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환상적 생각 (백희성 지음, 한언, 2012)
인생은 눈밭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그동안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무수히 찍힌 발자국일지도 모르겠다. 발자국이 있길래 여럿이 따라 걸었고, 그게 반복되어 길을 만든 거지.
난 깨끗한 눈밭에 첫 발을 내딛는 게 참 설렜다. 누워 뒹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양말이 젖을 걱정에 선뜻 발걸음을 내딛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누구나 거치는 마음의 성숙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피터팬 한 명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화 속의 주인공이 아닌, 현실세계에서 나와 같은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눈밭을 뛰논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충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난 피터팬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뛰놀던 눈밭, 그리고 걸어갈 걸음에 대해 생각했다. 젖음의 걱정은 발자국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 그리고 난 여전히 흰 눈밭을 생각하고 있다. (설명문 / 건축설계 및 공간디자이너·비평연대)
■ 신곡: 지옥편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22)
고즈넉한 산사의 명부전이나 박물관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불교의 지옥도를 볼 수 있다. 시왕이 다스리며 죄지은 자를 벌하는 무서운 그림이다. 이승에서 저지른 죄에 따라 불이나 얼음, 혹은 끓는 가마솥에서 벌을 받는 그림을 보고 있자면, 모골이 송연해지며 스스로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서양에는 ‘Hell’이 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죄의 종류도 동양보다 세부적이고 벌하는 방법도 무시무시하다. 단테의 위대한 서사시이자, 이탈리아 문학의 대표작, 신곡 3부작(지옥·연옥·천국)은 이 무시무시한 공간을 자의 반 타의 반 들어가는 자신(단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단테는 수려한 표현과 비유로 명성이 자자한데, 일례로 “대기가 충만할 때면 레토의 딸이/빛살들을 붙잡아 허리띠로 삼는 것을/우리가 이따금 보는 것과 같았다.”라며 달무리를 표현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비유에도, 지옥 편은 특히 소소하고 개인적인 복수록(復讎錄)으로 보인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대립하던 시대에, 정치적인 고난을 겪은 단테는 지옥에 자신의 정적들을 집어넣고 벌을 받게 했다. 때로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위대한 예술가와 철학가들을 연옥으로 올려주기도 하며, 기독교적 세계관과 자신의 주관을 독특하게 버무려 낸다.
신곡이 시대를 넘어선 불후의 명작인 이유는 단순히 문장의 미학에만 있지 않다. 예술가로서 추상적인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만들어 구체화한다. 그리고 단테가 구축한 세계는 오늘의 예술과 미디어의 소재로 재생산된다.
위대한 작가에게 경의와 질투를 바치며, 핍박과 압박, 고난과 외면을 이겨내고 써낸 종교와 역사, 정치 그리고 어쩌면 귀여운 복수의 기록이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내려주길 소망한다. (윤인혁 / 작가·문화평론가·비평연대)
■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2021)
“마치 해부용 테이블에 뇌를 올려놓고 반으로 갈라 글쓰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신경을 핀셋으로 골라내는 것 같았다."
아시안 차별을 다룬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로 캐시 박 홍은 2021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한인 2세인 그녀는 자기고백적인 이 글을 쓰기 ‘글쓰기를 주저하는 신경을 핀셋으로 골라내는 것처럼‘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한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다룬 감정적인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당한 고통을 객관화 해서 전달 할 수 있는 언어들을 선택했다는 것이 이 책의 놀라운 점이다.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시인이었다. 한인 2세로서 서투른 영어로 더욱 서투르게 시를 쓰며 백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객관화 작업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작가에게 책 제목인 ‘마이너 필링스’ 즉 소수적 감정은 인종화된 현실을 부정하는 미국식 긍정성을 강요당해 인지 부조화를 겪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내가 인종차별적 '소수적 감정'을 경험한 적은 없다. 하지만 문득 돌아보니 ‘소수적 감정’은 삶의 어느 곳에든 매복해 있었다. 린다 노클린이 말하는 '주름장식블라우스증후군'은 수십년의 커리어를 쌓은 여성일수록 여성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어필하게 만들고 있고, 세계 최고의 예술학교 유학생들과 지방 전문대생 출신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섞여 있다는 자유로운 문화예술판계에서도 여전히 학력자본은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외면해 우리 안의 ‘마이너 필링스’는 놀랍게도 어디에나 넘쳐나고 있다.(최여정 / 작가·문화평론가·비평연대)
■ 다르게 걷기 (박산호 지음, 오늘산책, 2025)
세상을 다르게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 박산호 작가의 '다르게 걷기'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삶의 기준이나 통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 한 명의 질문과 열 명의 인터뷰이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질문력에 감탄했고, 그에 진솔하게 응답하는 인터뷰이들의 언어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자신을 주저 없이 풀어내는 모습에서 ‘자기 삶을 스스로 정의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단단함’도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세상에 정말 다양한 삶의 방식과 직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주변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직업들(예를 들자면 이집트학연구소 소장, 특수청소 전문가, 성교육 강사 등) 다양한 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나는 어느새 책 속의 대화에 몰입해 있었다. 낯선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생소함이 더 큰 호기심을 자극했다.
인터뷰 형식의 대화가 주는 ‘다음 질문을 예측해보는 놀이’도 하나의 재미 포인트였다. 인터뷰의 흐름을 따라가다 자연스럽게 “이 다음에는 어떤 질문이 나올까?”를 나혼자 괜히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예측이 맞아떨어질 때면 마치 내가 인터뷰 진행자가 된듯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유쾌함이 밀려온다.
'다르게 걷기'는 말 그대로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보는 책이다. 대화를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기존의 기준과는 다른 삶도 충분히 의미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된다. 책 속 인터뷰를 함께하며 일상의 스탠다드에서 잠시 벗어나 나만의 길을 고민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강민지 / 문화평론가·프롬레코드대표·비평연대)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