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송해 "내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꼭 한 번 방송하고 싶다" (송해 추모 특집)
[그때 그 인터뷰] 송해 "내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꼭 한 번 방송하고 싶다" (송해 추모 특집)
  • 김리선 기자
  • 승인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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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문화 분야 인간문화재' 송해의 그때 그 시절 인터뷰
- "내가 6.25 휴전 전보 친 장본인"
국민 MC 송해

현역 최고령 국민 MC 송해가 8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송해는 국내 단일 프로그램 최장수 MC 기록을 갖고 있다. 1984년부터 38년간 국내 대표 장수프로그램 KBS '전국노래자랑' MC로 활약하며 전국 방방곡곡의 국민들을 만나왔다. 

대학생 아들을 사고로 떠나보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방송을 은퇴했다가, 바람이나 쐬자는 PD의 권유로 다시 마이크를 잡았던 게 어느덧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전국~”이라고 외치는 그의 구수한 목소리에 휴일 정오의 나른함을 깨던 이들은 이제 노인이 되고, 부모가 되어, 또 새로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TV앞에 모였다.

송해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꼭 한 번 방송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인터뷰365는 송해의 84년 인생과 70년 예인생활을 돌아보는 공연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2011년 9월 2일자)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전국노래자랑을 하며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어느 시각장애인 노인이 딸의 부축을 받아 무대에 올라 ‘나그네 설움’을 절절하게 부르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노인이 그동안 살아온 생애를 노랫말에 진심을 담아 열창하는데 그냥 눈물이 주루룩 흘렀어요. 그분이 출연한 이후부터 전국노래자랑에 장애인 분들도 스스럼없이 출연하게 됐지요."

- 중간중간 힘들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아무렴요. 여러분들과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방송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을 겪게 되고, 사람관계에서 오는 상처도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전국노래자랑이 없었으면 송해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되뇌었습니다. 언제까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지막 방송하는 날까지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 전국노래자랑 MC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남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내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마을 분들 모셔놓고 꼭 한 번 방송을 하고 싶어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송해는 해주 예술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4살 때부터 도립극단, 이동예술대 등의 공연에 아코디언 하나 들고 따라나서며 예술인의 길을 걸었으니 무대 위에서만 80년 세월을 보낸 셈이다. 그는 1·4 후퇴 무렵 피난길 연평도에서 LST화물선에 올라 혈혈단신 월남했다. 부산에서 국군 통신부대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피난 당시를 당시를 떠올리며 "제 예명 송해(본명 송복희)은 피난 배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지었다"고 회상했다. 

- 피난 당시 일화 좀 말씀해주세요.

"21살. 뭐든지 해보고 싶은 나이에 6.25가 발발했어요. 고향에 구월산이라는 명산이 있는데 패잔병 4천명이 산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서 징을 쳐가며 약탈을 했어요. 날 밝으면 다음마을로 도망가고, 또 다음마을로 여섯 일곱 번 정도를 도망가다가 아 이제 여기까지만 피신하면 다시 집에 갈 수 있겠지 싶었는데 영영 못 돌아가게 됐지요. 연평도에서 LST화물선을 탔어요. UN이 정보가 빠르니 그 날짜에 피난민들이 몰려올 거라 예상하고 배를 대기시킨 거죠. 제 예명 송해(본명 송복희)는 그때 그 배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바다야 내 갈 길 어디냐”라고 읊조리며 지은 겁니다."

- 피난 와서 국군에 입대를 하셨죠?

부산 내려가서 바로 훈련소에 들어갔어요. “중학교 졸업 이상 거수!” 해서 손을 들었더니 통신학교에 배정을 받았는데 무선이 그렇게 신기한 거야. 일반 전문학교에서 2년 공부할 분량을 6개월 만에 맞아가며 배웠지요. 요즘 자동차 광고 보면 “쭈다쭈 또또또또또”하더니 차가 슈욱 나와서는 “케이파이브”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제가 다루던 모스부호로 쭈다쭈가 ‘K’, 또또또또또가 ‘5’를 의미해요. 제가 1953년 7월 27일 9시부터 휴전전보도 쳤습니다. “27일 밤 10시를 기해 모든 전선에 전투 중단!” 어느 프로그램서 전우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다들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더라고요."

- 지금은 밝게 회상하시지만 고생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

"일본군 출신 고참이 있었는데 비만 오면 일부러 포복시키고 날 많이 힘들게 했어요. 제대만 하면 저 놈 꼭 찾아간다며 벼르고 별렀었죠. 나중에 대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아니 웬걸.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서로 부둥켜안고 난리가 났죠.(웃음) 부산생활도 잊을 수가 없어요. 피난 당시 저에게 도움을 줬던 경상도 아지매가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씀을 자주해주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제가 단단히 각오하고 인생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송해는 휴전 직후인 1955년 황해도에서의 경험을 이어 창곡악극단 가수로 연예계에 정식 데뷔했다. '전국노래자랑'을 맡기 이전에는 구봉서, 서영춘, 김희갑, 배삼룡 등과 한국 코미디의 부흥에 일조했다. 송해는 구수한 입담으로 코미디언이자 진행자, 가수로 활동하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 연예계 데뷔 당시에는 분위기가 어땠나요. 

"휴전 후 바로 일반 악극단에 들어갔는데 초창기 연예계 생활은 지금과 비교가 힘들 만큼 무서웠어요. 당시 일본식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었어요. 적산가옥 여관에 묵게 됐을 때 선배 방 앞을 지날 때면 마루에 삐그덕 소리 안내려고 앞 축으로만 총총걸음으로 지나가고 그랬지요. 이동할 때는 선배들 보따리 5~6개씩 더 들고 다녔고, 공연 끝나면 한 겨울에도 양말만 7~8켤레를 빨아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고생도 아니지. 그때로 돌아가 또 고생하라고 해도 그리운 선배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대중들의 박수를 받기 위해, 그들을 즐겁게 해주고자 하니 건강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전국노래자랑 방송 때문에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운동도 되고요. 그저 내 마음 즐겁게, 상대방에게 웃음을 드릴 수 있는 직업 덕분에 건강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대중예술에도 유산들이 있다"며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 보존하고 지켜야할 때가 왔다"고 강조했다.

송해는 타계 전까지도 각종 방송과 광고에 출연을 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송해는 평생 대중문화 역사를 함께 해온 '대중문화 분야 인간문화재'이자, '방송계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김리선 기자
김리선 기자
leesun@interview365.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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