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人] '한국학 대모' 정진원, 튀르키예 국립대 한국학과 교수
[김두호가 만난 人] '한국학 대모' 정진원, 튀르키예 국립대 한국학과 교수
  • 김두호 인터뷰어
  • 승인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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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정진원 튀르키예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 박사학위 두 번 받은 글로벌 인문학자
- 헝가리 대학, 튀르키예 대학 한국학과 창설 함께 해
- 튀르키예는 제2모국...튀르키예 지진, "내 나라 비극처럼 가슴 아파"
- 국경 없는 여행인으로 살면서 자칭 ‘놀이하는 인간’
- 아버지는 정형모 인물화의 대가, 동생도 인물화가
인문학자 정진원 교수는 해외 대학에서 ‘한국학의 대모’로 통한다. 문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평생을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며 해외대학의 한국학과 전문 교수로 활동 중이다. 정 교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소재 대학을 거쳐 튀르키예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에서 한국학과 창설부터 시작, 20여 년간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이 대학의 한국학과 학생 수만해도 유럽의 단과대학 수준인 400명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인기학과로 성장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지난 2월 별세한 '인물화의 대가' 故 정형모 화백의 장녀이기도 하다.
인문학자 정진원 교수는 해외 대학에서 ‘한국학의 대모’로 통한다. 문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평생을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며 해외대학의 한국학과 전문 교수로 활동 중이다. 정 교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소재 대학을 거쳐 튀르키예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에서 한국학과 창설부터 시작, 20여 년간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이 대학의 한국학과 학생 수만해도 유럽의 단과대학 수준인 400명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인기학과로 성장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지난 2월 별세한 '인물화의 대가' 故 정형모 화백의 장녀이기도 하다./사진=정진원 제공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튀르키예(舊 터키)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정진원(1960∼ ) 교수는 문학 역사 철학을 포함하는 인문학 분야를 두루 전공한 인문학자이다. 홍익대에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어서 동국대에서 삼국유사 연구로 철학박사가 된 그는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 이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엘테(ELTE) 대학에서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해외 대학에서 ‘한국학의 대모’로 통하는 그는 펴낸 저서로 ‘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삼국유사, 자장과 선덕여왕의 신라불국토 프로젝트’, ‘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 등이 있다.

쉬지 않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책을 펴내고, 네 차례나 찾아간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등 30여 년간 6대주 세계 역사의 현장을 찾아 여행을 즐기며 자칭 ‘놀이하는 인간’으로 살고 있는 정진원 교수를 만났다.

다양하고 엄청난 지식과 경험으로 가득 찬 인문학자는 연구하고 보고 겪어온 삶의 길목에 쌓여있는 이야기들을 앞으로 <인터뷰365> 독자들에게 ‘정진원 교수의 인문학 에세이’로 전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는 최근 인물화의 대가인 아버지 정형모 화백이 별세하면서 잠시 귀국해 서울에 머물다가 유례 드문 대규모 지진 사태가 발생해 시련을 겪는 튀르키예로 다시 돌아갔다.

튀르키예는 나의 제2 모국

튀르키예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글로벌 인문학자 정진원 교수. 20여 년간 튀르키예 대학에서 몸담아온 그는 튀르키예가 '제2의 모국'이라고 말한다. /사진=인터뷰365

-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튀르키예 지진사태 때 불행을 당한 지인들은 없는가?

“내가 재직 중인 대학(에르지예스대)의 도시는 카이세리로 이번 피해지역과 떨어져 있다. 나의 한국학과 교수진과 학생들은 무사하지만 옆 영어과, 러시아어과, 중국어과에는 피해 학생들이 있다고 들었다. 자연재해, 천재지변은 무섭다. 나도 2000년 이곳 코냐에서 이번 지진의 반 정도인 4.3 지진을 경험했다. 그 정도에도 호텔이 흔들어대는 가벼운 성냥갑처럼 요동쳤다.”

- 튀르키예 에르지예스대 교수로 임용된 시기는 언제인가?

