건너 육지로 나올 수 없었다. 드물게 허용되는 외출은 대개 시내 유곽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더욱이 일본인 관리자(감시자)들이 상주해 있어 그들은 감옥살이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는 매년 데지마 임대료를 지불했고 이 섬의 운영을 위해 투입되는 70여 명의 일본인 인력의 소요 비용도 부담해야 했다. 일본은 약 20개 가문으로 하여금 통역 업무를 담당케 했다. 네덜란드인들의 일본 사회 침투를 막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을 권하지 않았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상관장은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조선 도공이 빚은 일본 도자기, 네덜란드 상인이 유럽에 팔았다
나는 독일 드레스덴의 츠빙거궁에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컬렉션을 보았는데, 일본 도자기의 숫자가 중국 것만큼 많은 데다 마이센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여서 놀란 적이 있었다.
일본 도자기는 이스탄불의 톱카피 궁전에서도 볼 수 있는데, 당시 유럽과 일본을 오가는 교역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네덜란드 무역선의 주요 적재품이 된 일본의 청화백자는 조선의 도공들이 빚어낸 것이다. 당시 나가사키에서는 중국과의 교역이 더욱 활발했다.
1689년 도진야시키(唐人屋敷)라는 중국인 구역이 세워졌는데, 데지마의 2배 면적으로 설립 당시 4,888명의 중국인이 거주하였고 많을 때는 한 해에 약 200척의 중국 상선이 들어왔다고 한다
무역보다 외부 세계 정보 획득의 창구
데지마에 도착하는 네덜란드 선장은 유럽 사정 보고서를 제출하는 의무를 지녔고, 상관장은 해마다 쇼군을 알현하였는데, 이러한 접촉으로 일본은 쇄국에도 불구,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대여행가이자 독일인 최초의 일본학 대가로 불린 엥겔베르트 켐퍼는 1690년 데지마에 왔고 에도까지 가서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도 알현하였는데, 그는 일본이 데지마 상관을 유지한 목적이 교역보다는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 획득이라고 단언했다.
나가사키 짬뽕과 카스테라, 유명한 만큼 맛있다
데지마를 본 후 인근의 조그만 중식당에서 나가사키 짬뽕과 군만두로 점심을 했다. 나가사키 짬뽕은 우리가 생각하는 매큼한 짬뽕은 아니다. 해산물과 야채, 어묵을 토핑 한 것인데 우리 입맛에는 매우 싱겁지만 맛있다.
나가사키의 명물 카스테라도 샀다. 버터 기름을 사용하지 않아 담백하고 고소하다. 일본은 빵의 천국이다. 빵, 카스테라, 덴뿌라, 모두 포르투갈로부터 들여온 것이지만 수백 년 동안 일본인들이 발전시켜온 것들이다. 팥빵도 일본인이 만들었다. 나는 팥빵을 좋아하지만 요즘은 먹지 않는다. 대부분 중국산 팥을 쓰기 때문이다.
메이지 혁명의 수훈자, 스코틀랜드 상인 토마스 글로버
구라바엔은 스코틀랜드 무역상 토마스 글로버(Thomas Glover)의 저택과 정원을 보존한 것이다. 나가사키 조선소나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마침 화사하게 만발한 벚꽃나무들로 무척 아름다웠다. 해가 꽤 따갑게 느껴지는 날이었지만 나는 전차로 이시바시 역 종점에서 내려 이곳까지 걸어 올라갔다.
난 언젠가부터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곳이라도 계단이 보이면 무조건 걸어 올라가는 것을 생활습관으로 삼고 있다. 지하철이나 우리 집 아파트에서도 마찬가지다. 계단 오르기 운동은 투입 시간 대비 효과가 매우 좋은 운동이다.
글로버는 일본의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외국인이다. 21세 청년으로 1859년에 나가사키로 와서 무역업을 시작하였고 선박수리소도 건설, 운영하였다. 1863년 이토 히로부미 등 조슈 5걸과 사츠마 청년 15명의 영국 유학을 주선하였다.
