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10) 충성(忠誠)인가 의리(義理)인가? 사츠마의 두 영웅, 사이고와 오쿠보
[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10) 충성(忠誠)인가 의리(義理)인가? 사츠마의 두 영웅, 사이고와 오쿠보
  • 장시정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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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열도의 최남단 가고시마를 가다
- 일본 메이지혁명의 발상지 사츠마 본고장
시로야마 호텔에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보이는 사쿠라지마 활화산, 늘 연기가 피어오른다.
가고시마(鹿兒島)의 호텔에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보이는 사쿠라지마 활화산, 늘 연기가 피어오른다./사진=장시정 

(9) 무가(武家) 시대를 연 가마쿠라 바쿠후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도쿄에서 나고야, 신오사카를 거쳐 일본 열도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로 향했다.

가고시마는 삿초(蕯長) 동맹으로 조슈와 손잡고 메이지 혁명을 이루어낸 사츠마(蕯摩)의 본고장이며, 혁명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8~1877)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의 고향이다.

내가 도쿄에서 1,318㎞ 떨어진 가고시마까지 간 것은 순전히 이 두 사람 때문이다. 가고시마 중앙역에 내려서 호텔 셔틀을 타고 시로야마 산으로 올라가니 눈 앞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쿠라지마의 활화산이 펼쳐졌다.

나고야 역구내의 시계 조형물.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진=장시정 

유럽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느낀 것 중 하나가 도시 조형물의 격차였다. 독일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동상 같은 도시 조형물이 내 눈에는 도무지 들어오지 않았다. 여의도 한강공원 전시물들이 특히 실망스러웠다. 조형물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기 힘들 뿐더러 주위 환경과 조화롭지도 않다. 수준이 낮다.

그런데 이번 일본 여행 중 만난 나고야 역 구내의 시계나 가고시마 중앙역 뒷편 광장의 랜턴 같은 조형물은 유용하면서도 "참 근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고시마 중앙역 뒷편 광장의 랜턴 조형물/사진=장시정 

내가 머물렀던 시로야마 호텔은 바로 시로야마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호텔 내 노천 온천에서 맞은편 사쿠라지마의 활화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그리고 호텔 셔틀이 거의 30분마다 중앙역과 시내를 연결해 주기도 하지만, 워낙 대형 호텔이고 손님이 넘치다 보니(대부분이 한국 관광객) 비싼 가격에 비해 아침 식사도 무성의했고 별로 맘에 드는 호텔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호텔이 위치한 시로야마(城山) 산은 말 그대로 사츠마의 본거지인 사츠마 성이 자리했던 곳이며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산에서 유신 정부군과 싸우다 생명을 다한 곳이다.

시로야마 호텔에서 내려다 보이는 가고시마시 전경/사진=장시정 
​시내 천문관 상점가
​시내 천문관 상점가/사진=장시정 

메이지 유신의 주역,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

가고시마 도착 첫날 사이고와 오쿠보의 동상부터 찾아 나섰다. 해는 이미 넘어갔지만 다음 날은 여기서 322㎞나 떨어진 나가사키를 다녀와야 했기에 부득이 밤거리로 나갔다. 가고시마 시립미술관 옆에 자리 잡은 사이고의 동상은 주변 경관을 잘 조성해 놓았다.

도쿄의 우에노에도 그의 동상이 있지만(사이고가 그의 애견을 데리고 있는 동상) 사이고의 부인과 가고시마 주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해서 주민들의 성금으로 이 동상을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사이고가 육군대장의 제복을 입고 있다. 여기 안내판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인용해 본다.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사진=장시정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말이 안내판 첫머리에 나오는데, 아마도 사이고가 좋아했던 말인듯하다. 그는 메이지 혁명의 리더로서 특히 메이지 천황의 신임을 받았고, 신설된 천황 경비대 사령관인 육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농업개혁론을 주장해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를 감동시켰고 그의 측근으로 활동한다. 나리아키라가 급사하자 그는 동반 자살을 기도하여 킨코베이 바닷물에 뛰어들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유배생활을 하다가 오쿠보 도시미치와 의기투합하여 반막부파에 합류하였고 비밀협상에 참여하여 사츠마 동맹을 이루어 낸다. 이어서 벌어진 막부군과의 보신(戊辰)전쟁에서 막부군이 저항없이 에도를 내어주도록 교섭하는 데 주역을 담당한다. 메이지 혁명이 성공하면서 페번치현에 앞장섰고 이와쿠라 사절단의 해외 방문 중에는 국내에 남아서 루스정부(留守政府)를 전적으로 책임졌다.

​유신 후 폐도령(廢刀令)으로 무사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사이고는 이를 해소할 겸 정한론을 주장하였다.(이 안내판에는 '겐칸(遣韓) 사절'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정한론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여타의 혁명 주역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그는 가고시마로 낙향하여 사숙(私塾)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매진한다.

1877년 사츠마의 사무라이들이 혁명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세이난(西南) 전쟁이 나자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패퇴하면서 시로야마 산에서 자결하여 생을 마쳤다. 이 동상은 가고시마의 유명 조각가 안도 테루(安藤照)의 작품이다.