“23년 전인 2000년도 나의 열정적인 활동기인 40대에 한국학과 설립에 3년동안 참여하면서 특강과 한국문화 체험 등 깊이 연고를 맺기 시작해 2021년 20년만에 다시 복귀하였다. 튀르키예는 이제 제2의 모국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 재난은 내 나라 내 국민의 비극 같아 너무 가슴 아프다.”

- ‘터키’라는 친숙한 이름이 근래 갑자기 ‘튀르키예’로 바뀌어 요즘 나라 이름을 호칭할 때마다 어감에 어색한 느낌이 따른다.

“나도 동감이다. 미국과 한국을 제외한 유럽과 아시아권 여러 나라는 예전 그대로 터키로 호칭하고 있다. ‘터키’라는 말이 영어 칠면조라는 발음과 같아 현 터키 정부가 그렇게 호칭을 바꾸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지만 터키라는 이름이 국제적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 정 교수는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서울대 규장각,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등의 교수로도 적을 두었고 헝가리 ELTE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도 역임했다. 국내에서 해외 대학으로 옮겨가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을 것이다.

튀르키예 정부에서 대한민국 외교부 채널을 통해 그들의 국립대 한국학과 창설에 따른 교수 초빙을 요청했다. 외교부는 다시 교육부를 통해 추천을 받아 이른바 해외대학의 한국학과 전문 교수의 길로 들어선 지 20년이 넘었다. 헝가리 ELTE 대학교에는 2010년에 부임해 1년간 학과 초창기에 기반을 구축하고 떠났다.”

- 외국의 명문대학들이 한국과 한국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일종의 200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 바람, 이를테면 대중문화를 포함해 광범위한 분야에서 바람을 일으킨 K컬처의 영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내가 한국학 교수로 해외에 나갈 무렵 전까지는 유럽 지역 대학들이 일본학이나 중국학 정도에 관심을 보였고 한국학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가 한국이 경제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K팝이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권에서 글로벌 스타와 히트 작품들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삼성, 현대 등 메이드 인 코리아의 글로벌 기업도 세계적으로 성장하면서 국가와 국민의 위상이 달라져 전 세계에 한국학과가 경쟁적으로 설립되었다. 지금은 지망 학생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인기학과로 주목을 받는다. 예를 들면 우리 대학 한국학과 학생은 400명인데 이 숫자가 유럽에서는 단과대학 수준이다.”

한국학 연구과제, 교육교재가 한국적 인문학

2022년 10월 개최된 제21차 중동유럽한국학회 국제학술대회 프로젝트에서 매니저로 기조 강연했을 당시./사진=정진원 제공

- 한국학 커리큘럼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한국의 언어에서 역사 문학 철학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 그대로 한국의 모든 문화를 함축한 교육이 강좌 내용이다. 학생들은 지금 한류 글로벌로 물결치는 K팝, K드라마, K시네마 등 대중문화에 관련된 내용에 가장 관심이 많지만 그 역사적 원류와 전통적 학문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다. 그로 인해 내가 전공한 삼국유사나 한국불교의 한국 인문학 텍스트가 K CLASSIC 콘텐츠로 각광받고 있다.”

- 튀르키예 언어의 뿌리도 우리 언어의 뿌리와 통하는 알타이 제어로 분류되고 있다.

“그렇다. 튀르키예에서 몽골, 만주를 거쳐 한국과 일본에 이르는 지역의 어족을 통틀어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알타이어족 개념은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튀르키예는 그런 언어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6.25 전쟁 때 우릴 지원해준 과거사로 인해 특별히 양국 국민들의 유대감이 깊다.

이번 지진사태에도 우선적으로 구조대를 파견해 역시 한국이 형제의 나라임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튀르키예는 한나라 당시부터 역사서에 고조선과 돌궐로 등장하는 등 까마득한 옛 조상 때부터 교류 관계가 있었다. 우리가 곰 토템에서 단군이 나왔다면 튀르키예는 늑대를 토템으로 나라가 건국되었다. 자연을 숭상하거나 성황당 민속 신앙도 서로 통하는 등 문화의 유사성도 많은 나라이다.” 

