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닥터레게' 김장윤·신수경 부부의 인생스토리 "꿈이 있기에 인생은 아름답죠"
[인터뷰365] '닥터레게' 김장윤·신수경 부부의 인생스토리 "꿈이 있기에 인생은 아름답죠"
  • 김건탁 인터뷰어
  • 승인 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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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代가 함께하는 꿈 나누기, 인생은 아름다워라
- 父 15대 국회의원 김일주 의원, 母 63년도 미스코리아 진 김태희 여사
- 외동딸 김채리 양의 천부적인 음악성 보여
- 여의도서 면옥 운영하며 딸과 함께 음악 봉사
- 앞치마 두르고 주방 들어간 지 벌써 6년..."세계 다니며 선교 공연 하고픈 꿈 있죠"
90년 대 국내 레게 장르의 원조 뮤지션 격인 '닥터레게'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던 뮤지션 김장윤과 신수경 부부. 아내 신수경 역시 90년대 미녀가수로 활동했다. 현재 여의도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장윤·신수경 부부는 부모님이 운영했던 여의도 한주면옥의 명성을 지키며 3대가 함께하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사진=김건탁

인터뷰365 김건탁 인터뷰어 = 90년 대 초. 닥터레게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던 뮤지션 김장윤(1967~)의 인기는 대단했다. 1993년 12월 ‘어려워 정말’이라는 곡으로 데뷔한 닥터레게는 수록된 싱글로 음반 판매량 3위, 가요톱10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문화의 변화를 이끌었던 90년대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이 가득했던 신세대들의 욕구충족으로, 레게 장르의 열풍은 사회적 신드롬이 되었다. 레게음악의 계보는 김건모에서 임종환을 거쳐 룰라와 투투로 이어졌다. 때마침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닥터레게와 몇몇 레게 뮤지션들은 설 자리(무대)를 읽어가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와 함께 자신의 음악이 대중에게 외면받자 김장윤의 음악적 괴리는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가 권유한 마약에 손을 대면서 구속되었고 생명과도 같은 음악을 잃어버린 김장윤은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김장윤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며 손을 잡아준 이가, 지금의 아내 신수경이다. 신수경 역시 90년대 초 미모와 함께 음악성을 바탕으로 앨범 ‘아직 어린 나’로 가수 활동을 하며 드라마와 예능프로에도 출연했다.  

2000년대 김장윤·신수경 부부는 제주도로 이주하여 개신교 전도사로 목회 활동을 함께 했다. 김장윤은 한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아내 신수경과 함께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가족처럼 생각하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스스로 천국이라 생각하는 가정을 지키며 이겨 냈고,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인 밥 말리(자메이카의 가수 겸 작곡가. 레게 형식을 록과 절묘하게 섞은 음악으로 세계적인 슈퍼스타)의 타이틀 앨범처럼 ‘삶의 레볼루션’을 이루어냈다.

현재 김장윤·신수경 부부는 서울 여의도에서 면옥을 운영하고 있다. 김장윤 부모님이 40여 년간 운영했던 곳이다. 김장윤의 아버지는 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일주 전 의원, 어머니는 63년도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김태희 여사다.

김장윤·신수경 부부는 늦둥이 딸 김채리 양과 음악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딸 김채리 양(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역시 작사와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뮤지션의 길을 가고 있다.  

3대(代)가 나란히 인생길을 가고 있는 김장윤·신수경 부부를 만나, 함께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90년대 초 레게 돌풍 몰고온 '닥터레게'

- 본인 소개와 함께 근황을 부탁한다.

“93년 ‘어려워 정말’이라는 곡으로 데뷔했던 닥터레게의 김장윤이다. 현재는 배우자인 신수경과 함께 여의도에서 함흥냉면 전문점인 한주면옥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부모님께서 40여 년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나한테는 고향 집 같은 곳이다.(웃음)”

- 90년대 초 국내 최초의 레게 음악가였다. 음악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중학교 때부터 작사, 작곡을 시작했다. 용돈을 모아 중고 통기타를 구입하고 마음에 맞는 멤버(친구)들과 밴드도 결성했다. 배재중학교 재학시절에는 3년 내내 반장과 학생 부회장, 보이스카우트 단장까지 하면서 전교 5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기에 집안의 기대가 컸다. 아버지에게 음악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크게 실망하셨다. 그럴수록 음악에 대한 나의 열정은 더욱 커져만 갔고 결국 집을 나와, 단짝 친구와 음악 작업에 몰두했다.”

