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자매일기(박소영·박수영 지음, 무제, 2024)
갈수록 더워지는 지구에 나는 도움보다 해를 남기는 사람임을 고백한다.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고, 텀블러나 에코백을 쓴다한들 점심으로 먹은 소고기, 에어컨/히터 사용이 탄소 배출량이 상당하기에.
인생은 한 번 뿐, 욜로(You Only Live Once, YOLO)라며 흥청망청 보낸 시간 뒤로 누군가의 존재는 지워졌다. 동물 구호 활동가 자매의 번뜩이는 사유로 YOLO의 의미를 뒤집어버린 이 책은 에어컨이 실내온도를 낮추는 사이 억압받는 동물과 취약 계층의 고통을 떠올린다. 비건 지향을 하게되고, 예술이 현실과 괴리가 되지 않도록 사유하는 이들의 문장은 교환일기처럼 은밀하면서 솔직하다. 서로를 생각하면 이기심은 멀어지고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돌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책이다. 이기심은 기회를 뺏지만 돌봄은 한 번 더 기회를 피운다.
이상기후가 가속화되고 무엇이든 착취해서 돈벌이 삼는 기후 악당들이 즐비한 세상, 유효한 사실은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란 것.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절멸을 추구할 것인가. 돌봄을 택할 것인가.(최상현 / 출판평론가·비평연대)
■꽃에 미친 김군 (김동성 지음, 보림, 2025)
“벽(癖)이 편벽된 평을 뜻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전문적인 기예를 익히는 것은 오직 벽(癖)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바야흐로 김 군(김덕형)이 화원을 만들었다. 김 군은 꽃을 주시한 채 하루 종일 눈 한 번 꿈쩍하지 않는다.“
박제가, ‘백화보서(百花譜序)’
계속 떠돌아다니는 방랑벽, 습관적으로 도둑질하는 도벽의 벽(癖)은 버릇이나 습관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정적 의미로 주로 쓰이지만, 박제가는 벽의 성격이 새로운 분야와 주제를 발굴하고 깊이 탐닉하는 원동력으로 진단했다.
박제가가 언급한 김 군, 즉 김덕형은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화원을 가꾸는 화가라는 사실만 알 수 있다. 김덕형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작품만 남아있고, 그의 작품으로 확정 지을 수 있는 그림은 없다. 그가 남긴 식물백과 ‘백화보’는 실전(失傳)됐다.
김 군의 화풍이나 글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박제가의 글 속에서만 ‘꽃을 좋아하는 광인’의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 그림책 작가 김동성이 글과 그림을 모두 맡은 첫 그림책 ‘꽃에 미친 김군’은 박제가의 글에서 출발했으리라. 꽃을 바라보며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 김 군의 꽃사랑이 그림책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하나에만 깊이 빠져있는 태도는 지금도 그리 반갑게 여겨지지 않는다. 군자가 되기 위한 학문을 고루 배우고,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인간상을 바라는 유학에선 특히 그랬다. 김덕형도 주변에서 광인이나 멍청이라는 비난을 들었으니 오죽했을까. 그러나 박제가는 벌벌 떨며 게으름이나 피우는 위인들이나 편벽된 병이 없음을 자랑한다며, 김덕형의 그림을 찬탄했다.
민들레, 나팔꽃, 진달래, 매화, 모란, 작약, 코스모스, 양귀비… 김덕형의 그림은 남지 않았지만, 작가의 붓끝에서 김 군이 사랑한 꽃의 모습이 세세하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편벽을 병으로 삼았던 시대에, 편벽을 하나의 미덕으로 여겼던 학자, 그 학자가 다섯 번이나 편지로 방문하겠다 사정하도록 어여쁜 꽃을 가꿨던 한 화가. 그 화가의 삶을 꽃의 향연으로 그려낸 오늘날의 그림책 작가.
입춘이 한참 지나고도 눈이 펄펄 내린 삼월의 어느날, ‘꽃에 미친 김군’에는 어느새 봄을 알리는 꽃들의 향내가 이만큼 와있다.(윤인혁 / 공연기획자·문화예술평론가·비평연대)
■마리 앙투아네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이화북스, 2023)
츠바이크의 이 책을 읽고 나니,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죠’라고 말했다는 악녀 마리 앙투와네트가 아니라, 프랑스혁명이라는 거친 물결 속에서 휩쓸려 ‘내려갈수 밖에 없었던’ 왕비 마리를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된다. 역사는 한낱 범인의 인생도 뒤흔들어 놓는데, 프랑스 왕비의 삶은 오죽했으랴. 인생사 오해와 질투 시기와 미움을 사는 일이란 한낱 범인의 삶도 괴롭히는데, 그 대상이 프랑스 왕비였으니 말 할것도 없다.