- 홍익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동국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 과정이 특별하다.

“나에게는 다방면의 인문학 분야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들이 많다. 홍익대 이근수 교수를 비롯 고려대 박병채 교수, 서울대 고영근 교수, 허웅 교수, 중앙승가대 교수이자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 통도사 율주 혜남스님, 동국대 해주스님 등이 모두 나의 은사님들이다. 모두 국어학과 불교학의 길을 걷게 해준 스승들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처음 ‘한국학의 대모’라 불러주고 인정해준 고려대 은사 서종택 교수께 감사하다. 대학원에서 우리 언어의 어원인 훈민정음과 훈민정음으로 쓰인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를 연구과제로 삼게 되었다. 이 책들이 모두 불교책이었다. 그런데 이 분야에 대해 스님, 고전문학자 등 여러 전문가를 찾아 배우고 싶었지만, 전공자가 없었다. 결국 내가 연구하고 밝혀보자는 목표를 세우고 제2의 전공으로 불교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 불교를 신앙으로 접근하지 않고 학문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도전일 것 같다.

“불교는 종교로 볼 수도 있고 철학으로 볼 수도 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세상에 하나뿐인 부처이니 오로지 나를 신으로 생각하라가 아니고 모든 중생은 자신 안에 불성이 있으니 도를 깨우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스스로 부처가 되어 가르쳐준 분이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수양대군 왕자 시절에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전 24권의 산문이고 월인천강지곡은 그에 대해 부왕 세종대왕이 쓴 600곡 정도로 추정되는 노래책이다. 월인석보는 세조가 왕이 된 후 이 두 책을 합편해 중 수정 보완한 내용이다.

스님들이 흔히 하는 법문 중에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볼 것이지 왜 손가락을 보느냐’라는 비유가 있다. 여기서 손가락은 진리를 가르치는 방편이자 수단이다. 석가모니 부처도 진리의 전달자이다. 달이 바로 진리이다. 초기 불교가 부처를 우상화하지 않고 발자국이나 보리수로 상징한 예도 바로 불교의 진리를 가리지 않기 위한 것이다. 세조는 사육신의 피바람을 일으키고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악덕 군주로만 알려졌지만 그는 자신의 불교적 저술을 통해 생전에 자신의 잘못을 참회와 고뇌가 절절한 저술을 하였고 실제로 왕이 되고 나병으로 추정되는 피부병으로 고통의 삶을 살았다. 나의 문학박사 학위 논문은 ‘15세기 설화자(나레이터) 화법연구’인데 주제는 세종과 세조가 지은 이 조선시대 불교대장경의 편찬자 시점을 연구한 내용들이다.”

- 동국대에서 획득한 철학박사 학위의 내용도 소개해 달라.

“‘삼국유사의 한국학 콘텐츠 개발연구’가 논제였다. 우리는 대체로 삼국시대 야사로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를 알고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전설이나 신화 중심의 야사를 담은 스님의 역사 이야기책이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쓰이지 않고 남은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연구한 ‘삼국유사’는 야사가 아닌 정사로 손색이 없는 저술로 간과해서는 안 될 귀중한 고려 시대까지의 최고 걸작으로 재조명하는 것이었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에는 실리지 않은 ‘고조선, 가야, 발해’의 역사 기록이 실렸다. 삼국유사는 역사뿐만 아니라 고조선부터 고려 시대까지 문화의 보물창고이다. 나는 그것을 콘텐츠로 개발하여 일반 대중과 세계인에게 전파하고자 논문을 썼다.”

잊을 수 없는 아버지 정형모 화가의 유언

2019년 12월 18일 한 시상식에서 아버지 정형모 화백과 함께 무대에 오른 정진원 교수/사진=정진원 제공

- 지난 2월 별세한 부친이 생전에 ‘청와대 전속 화가’로 통한 인물화의 대가 정형모 화백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 역대 대통령과 국내 정치, 경제, 언론계 명사를 비롯해 생전에 외국 국가 원수의 초상화 주문도 받을 만큼 유명했다.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면?

