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애심·백익남·정나진·박윤정 등 연기파 배우들이 공감 안겨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낙엽이 밟히는 늦가을, 코앞에 휴대전화만 들이대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누군가를 기억하고 회상하며 허허로워지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같은 연극.
혜화동 나온씨어터(~11월 13일)에서 만난 박상현 작·연출의 ‘오슬로에서 온 남자’는 연극이 결코 허구와 상상 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 있구나, 그래서 무대 위 배우들을 보면서 내 감정이 동화되고 먹먹해지는 그리움 같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박상현은 5편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연극으로 묶었다. ‘사리아에서 있었던 일’, ‘해방촌에서’, ‘노량진-흔적’, ‘오슬로에서 온 남자’, ‘의정부 부대찌개’ 순으로 이어지는데, 굳이 주제의 유사성에 얽매이기보다는 우리와 주변부 인물(작가는 경계인이라 했다)들의 애환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플렛의 ‘조각보 같은 이야기’란 표현도 좋지만, 필자는 주옥같은 단편들이 묶인 문학상 수상 단행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연극은 작가와 연출과 배우가 동화되어 빚어내는 숙성된 아우라에 젖어 들어야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배우가 한 역만 하는 게 아니라 단편을 넘나들며 복수의 역을 맡는데, 먼저 나왔던 그 배우인 줄은 알겠는데 캐릭터 변신이 두드러져 다르게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로지 배우들이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무대장치며 조명 등이 도드라지지 않고 자연스러워 좋았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다수였지만 낯선 배우들도 있었는데 팀별로 앙상블이 잘 맞았고, 무엇보다 작가의 주제와 연출의 의도를 이해하고 연기하는 것 같아 5편의 연작인데도 맥이 이어졌다. 가끔 옴니버스 형식의 공연을 보면서 이질감을 가졌는데, 이 작품은 저변에 흐르는 정서가 상통했고 이음새도 매끈했다.
한예종 교수인 박상현 작가는 오랫동안 희곡을 써오면서 정제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필자는 그의 작품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사회와 이웃에 대해 속 깊게 짚어 내는 질박함이 좋았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공동체의 경계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조명하면서 앞만 보고 사느라 잊고 있었던 보통 사람들의 기억들, 특히 가난했지만 훈훈했던 날들과 알싸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펼쳐냈다.
5편의 단막 중 필자는 ‘노량진-흔적’(강애심·정나진·이상홍·김민주)이 특히 가슴에 와닿았다. 익숙한 지명과 눈에 잡힐듯한 주변 묘사도 내 유년의 추억들을 주마등처럼 비쳐냈지만, 단칸방에서 살을 맞대고 살던 형과 동생,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색바랜 활동사진처럼 필자의 시야에 각인되었다.
등장하지는 않지만, 평북 선천 출신의 해방촌 아저씨가 아버지 빚을 못 갚아 주었다는 충북 영동군 심천의 임야가 고향 선천의 심천과 이름이 같다는 설정은 실향민들이 지닌 그리움의 총화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이 단편은 앞 작품 ‘해방촌에서’(정나진·백익남·문현정)와 맥이 닿아있다. 6·25 전쟁 후 피란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해방촌을 무대로 작가는 집을 보러온 여성의 이야기를 펼치지만, 실은 성 소수자 커플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여러 번 보았던 백익남의 연기가 과하지 않으면서 빼어났는데, 무심한듯한 정나진의 슬픈 눈망울 연기도 퍽 인상적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 ‘의정부 부대찌개’(백익남·엄옥란·박윤정·강연주·문현정·김민주)는 가족애와 더불어 다문화 여성의 애환을 그려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햄과 소시지에 여러 가지를 넣고 끓이는 부대찌개야말로 다문화 이웃을 포용하자는 메시지와 잘 맞아떨어졌다. 백익남이 ‘해방촌에서’의 이미지와 다른 아버지 연기를 해냈고, 강연주의 연기가 신선한 맛을 더했다.
도입부인 ‘사리아에서 있었던 일’(이상홍·박윤정)은 스페인 여행길에서 만나 추억을 쌓았던 남녀가 서울에서 재회하여 느끼는 감정을 아스라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냈는데, 박윤정과 이상홍의 자연스러운 연기 호흡이 돋보였다.
이 작품의 타이틀인 ‘오슬로에서 온 남자’(이동영·엄옥란·강애심·강연주)는 어려서 노르웨이로 입양 간 남자가 성장해 어머니를 찾아 한국에 왔다가 고독사한 기사를 근거로 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를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들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입양아 역 이동영의 어눌한 듯한 우리말 연기와 해설 역 강애심의 연기가 극중극인데도 가슴을 아리게 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다 언급하고 싶을 만큼 진실했는데 엄옥란 등 중진과 문현정 김민주 등 젊은 세대가 고루 어우러져 평범한 사람들, 실향민 입양아 다문화 가족 등 경계인들의 다양한 속내와 감정들(그리움, 부끄러움, 아픔, 사랑)을 담담하게 그려내 내 얘기처럼 공감되는 연극, 박상현의 다섯 빛깔 조각보는 필자에게 이처럼 잔잔한 여운을 안겨주었다.
-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