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만원 관객 앞에서 펼친 노배우의 45년 만의 재연(再演). 개성파 배우 주호성이 7월 1일 대학로 공간아울에서 막을 올린 '아르쉬투룩 대왕'은 노배우와 젊은 배우의 연기 호흡이 척척 맞는 데다 다양한 소품과 파격 분장으로 70분간 관객을 즐겁게 했다.
한 배우가 45년 주기로 자신이 연기했던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려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열정이 넘쳐야 하고, 건강이 뒷받침되고, 능력(제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연극 담당 기자로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그 공연을 보고 기사화했던 필자는 76세에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 감회가 남달랐다.
20대 후반 젊은 왕에서 70대 초반의 대왕 아르쉬투룩으로 등장한 배우 주호성은 노련하고 노회했다. 시작부터 여유가 있었다. 관객 앞에서 분장과 의상을 갖추면서 사라진 동양극장과 서계동 복합공간의 아쉬움과 문제점을 이야기로 풀어나갔다.
은퇴라도 있기를 바라는 늙은 왕은 생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신하 바가와 연극놀이를 하지만 이 또한 신명이 나질 않아 짜증을 내다가 뜨락이 있는 작은 방을 찾아 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주호성은 감정 기복이 심한 늙은 왕의 나른한 일상을 신들린 듯이 풀어냈다. 어릿광대 같은 몸짓으로 관객을 웃기다가도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리고, 먹고 싸는 짓 밖에 할 게 없는 권력자의 허무를 천의무봉(天衣無縫 : 성격이나 언동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 하고 천진무구한 바보연기로 객석을 휘어잡았다. 주호성만큼 감정의 변화를 정확한 발성과 유연한 몸짓으로 표현해낼 배우는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소극장운동이 활기를 띨 때, 주호성은 재미(在美) 배우 정호영과 콤비를 이뤄 이 작품을 창고극장에 올렸는데, 요즘 말로 대박을 터트려 세 번의 연장공연을 했다. 당시 유행하던 부조리극을 익살과 광대 짓으로 연기해 관객을 사로잡았던 그는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장봉태 연출의 현대 감각으로 다시 올려진 이번 작품은 세련된 무대(이창원), 현란한 의상(박수아), 무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다채로운 소품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더욱 생동감 넘치게 살려냈다. 45년 전 꼬마 자전거는 호화 장식을 한 목마로 변신을 했고, 복화술 등 특수 연기로 볼거리를 풍성하게 한 점도 변화였다.
'아르쉬투룩 대왕'에는 괴팍한 요리사(심마리)와 말더듬이 통역사(정재연), 대사 없는 죽음(김준효) 등이 나와 웃음 한 스푼, 공포 한 순간을 선사하지만, 대왕 역 주호성과 신하 바가 역 주현우가 앙상블을 이루는 2인극에 가깝다.
필자는 연습 과정을 보며 주현우 배우가 정호영만큼 해낼 수 있을까 우려했는데 공연을 보면서 기우임을 느꼈다. 좀 과장하면 바가 역의 주현우는 젊은 연기파 배우 탄생이라 할 만큼 연기가 풋풋하면서도 힘 있고 다재다능했다.
화려한 분장과 처세술로 왕을 능가할 수도 있는 배역임에도 주 배우는 시종 왕의 연기를 받쳐주면서 노청의 조화로 극의 앙상블을 살려냈다. 특히 인형을 이용한 복화술 연기가 신선했다. 주호성이 이끄는 극단 원에서 '소작지'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해 온 그는 화술과 동작을 더 부드럽게 연마하면 제2의 주호성 같은 성격파 배우로 대성할 여지를 보였다.
이번 작품을 보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요즘의 난장판 정치 행태의 축소판 같다는 점이었다. 로베르 뺑쥐의 원작은 부조리극이지만 우리 정치판의 민낯을 보여주는 풍자극으로 읽혔다. 또 하나는 목숨이란 하루아침에 스러질 수 있다는 교훈이다. 허세를 부리고 사치를 해도 어느 순간 죽음이 닥쳐온다면 의미가 없다. 일상의 소중함과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고 열심히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이 연극의 압권은 왕이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클라이맥스다. 자객이 들고나온 왕의 데드마스크는 처연함의 극치였다.
내용과 형식이 재미있고, 이처럼 강렬한 메시지도 주는 연극이라면 흡족하지 아니한가.
마친 주호성 배우에게 물었다. 45년 전과 어떻게 무엇이 다르냐고? 그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때는 관객의 관심과 사랑이 더 뜨거웠다”고…. 공연은 10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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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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