“먼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떠나실 때 “내 짐을 챙겨라. 신발을 가져와라”라고 하신 말씀이 마지막 유언이었다. 여행을 떠나듯이 그렇게 홀가분하게 저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리고 잠시 정신이 맑으실 때 “인생은 아름답고 세상은 감미롭다”는 말씀도 하셨다.”

- 생전에 그렇게 감미롭게 사셨는가?

““인생은 아름답고 세상은 감미롭다”는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하니 이것은 얼마나 처참한 인생이어야 할 수 있는 말인지, 세상이 얼마나 쓰고 괴로워야 할 수 있는 말인지 조금 알 것만 같다.

생전에 말수가 적으셨지만 좋아하시는 술 한잔하시면 마음속에 쌓인 말씀들을 밤을 새워 풀어놓곤 하셔서 나는 그 술주정이 싫어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고 했다. 대다수 화가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 5남매 자녀들도 가난한 가운데 의좋은 형제로 자랐다. 또 어머니가 평생 아버지를 내조하면서 부정기적인 수입에 생활전선에 뛰어들며 고생을 많이 하셨다. 20년 전에 어머니가 별세하시고 셋째딸인 정진미 화가가 정성껏 아버지를 보필해 왔다. 인생이 이 세상 신세 진 모두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라고 생각한다.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임종게’로 보시면 될 것 같다.

한편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자신의 예술세계, 오로지 그림과 함께 살아오신 화가의 꿈같은 생애를 표현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자나 깨나 그림을 그리시고, 초상화를 그리실 때는 그 사람의 몸은 물론 영혼까지 화가의 붓끝에 끌어와 녹여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온다고 하셨던 분이다.

1976년 정진원 교수가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5남매와 함께한 단란한 가족 모습. 정진원 교수의 동생 정진미 작가가 그렸다. (사진 앞줄 가운데) 정형모 화백 부부와 (뒷줄 맨 오른쪽)장녀 정진원 교수./사진=정진원 제공

아버지는 1935년 강릉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사셨고 1950년대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인 동화백화점 미술부를 출입하시면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김종래 선생 문하에서 그림을 시작하셨다. 박수근 화백이 그 무렵 함께 활동한 이야기도 종종 들려주셨다. 연필화의 대가인 원석연 화백과도 교류하셨다. 어릴 때 서울 순화동에서 살며 엄마의 손을 잡고 아버지가 퇴근하시던 서소문 쪽으로 마중 나가던 추억이 있다.”

- 해외 국가 원수라면 구체적으로 누구의 인물화를 그렸는가?

“미국의 카터 대통령 부부, 클린턴 대통령 가족과 조지 부시 대통령을 청와대 선물로 그렸고, 영국 처칠 수상, 오만 국왕, 부르나이 국왕, 리비아 카다피 대통령 등이 있다. 리비아 카다피 대통령 시절 그의 정부가 카다피의 생애와 업적에 관련된 각종 인물화를 대거 주문받아 그려 국제적으로 화제가 됐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특별히 초대하여 ‘화백’이라고 정중히 편지를 쓰시고 할 만큼 좋아하셨는데 서거 후 국장(國葬) 장례 때 등장한 대형 초상화 영정도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2005년전후 수원 이목리 엄마 산소. 아버지와 같이 사진 찍은게 이것뿐.
2005년 경 수원 이목리에 있는 어머니 산소 앞에서. 아버지 정형모 화백과 함께한 정진원 교수./사진=정진원 제공

- 인물화가 정진미 화가도 정형모 작가의 따님으로 재능을 이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와 가족들이 행복을 느낀 일 중의 하나가 셋째딸 정진미가 인물화 작가를 대물림한 일이다. 만년에 아버지를 가까이서 모시고 함께 여러 번 작품전을 하기도 했다. 정진미의 오빠인 장남 정진철도 대한민국 미술대전과 동아미술대전에서 입상한 화가이자 시인이다. 뛰어난 공예 솜씨는 할아버지 정인풍의 유전자이다. 막내 정진석도 KBS 촬영 감독 등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으니 3남매가 아버지 일을 계승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아버지 정형모 화백이 뒤를 이어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셋째딸 정진미 작가(사진 맨 왼쪽에서 여섯번째)와 정진원 교수. 