닥터레게의 데뷔앨범 ‘어려워, 정말’의 표지. 작고한 김중만 사진작가의 작품이다./사진=김장윤 제공

- 데뷔 앨범(싱글 2곡) 제작의 스토리가 대단한던데. 당시 국내 가요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미국 로스엔젤리스의 A&M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A&M스튜디오는 마이클 잭슨이 주도하여 세계적인 가수 45명이 참여했던 ‘위 아더 월드(WE ARE THE WORLD)’를 녹음했던 그 스튜디오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BAD’ 녹음에 참여했던 세계적인 브라스 팀이 세션으로 참여했고, 록 밴드 U2와 마돈나의 앨범을 작업했던 엔지니어 타비 모테가 참여했던 놀라운 음반이다. 이 싱글 음반은 미국 현지에서 진행한 녹음 제작비만 1억 원이 넘게 들었다. 당시 신세기 레코드 대표 아들인 윤태원 제작자의 통 큰 투자와 고인이 되신 김중만 사진작가, 당시 매니저 업무를 보았던 현 한국음원협회 이덕요 회장 등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울러 독특한 우리의 패션과 헤어스타일 덕분에 변화를 꿈꾸던 젊은 신세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응을 얻었다. 아울러 데뷔 싱글은 30만 장이 넘게 팔렸으며 인기가요 차트 2위까지 등극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국회의원 출신 아버지와 미스코리아 진 출신 어머니..."음악에 대한 제 열정은 꺾지 못하셨죠"

김장윤의 아버지 김일주 전 의원. 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그는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현 남북하나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사진=김장윤 제공

- 아버지가 농촌계몽운동을 하다 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일주 선생이고, 어머니는 63년 미스코리아 진 출신 김태희 여사다. 어린 시절은 어땠나. 혹자들은 부러워하겠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중압감이 있었을텐데.

(김일주 선생은 6.25 전쟁으로 남한으로 넘어온 실향민 출신 전 국회의원이다.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의 총살 위기서 극적으로 탈출해 청소부·정비원·택시기사를 하면서 독학으로 대학까지 졸업해 15대 안양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현 남북하나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 당시 노래하는 사람들을 ‘딴따라’로 통칭해서 불렀으니까. 어린 시절 내 기억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집안이 붐볐는데, 주변 이웃들에게 각종 식료품과 생필품 등을 나누어 주시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북도 단천이었고, 한국전쟁으로 혈혈단신 남하하셨기 때문에 어려운 분들의 상황을 더욱 신경 쓰신 것 같다. 15대 국회의원(경기도 안양)을 역임하면서도 북한이탈주민회장을 2번이나 하셨다. 어머니는 숙명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63년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 된 김태희 여사다. 초, 중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웃음)

그러나 음악을 취미 활동으로 생각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대한민국의 리더가 되길 바라던 아버지와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다 이스라엘 키부츠 농장에 교환학생으로 유학 아닌 유학을 가게 됐고 하루 8시간 농장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였기에 음악에 대한 목마름 해소할 수 있었던 탈출구이자 해방구였던 셈이다. 그 후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레게음악과 그 밖의 프로듀싱 과정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음악적 소양과 견문을 쌓았다.”   

2010년 미스코리아 50주년 기념식에서 김태희 여사. 역대 미스토리아 진 50명으로 선정되어 공로상을 수상했다./사진=김장윤 제공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기억나는 추억이나 일화가 있다면.

“내가 생각해도 놀랍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버지는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읍 출신이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의 징집을 기피하다 끌려온 46명 중 한 명이었고 구덩이에 생매장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셨다. 남한에 오신 후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시며 평생을 지내셨지만, 항상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우셨다. 특히 고향 출신인 북한 이탈 주민들을 보호하고 정착을 지원하는데 힘쓰셨다.

평생 농촌운동(농민교육)부터 새마을 교육을 하시다 정치에 입문하셨지만, 늘 최선을 다하셨고 선거에서 떨어진 다음 날 아침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서재에서 신문을 탐독하고 계셨다. 풀이 죽어있던 나를 위로하시며 “최선을 다했고 그 노력이 51%가 넘었기에, 또 다른 목표를 가지고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는 말씀을 하셨다. 현재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에 위치한 ‘한국지도자아카데미’에서 지도자 양성을 하고 계시다. 아버지는 강단에서 한국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철학을 전하시지만, 난 음악을 통해 내일(미래)을 듣게 해주고 싶다.”