오쿠보 도시미치 동상/사진=장시정 

한때 사이고의 고향 친구이자 혁명 동지였지만 시세의 흐름을 피하지 않고 그가 지휘하는 반란군을 타도한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은 사이고의 동상보다 좀 빈약해 보였다.

그의 안내판에 소개된 그의 모토는 이세이세이메이(爲政淸明)이다. "정치가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영어로도 쓰여 있다. Statesmen should be of pure heart.

그는 1863년 사츠에이(㝫英) 전쟁 직후 평화협정을 이끌어 내면서 일본의 고립을 끝냈다. 한때 천황과 막부가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공무합체론을 주장하였지만, 유배 중인 사이고를 돌아오게 하여 그와 함께 조슈와의 비밀협상을 주도하여 사츠마 동맹을 추동하였고 결국 막부 타도를 외치는 토바쿠(討幕)에 앞장섰다.

1868년 혁명 정부가 수립되자 1871년 번주의 땅과 사람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폐번치현(廢藩置縣)과 판적봉환(版籍奉還)을 성사시켰다. 재무장관으로 토지세를 개정하고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구미를 방문 후 돌아와서는 내무부를 신설, 내무장관이 되면서 혁명 정부의 가장 막강한 실권자가 되었다.

일본에서 1885년 이토 히로부미가 첫 총리가 될 때까지는 내무장관이 메이지 치하 국내 권력의 최고 실권자였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누르고 일본이 국력을 충분히 길러 대내 문제가 안정될 때까지 해외 원정을 보류한다는 정책을 관철시켰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본의 비스마르크라고 불린다. 비스마르크는 해외식민지 확장에 반대하였다. 친구 사이고가 일본 역사상 마지막 내란이라는 세이난(西南)전쟁을 일으키자 정부군을 지휘하여 이를 진압하였지만 그도 그 다음해인 1878년 도쿄에서 친사이고 사무라이들에게 살해당한다.

日 메이지혁명을 ‘물고 뜯고 반추’해야 하는 이유

​조슈와 함께 일본 메이지혁명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과연 메이지혁명은 무엇이었던가?라는 물음에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었다.

나의 한 ‘페친’은, 우리가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역동성을 돌아보고 물고, 뜯고 해봐야 한다고 했다. 동의한다. 그들이 메이지혁명으로 승리의 길로 나아갈 때 메이지 천황과 동갑인 고종 치하의 조선은 패자의 길을 걸었다. 메이지혁명을 물고 뜯고 반추해야 할 충분한 당위성이 있지 않겠나.

메이지혁명의 의의라면 당시 서양의 압박에 직면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중앙집권국가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쇄국 대신 개국을 택하여 이러한 도전에 당당히 맞서 세계열강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국가 기초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도쿠가와 막부에서 변두리로 내몰렸던 사쓰마나 조슈 같은 도자마한(外樣藩)들의 260여 년 막부체제에 대한 반란으로도 볼 수 있지만, 국가의 위기에 처하여 이를 극복한다는 대의가 있었기에 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멸망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복수극인지도 모르겠다. 도자마한은 히데요시 편에 섰던 서군(西軍)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사츠마의 사무라이들은 1609년 류큐왕국(오키나와)을 정복하였고, 1862년 번주의 행렬에 끼어든 영국 상인을 베어버린 '나마무기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고시마는 일본의 넬슨이라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1905년 대한해협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일로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추후 사츠마 출신들이 일본 해군의 간성이 되었는데, 2차 대전 시 조슈 출신들이 지배한 일본 육군과 대립하게 된다.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인의 의리(義理)에 대하여, 이것을 모르면 일본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의리는 충효(忠孝)와 다른 것이며, 유교나 불교의 덕목도 아니라고 했다.

가고시마 사람들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특별히 생각하는 발로가 바로 의리가 아닐까? 오쿠보 도시미치도 동향 출신으로서 메이지 유신에 처음부터 끝까지 몸 바친 사람이지만 가고시마 사람들은 유신에 저항한 사이고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이고는 메이지 천황에 대한 충성보다는 자신의 고향 사츠마에 대한 의리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일본의 역사에 많이 남아있다.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미나모토 요시쓰네에게 열렬한 의리를 바친 승려 벤케이(弁慶, 13세기)나 멸문지화를 무릎쓰고 주군의 복수를 감행한 47인의 로닌(18세기)은 오늘날까지 모든 일본인의 영웅이자 국민적 서사시가 되었다.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인의 의리를 자신의 명성에 대한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로 보았다. 그런데 중국인이나 태국인, 인도인에게서는 이런 문화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중국인은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을 소인배적인 행태로 본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 정승 집의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게 현대의 세태가 아닌가? 고리타분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일본인의 의리문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재삼 새겨볼만한 덕목이 아닌지.

장시정 칼럼니스트

장시정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다. 지난 36년 간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며 외교 일선에 몸담았다. 수차에 걸친 독일어권 근무 중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에 걸쳐 나타나는 모델적 제도와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했고 2017년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했다. 동 저서는 2018년 상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 사회과학 분야에 선정됐다. 퇴직 후에는 2019년 홋카이도 대학 방문학자로 일본에 머물렀고, 2023년 1월과 3월에 외교안보, 정치, 경제, 사회 에세이집인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레트로 대한민국>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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