여행으로 인생 즐기며 시인이 되다

- 정 교수의 많은 저서 중에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이란 책이 있다. 인도를 네 차례나 방문해 전 세계 일주를 했다는데.

“여행에 대한 꿈을 어릴 때 심어준 분이 있다. 내가 서울 아현동에 있던 아현초등학교 4, 5학년 때 실향민 출신 최진형 담임선생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때는 외국 여행을 꿈도 못 꾸던 시절인데 김찬삼 여행가의 무전 여행기를 읽은 선생님이 자신의 가지 못할 고향이야기와 함께 세계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때 나는 내가 선생님이 살아생전 못 가면 대신 선생님의 고향과 국경 밖의 세계를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꿈이 잠재적으로 심어져 씨앗에서 싹이 나고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막연히 나의 꿈은 이 세상 모든 말을 다 배워 바벨탑을 증명하고 내가 태어난 지구를 내 발로 걸어 다닌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어학을 전공하여 열몇 가지의 언어를 섭렵하고 지금도 튀르키예 한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이다.”

- 최근에 시인으로 등단하였다는 소식도 있다.

“이 또한 내 인생의 고비에 전환점이 된 인생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지난 2022년 7월 나에게 전폭적인 외조를 해주던 남편이 돌아가셨다. 그때 정호승의 시와 박완서의 산문에서 위로를 받았다. 시시각각이 그렇게 긴 시간인줄 몰랐다. 나의 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나에게 이 세상에 내 편인 사람이 둘이 있었다. 한 분은 어머니이고 한 분은 남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해도 나를 감쌀 평생 하나뿐인 내 편이었고, 남편은 내가 외국 대학에 딸을 데리고 세상이 좁다 하고 돌아다니도록 물심양면 외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번 시는 엄마 별세 후 엄마를 생각하며 쓴 작품들이다.

내가 글자를 몰랐다면 어쩔 뻔하였을까. 처음으로 모국어와 한글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사실 스무 살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외경심이 지금도 있다. 44년을 묵히고서야 겨우 용기 내 시단에 문을 두드렸다. 이제 남편과 아버지가 나를 또 어떤 시 세계로 인도해주실지 모르겠다. 월간 문학지인 ‘문예사조’를 통해 올해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시를 쓰기 시작했다.”

- 정 교수를 두고 해외 동포사회에서 ‘한국학의 대모’로 일컫기도 한다. 국경 없는 학자로 살며 만난 잊을 수 없는 인연도 많겠다.

“별처럼 많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2000년 튀르키예에서 내가 한국학과 교수인데 같은 대학 일본학과로 함께 여행한 미도리 아소교수를 잊을 수 없다. 그와 튀르키예 전역과 유럽의 불가리아, 루마니아, 그리스, 이집트를 옆 동네처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헝가리의 대학 한국학과 교수로 유럽의 한국학 관련 학회 활동에 참여하며 인생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헝가리에서는 소련이 무너지기 전 냉전 시대에 북한 김일성대학 국문과로 유학한 너지 일디꼬 선생도 잊을 수 없다. 그 영향으로 동유럽 학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북한학이 나의 제3의 전공이 되었다. 사실 현재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다. 기회가 되면 북한 삼국유사를 비롯한 남북 문화유산 학술 교류를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어쩌다 보니 문,사,철 인문학을 자연스럽게 섭렵하게 되었는데 그걸 견인해준 길잡이가 어릴 때 꿈인 여행이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여성학자로 살기가 쉽지만은 않은 시절을 살며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는 안목을 키워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하며 성장하였다. 인생의 고비마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걸어갔고 그것은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간의 정의 ‘놀이하는 인간’을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이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시처럼 나도 나의 불운이 행운이었고 나의 역경이 달콤했다고 쓸지도 모르겠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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