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진·정승일의 팽팽한 대결...강애심 배우의 매혹적인 귀족 부인 연기
- 예술과 과학, 인문학 조예 없어도 지적 탐험 쾌감 안겨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연극 '아르카디아'(8월 3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영국 작가 톰 스토파드의 희곡을 김연민이 연출한 한국 초연으로, 강애심 정승길 김소진 정원조 등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지만 깊고 강한’ 작품이다.
필자는 연극 기획자의 추천으로 이 공연을 접했으나 일반 관객이 소화하기가 녹록지 않은 내용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인문학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기본 소양을 익히고 사회에 진출하지만, 우리는 물리학이나 첨단과학은 물론 철학 역사 등 학술적 토대가 약한 것도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요즘은 인터넷 검색에서 AI 시대로 넘어가 아날로그식 공부는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몰아가지만 '아르카디아'를 보면 컴퓨터가 없던 시대에도 16세 소녀가 수학의 알고리즘을 찾아내고, 현대 지식사회에서도 낭만 시인 바이런과 카오스 이론을 결부시키는 학구적 탐구열은 식지 않았다는 것을 이 공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론대로라면 이 연극은 굉장히 난해할 것 같지만 이해를 못 할 정도는 아니다. 희곡이 탄탄하고 연출의 해석이 평이하고 감각이 신선해서다.미지의 대상을 발견해가는 재미가 쏠쏠할 뿐 아니라 배우들의 캐릭터 변신도 흥미있는 볼거리인 것이다.
작가 톰 스토파드는 연극, 영화 애호가들에게 친숙한 작가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 등으로 연극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 작품상을 5회나 수상했고, 지금 서울에서 공연 중인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영화시나리오를 쓴 작가로, 영국 정부로부터 'Sir' 칭호를 받은 88세 현역 작가다. 그는 '아르카디아'로 1994년 로렌스 올리비에 상을 받았다.
이 작품을 번역 각색 연출한 김연민은 지난해 국립극단의 '전기없는 마을'을 쓰고 연출한 신예다. 필자는 김연민 연출의 작품을 처음 대하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다룬 내용임에도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열역학, 결정론과 자유의지 등 전문용어들을 구어체로 풀어낸 각색 실력이 돋보였고, 가운데에 무대를 설치하고 양 옆에 객석을 두어 아르코 소극장 전체를 활용한 연출방식도 신선했다.
원작에 충실하다보니 러닝타임이 145분(인터미션 15분 포함)으로 좀 길긴 하지만 19세기와 21세기 시공간을 넘나드는 스피디한 극적 전개와 배우들의 팽팽한 연기 대결을 따라가다보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특히 디지털 세상에서 1800년대 영국의 대저택과 그 저택을 지켜온 은둔자, 그리고 요즘 그 시대를 연구하는 작가와 교수 등 캐릭터들도 다양해 인물관계와 고리를 푸는 것도 재미있다.
이상향을 뜻하는 '아르카디아'에 톰 스토파드는 전문적 지식과 세련된 지성을 바탕으로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소멸을 정교한 언어로 직조해 넣어 관객들에게 지적 탐험의 쾌감을 안겨준다.
뉴턴의 제3법칙, 양자역학의 불확실성 원리, 열역학 제2법칙, 결정론과 자유의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랑과 진실, 역사와 예술 등을 말하지만 작가는 지식을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인간의 온기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했음을 관객들은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을 더 쉽게 이해하려면 '육욕적인 포옹(사랑)'이 무엇이냐로 시작해 사랑의 결실로 끝나는 고품격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주의 혼돈과 무질서 속에도 사랑과 진실은 이어지는 것이 이상향임을 작가는 강조했고, 연출가는 첨단 영상을 이용해 고전의 지적 향연을 세련된 현대극으로 펼쳐냈다.
1809년 영국 커버리 가문의 대저택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레이디 크롬(강애심)의 딸 토마시나(김세원)는 수학천재며, 그의 가정교사인 셉티머스(김민하)도 상당한 지성의 소유자다. 이밖에도 레이디 크롬의 남동생 브라이스(정원조)와 시인 체이터(권형준), 집사 젤라비(김규도), 정원사 녹스(서요한)가 산 것으로 작가는 설정했다. 이들은 정원 리모델링과 남녀 염문 등으로 화제를 끌어간다.
그리고 곧바로 무대에 2025년의 현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작가 한나(김소진)와 교수 버나드(정승길), 커버리 가문의 후손인 발렌타인(권일), 발렌타인의 동생인 클로에(박희정), 거스(강유성) 등이 저택에 숨겨져 온 비밀과 역사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특히 방랑자적 삶을 살았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1809년 당시 커버리 가문에 살았는지에 대해 학술적 논쟁을 벌인다.
후반부는 두 시대 인물들이 서로 교차하거나 소통하는 독특한 극 전개가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19세기 인물이 21세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설정은 이 연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학과 과학, 이성과 낭만, 사랑과 열정 등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극은 두 쌍(토마시나와 셉티머스, 한나와 거스)의 왈츠로 막을 내린다.
결국 주제는 사랑인 것이다.
필자는 강애심 배우를 데뷔 때부터 성원해 왔는데 최근 매체에서도 활약이 많아 반가우면서도 아쉬움을 가졌었다. 그런데 이번 '아르카디아'에서 그가 보여준 고전적인 여인상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고혹적이었다.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애정 앞에서의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개성적 캐릭터를 맛깔스럽게 연기한 것이다.
무대 커리어가 있는 작가 한나 역 김소진과 교수 버나드 역 정승길의 학술적 논쟁은 지성의 대결답게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지적 흥미를 갖게 할 만큼 이들의 화술 연기가 좋았다.
토마시나 역 김세원과 셉티머스 역 김민하의 젊은 케미도 잘 맞아 극에 신선감을 불어넣었다.
김연민 연출의 '아르카디아'는 수학과 과학, 인문학적 바탕의 지적(지식과 지성)연극도 젊은층과 중년층 관객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음을 입증했을 뿐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진 연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