- 신수경 씨가 부인이다. 두 분은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가?

“다들 아시겠지만, 신수경 씨 또한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던 아티스트였다. 데뷔 후 다양한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당시 소속사는 가수로 한정하여 활동하게 하였기에 괴리를 갖고 있었다. 활동을 중단하고 영국 유학을 택하였으며, 당시 영국 현지 밴드 ‘보니카(bonica)’의 싱어로 4년간 활동했다. 국내 잠깐 귀국한 시간에 만나게 됐는데 어쩌면 서로의 상황들이, 동병상련의 심정이랄까. 내가 열렬히 쫓아다녔다. (웃음)”

90년대 초부터 방송 활동을 시작한 신수경은 1993년 1집 앨범 '아직 어린 나' 발표 후 드라마 연기 등 여러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생 딸, 학교 밴드부 싱어이자 리더로 활약...함께 음악 봉사 활동

- 결혼 후 8년 만에 득녀했다. 딸 김채리 양 역시 작사/작곡/연주를 하고 있으며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고 있다. 가족 연주를 통해 어렵고 힘든 분들에게 꿈을 나누고 있는데.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함께하는 삶을 꿈꾸고 있다. 한때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시간이 있었다. 아내가 아니었으며 지금의 행복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활동했던 당시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 가족들의 재능으로, 간간이 자선 음악회 같은 음악 봉사를 하고 있다. 지나온 시간 아픈 기억들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더 많다. 중학생인 딸 채리는 학교 밴드부 싱어이자 리더로 벌써 자신의 길을 가고 있기에, 부모로서 격려와 응원만 해주고 있다.”

김장윤·신수경 부부와 딸 김채리 양이 함께하는 음악 봉사활동/사진=김장윤 제공

- 음악 교류를 이어오고 있는 친한 연예인을 꼽자면.

“부활의 김태원 선배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렵고 힘든 시간, 용기와 격려를 해주신 분이며 나의 멘토다. 지금도 변함없이 전화 통화하면서 서로의 안부와 음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아울러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 당시 함께 음악을 했던 앤디 서(본명 서승현, 1965년생)다. 버클리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며 뉴욕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힘든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였기에 꼭 만나고 싶다. 연락 바란다.”

"앞치마 두르고 주방 들어간 지 벌써 6년...세계 다니며 선교 공연 하고픈 꿈 있죠"

3대 모두가 함께 한 가족사진. 함께 할 수 있는 꿈이 있기에 인생은 아름답다고 김장윤 대표는 말했다./사진=김장윤 제공

- 40년간 부모님께서 운영하던 면옥(냉면 전문)을 6년 전부터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어찌 보면 과거에 뮤지션으로 창작을 하던 요소들이 음식으로 바뀌었을 뿐. 음식에 대한 철학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간 지 벌써 6년째다. 이제 반죽 상태와 냉면 육수의 색깔을 보면 어떤 부분이 빠졌는지 구분된다. 음식은 ‘정성·정직’이 기본 철학이다. 예전에는 찾아주시는 고객 대부분이 부모님 연배였는데 이제는 젊은 연인들도 많다. 특히 여의도라는 지역의 특색이 있기에 봄부터 시작하는 벚꽃축제기간부터 가을 세계불꽃축제까지, 꽃에서 시작하여 꽃으로 끝난다고 봐야 한다. 가게 한편에 마련한 카페에서 아내 신수경과 그 옛날의 시간을 회상하며 웃을 때가, 신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그간 수없이 많은 곡을 썼지만, 옷장 속에 묻혀있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그 음악들을 활용해(한류의 음악도 포함) 어려운 나라를 찾아 가장 힘든 대상들을 초청한 후 그들을 위한 자선 모금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 총 3회의 ‘원 데이 라이브(One Day Live)’를 진행했다. 제주도에서 시작해 호주까지, 호주 공연은 원주민들을 초청해 그 의미를 더했다. 뜻이 맞는 선·후배들과 세계를 찾아 우리의 음악으로 선교 공연을 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꿈이자 사명이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랜만에 인터뷰365를 통해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기에 더욱 감사드린다. 아울러 지금까지 저희 부부와 음악을 사랑해주시는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봄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2023년 봄을 맞아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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