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부조리극 '생일만찬'서 진가 드러낸 고희의 배우 이재희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부조리극 '생일만찬'서 진가 드러낸 고희의 배우 이재희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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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매모호하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작품, 그게 우리 인생 아닐까?
연극 ‘생일만찬’ 공연에서 배우 이재희와 권병길.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오랜 기다림 끝에 핀 들꽃.

대학로 아름다운극장에서 공연중(9월 22일~10월 9일)인 헤롤드 핀터 작, 오승욱 연출의 ‘생일만찬(The Birthday party)’에서 매그 역을 맡은 70세의 배우 이재희가 들국화처럼 청초하면서도 애잔하게 눈에 밟혔다. 1977년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그를 만난 후 40년 넘게 그의 연극 인생을 멀리서 가까이서 지켜보았는데 이제야 이재희가 꽃 같은 배우로 피어난 것이다.

데뷔 초기에 어려운 작품의 주인공을 많이 했고 몇 년 전에도 ‘봉선화’에서 위안부 할머니 역을 맡아 열연했지만, 근래에는 주로 사이드 배역으로 반짝 개성을 보여왔던 그가 모호하고 애매하고 불안한 핀터의 부조리극에서 가을하늘 들꽃처럼 피어났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이화여대 무용과를 나와 이제껏 연극 인생을 살아온 그는 결혼 후 한때 무대를 떠나기도 했고, 다시 돌아와서도 매그처럼 모호하게 살아온 개성이 이 작품과 맞아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늘 반 잔 이하로 맥주를 따라 마시다가 요즘은 소주에 커피를 타 마시는 주당이지만 운동으로 체력을 관리하며 연극 안에 살던 그가 70세에 이렇게 예쁘게 피어나다니…. (외람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헤롤드 핀터의 ‘생일파티’는 몇 차례 보았지만 볼 때마다 혼란스러웠는데 이번 공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장으로 접힌 리플렛에는 몇 줄의 시놉시스와 캐스트가 실렸을 뿐 해설은 없었다. 더욱이 소극장 연극에서 막간 15분 인터미션이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이 연극의 매력이라면 뭐라 할 말이 없다. 해안가 노부부가 운영하는 여인숙에 어디서 왜 왔는지 모르는 스탠리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가 투숙하면서 여인숙은 혼란과 불안, 공포가 엄습하며 아수라장이 된다.

첫 장면부터 매그 역 이재희는 중성적 목소리로 남편 피티(권병길)의 아침 식사를 챙기며 대화를 나누는데 어딘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되묻고 말을 멈추거나 헛소리를 내는 등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나간다. 남편에겐 덤덤한 매그가 부스스한 장기 투숙객 스탠리(최귀웅)에게는 애정 표현을 하는 등 성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매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를 맞으며 뜬금없이 스탠리의 생일파티를 제안한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매그는 독한 술 몇 잔에 무도회의 여왕처럼 몸을 흔들며 황홀경에 빠져든다.

부하 같은 맥켄(김정규)을 대동한 골드버그(최원석)는 스탠리의 안경을 짓밟고 폭력을 가해 무기력한 식물인간으로 만드는가 하면, 스탠리에게 호감을 지닌 룰루(이음)를 농락한다. 소란 끝에 두 남자가 스탠리를 몰아세워 여인숙을 떠나는 게 이 연극의 엔딩이라 더욱 황당하다.

이상한 건 인물들의 캐릭터가 하나같이 비정상이고, 사간과 장소뿐 아니라 기승전결도 분명치 않은 채 2시간이 넘는 이 모호한 공연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유도 모르지만 세 남자가 뒤엉켜 활극을 벌이고 난장판 생일파티를 벌여 무대를 시끌벅적 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막과 3막은 골드버그 역 최원석이 주도하는데 뚝심이 대단했다. 그 많은 대사를 정확한 발성으로 옮기면서 과도한 제스처를 쓰는 연기력으로 모호한 상황을 이끌며 극을 떠받치기 때문이다. 그의 정체는 무얼까. 황금만능주의의 전형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권력 같기도 하다. 반면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맥켄 역 김정규는 각진 연기로 획일적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스탠리 역 최기용은 사회와 타협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캐릭터를 온몸으로 보여주기는 했으나 연륜에서 우러나와야 할 연민의 아우라까지 소화하기는 버거워 보였다. 블루 역 이음은 거대한 힘에 망가지고 무너지는 캐릭터를 육감적으로 해냈다.

연극 ‘생일만찬’ 주역들의 커튼콜 장면.

도대체 미궁 같은 애매모호함과 불명확한 상황의 이 작품에서 핀터는 무엇을 주려 했기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까. 자료를 보니 “성격이나 동기를 대담하게 무시한 작품으로, 연극적 감수성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안경을 깨버리는(시각 자체를 바꾸려는 의도 아닐까) 등 상징까지 섞여 있으니 난해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헤롤드 핀터가 희극적으로 그려낸 이 비극은 결코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지 않는가.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그 자체가 인생이 아닐까 생각하면 사실 이 작품이 악몽 같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연극 ‘생일만찬’ 주역들의 커튼콜 장면.

요즘 이런 어려운 작품은 잘 공연 안 하는데 연극계의 파워 최원석과 오승욱 연출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이 작품을 올린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특히 그들의 작업은 70대의 권병길 이재희 배우가 있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무대에 선 권병길은 절뚝이는 걸음 그 자체가 연기였고, 옴 몸에서 풍기는 외로움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 배우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생일만찬’에서 배우 이재희의 들꽃 같은 아우라에 휘감겼다. 그의 매력은 딱딱한 의자에서 감내한 불편한 시간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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