츠바이크는 마리가 기요틴에서 목이 베이는 오명으로 역사에 남지 않아도 되었을 몇 가지 장면을 제시한다. 들끓는 정치사회 역학관계 속에서 각 개인의 욕망이 합을 이뤄 이런 비극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 상황들이 혀를 찰 정도로 현재와 똑같다. 총선을 앞두고 패스츄리처럼 이해관계로 얽혀드는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고 있으니 1793년 기요틴을 세워올린 프랑스나, 2024년 한국이나 다를 것 없다.
실상 마리 앙투와네트는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 악녀도 아니었다. 원하지 않는 시기에, 원하지 않는 왕비가 되었을 뿐. 파리를 탈출하라는 권유를 거절하며 자신의 희생으로 타인의 위험을 막을 수 있다면 파리에 남겠다는 마리의 편지는 그래도 철부지 소녀에서 왕비로 성장한 것을 보여준다. 속도는 다르지만 인간은 누구나 성장한다. (최여정 / 작가·문화평론가·비평연대)
■트라이브즈 (세스 고딘 지음, 유하늘 옮김, 시목, 2020)
세스 고딘의 ‘트라이브즈’는 연결과 변화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현대사회의 본질을 통찰한다. 그는 공통된 아이디어와 관심사로 모인 사람들, 즉 ‘부족(tribe)’을 강조한다. 그리고 미디어에 막대한 돈을 쓰는 것보다 사람들의 공감과 연결을 활용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부족을 만들고 이끄는 시작은 바로 '관심'이다. 세상 모든 변화는 상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는 이미 공감을 향한 첫발을 내딛게 된다. 공감은 곧 변화를 만들고 싶은 열망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리더십의 본질이 된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부족원이 아닌 하나의 리더로 부족을 이끌 수 있는 자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책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우선 저지르고 봐라!”는 메시지다. 변화는 허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행동하고 나중에 용서를 구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때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망설였지만, 뒤돌아보면 내 삶의 긍정적인 변화는 모두 과감히 행동했을 때 찾아왔다.
‘트라이브즈’는 용기 있게 변화를 꿈꾸고 부족을 이끌고 싶은 사람에게 직관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고민보다 실천이 중요한 바로 '지금' 마음먹은 일을 행동으로 옮겨보자.(강민지 / 문화평론가·프롬레코드대표·비평연대)
■건축하지 않는 건축가 (마츠무라 준 지음, 민성휘 옮김, 인벨로프, 2024)
건축학과에서 5년간의 커리큘럼을 밟으며 느꼈던 위화감이 있다. 그것은 학교를 포함한 건축계 전반에 걸친 모종의 종교적 분위기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분위기가 ‘건축가’(최소 건축인)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숨은 장치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5학년 졸업작품을 마친 이후였다.
건축학과의 숨은 커리큘럼과 여러 건축 관련 매체들은 ‘참된 건축’이라는 신을 모시는 예배당이다. 신도들은 스스로 알아차릴 틈도 없이 맹목적인 신앙을 배운다. 그 종교적 장치는 진짜 건축과 가짜 건축을 분류하며 건축가와 건축업자를 정의 내린다. 학생들은 무의식에 장착한 종교적 장치를 바탕으로 서로의 급을 평가했다. 누군가는 ‘진짜 건축가’를 향한 자신감을 얻는 반면, 누군가는 탈건의 길을 걸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건축학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종교적 시스템에 대해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닌 태풍 속의 찻잔. 졸업 후 바라본 건축계는 급변하는 사회에서도 변하지 않는 엄숙한 신앙이자 태풍 속의 찻잔이었다. 이미 균열이 생길 대로 생겨버린 찻잔 속에서 새로운 건축가들은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가.
일본의 2급 건축사이자 사회학자인 저자는 이러한 건축계의 구조를 ‘계’와 ‘아비투스’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통해 분석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건축계와 사회, 전문가로서의 개인이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추적한다. ‘건축하지 않는 건축가’는 누구나 은연중에 느끼지만 쉽게 언어화하지 못했던 건축계의 분위기와 압력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며,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에게 선명한 화두를 던진다.(설명문 / 건축설계 및 공간디자이너·비평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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