1867년 보신 전쟁 시에는 사츠마 편에서 무기와 군함을 공급하였다. 이것은 막부 측이 영국 여왕에게 친서를 보내 글로버의 행위가 국제법 위반임을 지적하고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막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으나, 사츠마 측에서 보자면 혁명의 성공을 이끈 수훈자였다.
메이지혁명이 성공하고 신정부가 들어서자 기존의 친분관계를 기반으로 군함 건조나 맥주 등 일본의 산업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지금의 미츠비시나 기린맥주도 글로버가 관여한 사업체들이다.
조선인 징용자의 또 다른 감옥, 군함도
구라바엔에서 내려와 인근의 군함도(軍艦島) 디지털 박물관을 찾았다. 실제 군함도는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9㎞ 떨어진 앞바다에 위치한 하시마(端島) 섬이다. 이 섬은 남북으로 약 480m, 동서로 약 160m의 작은 해저탄광섬으로 철근 아파트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일본 군함 '도사(土佐)'와 닮았다 해서 군함섬으로 불린다.
여기서 1810년 경 석탄이 발견되어 소규모 채굴이 시작되었고 1890년 미츠비시 합자회사가 경영하게 되어 본격적인 해저 탄광으로 1974년 폐광 시까지 조업하였다. 해저 1,000m 아래까지 파고들어갔고 이곳에서의 작업 조건은 기온 30도, 습도 95% 정도로 악조건이었다.
일본 정부는 '규슈. 야마구치 근대화 산업유산'으로 묶어 이곳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시 논의되었던 조선인 징용자들의 징용 작업의 실상 같은 소개나 안내는 박물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디지털 자료를 위주로 전시하는 곳임에도 입장료가 무척 비쌌다. 내 기억으론 1,800엔을 받았던 것 같다.
두 번째 원자폭탄 투하지, 나가사키
나가사키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는 원폭자료관이었다. 글로바엔에서 전차를 타고 도심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올라갔다. 자료관에 들어서자마자 1945년 8월 9일 11시 2분에 멈춰버린 시계를 볼 수 있었다.
자료관을 나와서 아래에 보이는 큰 공터가 바로 원자탄이 떨어진 폭심지(爆心地)였다. 팻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20kt 플루토늄탄이 이 폭심지 상공 500m에서 터졌다. 팻맨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보다 더 큰 위력을 가졌지만, 살상 규모는 히로시마의 반 정도였는데 인근의 산에 막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6만 명에서 8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 중에는 1만여 명의 조선인 징용자들도 있다. 나는 희생자들을 위하여 잠깐 동안 눈을 감고 묵념했다.
그런데 지금 북한이 우리를 위협하는 원자폭탄은 78년 전 이곳에 떨어진 것보다 훨씬 더 위력이 크다. 북핵 문제가 대두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아직 아무런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은 방어 목적을 떠나 북한의 근본적인 이익이 침해될 경우에도 핵을 쓰겠다고 공언하였다. 세계의 석학들은 제3차 세계대전의 유력 후보지로 한반도를 꼽는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78년간 침묵을 지켜왔던 원자폭탄이 세 번째로 떨어질 곳이 과연 한반도란 말인가? 온몸이 얼음 물을 뒤집어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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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정 칼럼니스트
장시정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다. 지난 36년 간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며 외교 일선에 몸담았다. 수차에 걸친 독일어권 근무 중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에 걸쳐 나타나는 모델적 제도와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했고 2017년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했다. 동 저서는 2018년 상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 사회과학 분야에 선정됐다. 퇴직 후에는 2019년 홋카이도 대학 방문학자로 일본에 머물렀고, 2023년 1월과 3월에 외교안보, 정치, 경제, 사회 에세이집인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레트로 대한민국>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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