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태양제도 (다와다 요코, 은행나무, 2025)
최근 몇 년간 젊은작가상의 기조에 느끼는 아쉬움이 있다. 분명 등단 10년 이내의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신작 공고이지만 모두 ‘아는 얘기’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30의 한국문학 애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안다무(안온, 다정, 무해)’의 정서를 반복하거나, 여성향의 서브컬쳐(아이돌 문화 등) 속 밈화된 담론을 이어가는 현상 등은 한국문학이 주 소비층과 생산층 사이 접면이 넓은 다이어그램을 공유하는 유기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분명 이와 같은 연결이 주는 기민함이 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외국어를 읽는 것처럼 발음할 수 없는 글자를 따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놓여지기를 바란다.
다와다 요코의 Hiruko 3부작 마지막 편인 ‘태양제도’는 아는 얘기를 가장 모르는 곳에서 끝맺는다. 주인공 Hiruko를 포함한 6명의 인물은 발트해를 따라 여행하며 여행지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이들과의 공동체를 향유한다. 일본 창세기 신화 속 ‘거머리’를 뜻하는 버려진 딸이자 이야기의 중심인 Hiruko는 뜻하지 않게 태어나 노여움을 받고 버려져 필연적으로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 한국 설화 속 바리데기를 연상시킨다.
테드 창의 sf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외계족 헤파르의 언어는 시간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과거와 미래가 일렬로 이어지지 않는 비선형적 구조를 통해 현재의 사용자들과 역사를 공유하고 연대한다. 다와다 요코의 언어 역시 각기 다른 문자와 관습의 시차를 애써 해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 틈이 주는 결핍이 있는 이들을 엮는다. 다와다 요코의 특징적인 서술 중 하나인 국경과 언어의 경계를 없애는 축지법은 돌아갈 곳 없는 이들이 공유하는 새로운 언어로 발현한다. 각기 다른 이유로 Hiruko의 여행에 합류하는 행자 6명의 여행기는 약자의 언어로 쓰는 미래의 신화이다.(이수련 / 비평연대)
■ 맹신자들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궁리, 2024)
'맹'이라는 글자는 항상 이렇게 쓰인다. 사람의 이름으로 쓰일 때를 제외하면, 부정적이지 않은 느낌으로 '맹'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건 '맹렬하다' 정도가 아닐까? 그마저도 부정적이진 않지만, 급진적인 단어에 가까울 것 같다. 물론 그 이유는 우리가 보통 '사나울 맹'의 '맹' 자만 쓰기 때문이다. 즉, '맹신자'는 '사납게 믿는 사람'이다. 여기서 '사납다'는 말만 빼면, '믿는 자'는 실은 우리 모두를 지칭한다. 종교가 아니어도, '믿음'은 인간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동인이다. 본인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언제나 '맹신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 호퍼가 제시한 125가지 단상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신자임을 고집하면서도 동시에 맹신자를 지양하는 게 아닐까? 참고로 '지양'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이다.(맹준혁 / 출판편집자·콘텐츠 기획자)
■ 어느 고독한 농부의 편지 (이동호 지음, 책이라는신화, 2012)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아홉 살에서 열 살 무렵까지 농부인 외할아버지와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글을 깨우쳐 글자를 쓰고 글을 짓는 기쁨에 푹 빠져 있던 어린 손녀는 외할아버지와 주고받는 펜팔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습니다.
더 빛날 수 있었던 당신 딸을 주저앉힌 미운 손녀였을 텐데, 그래서 이전까지 댁에서 만났을 땐 그리 정을 주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1년간의 펜팔 덕분에 우린 꽤 많이 친해졌습니다. 저는 농부인 외할아버지 삶의 루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사계절이 주는 감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글씨체를 빼다박은 외할아버지의 꼬장꼬장한, 하지만 손녀 한정으로 유독 다정해지시는 성정도 알게 되었지요.
‘어느 고독한 농부의 편지’는 역시 농부였던, 이제는 고인이 되신 외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농부들은 씨를 뿌리고, 기다리고, 다시 걷고, 또 기다립니다. 뿌린 만큼 거두지 못해도 괜찮다고, 그 시간 속에 이미 삶의 답이 있다고 하지요.
자연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고요하게 돌고, 그 속에서 농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합니다. 삶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책에서 이동호 작가는 글맛이 느껴지는 소박한 언어로 전해줍니다.
이 책은 땅을 일구며 얻은 삶의 진실을 담담하게 풀어낸 기록입니다. 화려하지 않아서, 과장되지 않아서,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 잊고 지냈던 사계절의 정취, 장맛비에 무너진 땅을 보며 근심하지만 매일 아침 다시 일어나 한 걸음씩 걷는 삶이 도시의 바쁜 삶 속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집니다.
불어오는 꽃향기를 맡으며, 혹은 마음이 복잡한 날에, 계절이 변할 때마다 펼쳐 읽고 싶은 책.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이 책은 당신의 삶에 따뜻한 빛우물을 드리울 것입니다.(김미향 /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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